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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Nov 10. 2022

우리의 끝을 기억해줘.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며칠 전 남편과 나는 잠수교에 갔었다. 우리는 잠수교를 '신비한 공간'으로 느낀다. 물이 차오르면 사라졌다가 물이 마르면 나타나는 다리. 최첨단의 기술이 발달한 서울 한복판에 마술처럼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다리가 있다는 게 우리에게는 한없이 매혹적으로 느껴진다. 유치하지만 우리는 잠수교를 생각하면 신이 나는 것이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주인공이 누군가를 비밀스레 만나거나, 무언가를 한강 물에 몰래 던져버리거나, 혹은 누군가를 미행할 때마다 잠수교가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설렜던 것이다. "잠수교다!" 내가 외치면 남편은 귀가 번뜩하는 얼굴로, "이번 여름 장맛비에도 잠수교가 잠겼었지?" 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응, 그때 장난 아니었지. 서울에 물난리 났었잖아." 우리는 불과 3개월 전에 있었던 참혹한 재난의 현장과 우리에게 끊임없이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공간 사이를 어설프게 건너며 대화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 대화의 끝에 '언젠가 남편과 잠수교를 걸어서 건너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잠수교는 티브이에서 봤던 것처럼 한강 수면과 아주 가까이 서 있었다. 우리는 잠수교의 중간쯤에 서서 한참이나 강바람을 맞았다. 그 기분은 예상보다는 좀 싱거운 것이었는데, 아마도 우리는 물에 잠긴 다리와 다시 물 위로 떠 오른 다리 사이의 간극에서 환상을 가졌기 때문이리라. 맑고 화창한 어느 가을날, 절대 물에 잠길 리 없는 잠수교는 그저 그런 다리였다. 그래도 즐거웠다. 우리가 언제 '신비로움'을 찾아 나서 보겠나. 삶은 사실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정작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신비로움을 느낄 새가 없다. 신비로움은 보통 불편함, 짜증, 괴로움, 힘듦으로 순식간에 대치된다. 예측 불가능한 신비로운 일들이 많은 삶이요? 사양할게요, 월급날이나 따박따박 지켜주세요, 신비로움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 느낌. 그러니 어리석은 인간인 우리가 신비로움의 정체를 오래 좋아하고 그리워하다 끝내 그 정체에 다가가 보는 일이 즐겁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게 강바람을 한참 맞다 보니 잠수교 초입에 임시 정류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버스는 정확히 7분마다 한 대씩 잊지 않고 오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버스를 타면 남편과 내가 다니던 대학으로 갈 수 있었다. 헛, 저 버스를, 타볼까? (평소에는 남편과 버스를 타는 일을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계획에도 없이 버스에 올랐다. 흔들리고 비틀거리는 우리를 지켜보던 작고 친절한 아저씨는 남편이 안 보인다는 걸 눈치채고 문 바로 옆자리를 양보해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앉으니 좀 더 신이 났다. 창을 열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어쩌면 잠수교의 신비가 진짜 존재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마치 마법에 걸린 듯한 기분으로 한낮의 도시를 달린다.


