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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an 03. 2023

차마 묻지 못했다는 말

그와 나를 둘러싼 공기가 부드러워지기 시작했을 때, 지금이 적기라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으므로,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때로는 그래야만 하는 게 나의 직업이므로, 비수가 될까 두려워하며, 그러나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저작권 등록을 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당신 작품을 베껴서 돈을 버는 걸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할 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격분할 거라 예상했지만 노인은 담담했다. “다 잊었다. 내 마음속에서 그 일을 다 몰아내버렸다. 나는 거기에서 벗어나 이 섬으로 왔다.” 흔들림이 없는 눈빛이었다. (중략)

사랑에 상처받고, 사랑에 배신당했지만, 한 번도 사랑을 버린 적 없었던 한 남자가 자신을 쫓아낸 도시에 세운 커다란 사랑. 그 사랑을 만날 때마다 사랑을 말하던 그를 생각했다. 잊지 못했을 거면서도 “다 잊었다” 말하던 눈빛을 떠올리고 있자면 명치끝에서부터 눈물이 차올랐다. 그가 애증을 긴 세월 삭이고 삭여 사랑으로 승화시켰다는 걸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118~119쪽)


#곽아람

#쓰는직업

#마음산책


✏️ 대체로 유쾌하고, 대부분 솔직하고 담백한 이 책의 서술과 내용들 중에서 이 부분은 유독 (물론 역시 담백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나에게 꽤 뭉클하게 다가왔는데,


그가 “다 잊었다”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는 장면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자의 말,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떠올리고 있자면 명치끝에서부터 눈물이 차올랐다”는 그 말이 나를 울컥하게 했다. 나 역시 명치끝이 아렸으므로.


그가 끝내 사랑을 말하기까지, 애증의 도시 뉴욕을 떠나 바이날헤이븐섬에 스스로 은둔해서 보냈을 시간을 상상해보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몸의 상처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처에도 똑같이 반응한다지. 그러니까 마음이 받은 상처에도 뇌는 치료와 휴식을 기대하고 있는데, 우리 대부분은 몸의 상처만큼 마음의 상처에는 반응해주지 않는다지. 그는 오랜 시간 자신의 마음에 난 상처를 돌보려했겠지만, 그건 쉽지 않았을테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했을”테지.


나는 감히, 기자가 그것을 물어서 인디애나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혹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쩌면 아무도 그에게 어땠느냐고, 지금은 좀 어떠냐고 묻지 못했을테고. 종종 그 배려와 사랑의 눈빛은 되려 상처받은 이로 하여금 버려진 느낌이 들게 하니까. 그 상처와 나, 둘 뿐이라고 느끼게 하니까. 먼 타국에서 날아온 낯선 기자의 그 질문, “그때의 심정이 어땠습니까?”에 “다 잊었다”고 답하는 순간을 인디애나는 기다렸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한 번쯤은, 괜찮은 척 담담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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