그렇게 덜컹거리며 마법에 걸리다 보니 어느새 남편과 내가 함께 다니던 대학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남편과 나 둘 다 졸업한 후로는 거의 와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는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고, 그 많은 일들은 우리가 건너온 시간의 크기를 잔뜩 부풀렸다. 우리는 5년이 아니라 50년쯤은 살아온 것 같은 기분으로 다음 정류장이 OO 대학이라는 안내 방송을 듣는다. 나는 이미 전전 정류장에서부터 남편에게 학교 근처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지하철역, 지하철역 주변, 우리가 자주 가던 학교 후문 언덕길 위의 순댓국집 자리(순댓국집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 또 우리가 자주 가던 도화식 콩나물국밥집 자리(콩나물국밥집 역시 없어진 지 오래), 어째 죄다 해장 메뉴네, 그러다 보니 동문회관이 나타나고, 비로소 정문에 이른 것이다. 버스 정류장은 정문 좀 못 미친 곳에 있어서, 우리는 학교 정문을 버스 안에서 지나치며 바라보아야 했는데, 버스는 그리 빠르게 달리지 않아서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학교 앞을 촬영하듯 살펴볼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그대로'라는 감각이 나에게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나에게 '나'라는 영혼을 만들어준 곳. 그러느라 너무 많은 부끄러운 기억과 창피한 순간들이 빼곡히 떠오르는 곳. 아주 많이 부딪히고 깨지느라 자주 울었던 곳. 깊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했던 곳. 수많은 미움과 원망, 딱 그만큼의 사랑과 낭만이 있었던 곳. 그리고 지금의 남편을 만난 곳. 버스는 어느새 학교 정문을 벗어나 대로로 나섰지만 나와 남편은 각자의 추억 속으로, 각자의 기억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저곳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고, 누구를 만났을까. 과거는 그렇게 순식간에 우리 둘을 감싼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떠올린 적도 없었던 기억들이, 회상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회상할 만한 기회도 이유도 없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다. 그것들은 하나도 상하지 않고, 유실되지 않고, 오히려 더 생생해진 것처럼 보인다.


"과거를 떠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결국 과거를 쫓고 있음을, 결국 언젠가는 미래 속에서 그 과거를 다시 붙잡게 된다. 과거도 시간을 지닌다. 과거는 미래의 교차로에서 끈질기게 기다리다가, 과거로부터 탈출했다고 믿는 사람에게 진짜 감옥을 열어준다. 그곳에는 죽은 자들의 불멸성, 잊힌 것들의 영속성, 죄인이라는 운명, 고독이라는 동행, 사랑이라는 유익한 저주, 이렇게 다섯 개의 감방이 있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의 구절을 떠올린다. 우리는 신비로운 잠수교를 건너 이곳 - 과거 - (으)로 왔다. 너무 뜨겁고 또 너무 과했던, 모든 걸 알려고 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몰랐던, 뭔가가 되려고 하는 마음과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 싸우던, 어린 나와 어른 나가 매 순간 겹쳐지던 혼란스럽고 아름다운 시간에 도착했다. 디에간이 그랬던 것처럼.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의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을 읽었다. 디에간은 이 소설의 화자로 학위를 포기하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첫 소설을 발표하고 방황하던 중에 T.C. 엘리만이라는 작가의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라는 소설에 관한 의문을 품게 된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이 책을 구할 수 없어 점점 더 이 소설에 관한, 그리고 표절 시비에 휘말린 후 세상에서 완전히 종적을 감춰버린 소설의 저자 T.C. 엘리만에 관한 궁금증만 더해간다. 디에간은 결국 자신의 방황과 엘리만의 첫 소설이자 마지막 소설이 돼버린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를 어떤 '운명'적인 끌림으로 연관 짓게 되고, 자신이 소설을 계속 쓸 수 있을지, 엘리만은 왜 이런 엄청난 소설만을 남긴 채 종적을 감췄는지 그 답을 찾으러 떠난다.


이야기는 디에간이 엘리만의 삶을 뒤쫓는 여정을 따라 파리 - 암스테르담 - 부에노스아이레스 - 다카르 등을 오간다. 디에간은 닥치는 대로 그의 흔적을 찾는다. 누군가를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편지를 읽는다. 그는 마치 자신이 다다른 막다른 골목에 출구를 내기라도 할 것처럼 절박하게 엘리만을 쫓는다. 하지만 어쩐지 우리는 예상하게 되는 것이다. 디에간이 엘리만을 찾아낸다고 해도, 혹은 엘리만이 남긴 어떤 결정적인 흔적을 마주한다고 해도, 디에간은 엘리만을 완전히 알게 될 수는 없을 것임을. 그건 스스로가 처한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를 찾아낸다는 게 그를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고 알게 되는 건 더더욱 아님을 깨"닫는 것이 이 기나긴 여정의 결론이 될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런 똑똑한 조언도 디에간을 막을 수는 없다. 그는 마지막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용기를 지닐 것,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해낼 것."


디에간의 여정은 단지 디에간이라는 인간 한 명이 엘리만이라는 인간 한 명을 찾아가는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들이 살아온 시간 속의 또 다른 커다란 이야기들 - 1, 2차 세계 대전이나 나치즘, 식민 지배, 세네갈의 정치적 상황과 정치 투쟁, 아프리카의 전통적 신비주의 등 - 과 끊임없이 조응하며 흘러간다. 디에간이 태어난 곳의 언어가 불시에 우리의 잠을 깨우고, 식민주의의 잔재가 뼈아픈 과거를 일깨운다. '아프리카인들은 미개할 것이다'는 오래된 편견에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기도 하고, 우리 시대에 문학이 여전히 숭고한 위치를 가지는가 하는 낡고도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게 하더니 끝내는 이 혼란한, 부조리한, 복잡하고 서글픈 세상 속에서 문학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 모든 질문은 이제 막 두 번째 소설을 준비해야 하는, 다시 말해 아직은 자신을 '작가'라고 칭하는 데 어색하고 두려울 뿐인 한 초보 작가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닿는다. 나는 궁금합니다, 내가 건너가야 할 것들을 모두 건너고 나면, 나는 무엇이 되는 걸까요. 디에간은 엘리만을 찾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묻고 있다. 엘리만을 만났다 해도 그는 다시 엘리만이 아니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섰을 게 분명하다. "엘리만씨, 반갑습니다, 오래 찾아다녔어요. 그나저나, 문학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리고 여기 대한민국의 나는,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나의 청춘의 시간을 여행하다가 문득, 그가 던진 질문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질문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우리의 '삶'이라는 한 편의 소설을 써나가는 작가라고 가정한다면, 그러니 삶은 끝내 문학인 거라고, 아니 차라리 문학은 결국 삶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거라고 한다면, 문학이 무엇인가요, 혹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라는 질문은 우리가 삶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일 것이고,


그것은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라는 질문과 맞닿는 것이다. 디에간은 엘리만을 찾아가는 내내 묻는다. 당신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당신은 왜 숨은 거냐고, 당신은 얼마나 괴로웠느냐고, 당신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무엇을 찾았던 거냐고. 그리고 그 모든 질문은 결국 엘리만을 알고 싶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엘리만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토록 어둡고 두렵고, 동시에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리는, 이 한 권의 책 안에 '모든 책이 다 들어 있는 불가능한 책'을 쓴 당신의 내면이, 당신의 상처가, 당신의 아픔이 궁금합니다. 제가 당신을 만나게 해주세요. 당신의 삶을 알게 해주세요. 당신이 이 한 권의 책으로 다 담아낸, 아니 실은 시작조차 하지 못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상처가 있다고 반드시 글로 써야 하는 건 아님을 깨달았다. 상처가 있다고 글을 쓰고 싶어지는 것도 아니고 쓸 수 있다는 뜻도 아니었다. 시간이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걸까? 그렇다. 시간은 우리의 상처가 유일하다는 환상을 없앤다. 우리의 상처는 유일하지 않다. 그 어떤 상처도 유일하지 않다. 인간적인 그 어떤 것도 유일하지 않다. 시간과 함께 세상 모든 것이 끔찍하리만큼 진부해진다. 우리는 그런 막다른 길에 놓여 있다. 하지만 문학은 바로 그런 막다른 길에서 태어날 기회를 얻는다."


상처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언제나 이뤄질 수 없는 두 가지 소망을 품는다. 내 상처가 유일해서 나의 고통 역시 유일하고 그렇기에 특별하다고 여겨지기를 바라는 마음, 동시에 이 상처가 당신에게도 있어서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언제나 실패한다. 우리가 가진 상처란 유일하지 않고 당신이 나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어쩌면 문학 속에서 우리는 아주 은밀하게 저 두 가지 소망을 실현하는지도 모른다. 문학 속에 담긴 상처는 유일하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때로는, 문학이 나의 어떤 상처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치유와 과정은 나의 상처가 유일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방증하지만, 문학 속에서 우리는 이 모든 '사실'들을 잊는다.


우리는 결국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지 못한 채로 흘러가 버린 시간을 그리워하기 위해, 보듬고 매만지기 위해 문학을 읽는다. 그때의 나에게 괜찮았느냐고, 어디가 아팠느냐고, 지금은 좀 나아졌느냐고 물어봐 주려고 소설을, 시를 읽는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그 질문들을 글로 옮긴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삶을 통해 질문을 던지지만, 여전히 그 질문의 주체이자 대상은 '나'일 것이다.


그렇게 디에간은 엘리만이 스스로 차마 던지지 못했던, 몇 번의 삶을 사는 동안에도 그저 감추고 숨겨야만 했던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 마치 천재이고, 신비의 존재이며, 불가항력적인 능력을 갖춘 초월적 존재인 것처럼 여겨지던 엘리만의 진짜 모습이 서 있다. "그는 인간이었어. 고통스러운 기억들과 대답 없는 질문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그러니까 우리가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 그는 결국 인간, 그러니까 우리가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존재였어."


버스는 계속 덜컹거리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어지럽게 얽히는 상념들 속에서 나는 디에간을, 시가D.를, 그리고 엘리만을 떠올린다. 그저 인간이었을 뿐인 그를, 그들을. 그리고 그저 인간이기에 그들이 걸어왔던, 걸어가는, 걸어갈 길들을. 역시 그저 인간이었을 뿐인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나는 얼마나 자주 과거의 나를 미워했었나. 한 번도 뜨겁게 사랑해주지 않았으면서, 열 번 스무 번의 미움을, 다그침을, 부끄러움을 주었었나. 그저 인간이었을 뿐인 그때의 나를, 나는 어쩌자고 그리도 모질게 대했었나. 왜 한 번도 괜찮냐고 묻지 못했을까. 괜찮다고 말해주지 못했을까.


"하지만 영원히 그대로인 사람은 없다. 그대로인 게 꼭 좋은 걸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자신은 굳은 뼈처럼 단단할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일 뿐이다. 그런 맹목적인 믿음은 삶의 조롱을 받아도 할 수 없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그 움직임과 불확실성과 상황들은 우리가 절대 바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주장해온 가치와 원칙을 부수곤 한다."


우리는 과거를 버릴 수 없고, 미래와 살 수도 없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건너온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 뿐이다. 그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고 생각한다. 고작 인간일 뿐인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미숙하고 너무 자주 바보 같아서 그 부끄러운 과거 대신 차라리 오지 않은 미래를 택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늘 후회한다. 과거의 나를, 그리고 과거도 현재도 없이 미래만을 바라는 나를. 그 부박한 시간을 건너며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페이지는 내가 평생에 걸쳐 써야 할 단 하나의, 불가능한 책이고, 그렇다면 나는 인간이었던 과거의 나를, 인간일 뿐인 지금의 나를 끌어안고 싶다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그것뿐이라고. 너무 가엾고 불쌍한 나를, 우리를, 끌어안고 울고 싶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문 앞에 설 수 있지 않을까. 그 문 앞에는 "쓰기(살기)와 쓰지 않기(살지 않기)"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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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끝을 기억해줘,

진한 고독을 떠올려줘,

우리 모두가 지킬 석양의 약속을 생각해줘."

-<우리는 어디서 끝을 맞는가> 중




덧1. 준비도 없이 이뤄진 갑작스러운 학교와의 (혹은 과거와의) 조우는 아쉽게 끝이 났고, 우리는 한적한 주말의 학교에 언젠가 다시 한 번 찾아오자고 말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작은 학교를 오래 걸을 것이다. 그날 만나는 옛날의 나에게 너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임을 안다.


2.  글을 써두고 불과 며칠 후에 이태원에서 수많은 젊은 생명들이 허망하게 죽음을 맞았다. 내가 소개한 소설과  글에 담긴  모든 고민과 열망들도 결국 '살아있으므로' 가능한 것임을 잊지 않겠다. 잊으려  때마다 기억하겠다.  살아있음이 아니라 당신들의 죽음을.  자리를 빌어 다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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