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대상 : 뇌과학에 진지하게 흥미가 있는 사람
추천 정도 : ★ ★ ★ ★ ★
추천 사유 : 이제까지 철학이 고민해왔던 부분들을 신경학이 왜? 어떻게? 무엇이? 라는 부분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증명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흥미로웠다. 인간이 수백세기 동안 고민해온 문제,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에 대한 대답을 이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탐색해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멋지다.
뇌 스캐너와 유전자 순서기보다 면봉과 거울을 선호한다고 해서, 내가 과학기술을 전적으로 피하는 것은 아니다(단지 현미경 없이 생물학을 연구한다고 생각하라!). 나는 신기술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신기술 반대론자는 아니다. 내 관점은 이렇다. 과학은 ‘왜'라는 의문이 중요하지, 방법론이 앞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p.22
엄청난 역설은 그가 모든 면에서 정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언어, 기억, IQ까지도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본성을 정의하는 가장 본질적인 특성 중 많은 것을 잃어버린 상태다. 야망, 감정이입, 예지력, 복합적 개성, 도덕성,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관한 감각 등이 그렇다.(흥미롭게도, 부족한 공감과 도덕적 기준, 자제력은 자주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에게서 보인다. 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는 그들에게 아마 임상적으로 찾아내기 어려운 전두엽 기능장애가 있으리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이유로 전전두렵 피질은 오랫동안 ‘인간성의 자리'라고 간주되어 왔다. 비교적 작은 뇌 한 덩어리가 이렇게 세련되고, 한데 모으기 어려운 기능을 어떻게 오케스트라처럼 조정하는지 정말 여전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p. 34
거울신경과 그 기능의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과장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학습, 모방, 그리고 문화전승의 사고방식과 기능이 그 핵심일지 모른다. 우리가 '말'이라고 부르는 소리 집합도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과도하게 발전하는 거울신경 시스템에 의해, 진화는 실제로 문화를 새로운 유전자로 변화시켰다. (중략) 그래서 문화는 뇌가 더 나은 거울신경 시스템과 모방학습 시스템을 선택하도록 진화를 압박하는 새로운 힘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전체 우주가 그 속에 비춰지는 것을 알았던 유인원인 호모 사피엔스가 되었다. 굴러내리면서 스스로 커지는 눈덩이 효과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p.36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상징적인 시각적 장표를 만들 수 있고, 그것들을 마음의 눈으로 독창적인 병렬배치를 시도하기 위해 적절히 바꿀 수도 있다. 유인원은 아마도 바나나 또는 그 무리의 우두머리 수컷의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림으로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날개가 돋은 아기(천사) 또는 반인반수(켄타우로스)의 존재 같은 새로운 조합을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시각적 상징을 적절히 배합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과 실물 살징성의 적절한 배합은 아마도 인간의 또 다른 고유한 특징인 언어에 대한 필요조건일 수 있다. p. 68
다윈의 진화론은 모든 시대를 막론하여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 중의 하나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이론은 사후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는 다른 이슈보다도 더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몇몇 미국의 학군은 교과서에 지적설계 '이론'과 동등하게 싣도록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이것은 정말 창조주의에 대한 치부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영국의 과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리처드 도킨스가 계속해서 지적한 바와 같이,논쟁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생각에 동일한 지위를 부여하자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진화론이 나왔을 시기의 지식 격차는 당연히 의심할 만큼 충분한 여지가 있었다. 그때는 DNA와 생명의 분자 기계의 발견하기 훨신 전이며,고생물학이 이제 막 시작하여 화석의 기록을 하나씩 모으던 시기다. 이 관점은 오래 전의 것이다. 진화론이 모든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마음과 뇌의 진화에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과학자로서 자만심이 심하다고 할 것이다. p. 182-183
나는 이 세포들을 '간디 신경'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자신과 다른 세포 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다. (중략)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라.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 행동을 할 때 사용되는 뇌신경이 마치 여러분 자신이 직접 그 행동을 하는 것처럼 활성화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바늘에 찔리는 광경을 본다면, 여러분의 통증 신경은 마치 자신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활성화될 것이다. 말 그대로 환성적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재미있는 의문이 생긴다. 무엇이 여러분이 보는 모든 행동을 따라하지는 못하게 하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지는 못하게 할까? p.191
자폐증은 자아에 대한 유일한 인간적인 감각이 '공허한 무無가 아니다'라는 것을 상기한다. 그감각이 프라이버시와 독립성을 아주 강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아는 실질적으로 타인과, 그리고 자아가 깊게 뿌리 내린 육체와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드러난다. 자아는 사회로부터 떨어져 있거나 그 자신의 육체로부터 격리되어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의 존재를 인간이라고 정의하는 성숙한 자아의 감각 속에 있는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자폐증은 근존적으로 자의식 장애로 다루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이 장애의 연구는 의식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p.244
인간은 완벽한 언어를 갖고 있는 유일한 존재다. 침팬지조차 '과일 주세요'와 같은 단순한 문장을 표기할 정도로 훈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조가 우두머리 수컷이지만, 늙고 게을러지는 것은 사실이다.그래서 그가 특별히 화가 나지 않았다면 걱정할 것 없다'와 같이 복잡한 문장은 흉내내기조차 어렵다. 무한한 유연성과 끝없는 개방성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언어는 인류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평범한 말속에 의미와 구문론적인 구조가 너무나 가깝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정말로 각각 특징이 있는 것인지 믿기 어려울 정도다. p.249
'지식'과 '이해'는 무엇을 뜻하는가? 어떻게 해서 수십억개의 신경이 그것을 얻는가? 이것은 완벽한 불가사의다. 나는 인식신경과학자들은 여전히 '이해하다’, '생각하다'와 같은 단언의 정확한 뜻에 대해 여전히 모호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추론과 실험을 통해 하나씩 답을 찾아야 하는 과학의 업무이다. 실험을 통해 이 불가사의에 접근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언어와 생각 사이의 연결고리는 어떨까? 어떻게 실험을 통해 언어와 생각 간의 찾기 어려운 접점을 탐험할 수가 있을까? p.287
직감이든 천재성이든 간에, 피카소와 헨리 무어와 같은 예술가들은 시행착오를 통해 인간 두뇌와 갈매기 뇌 속의 세 줄무늬 막대기가 동등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원시상태에 있는 우리의 지각의 문법을 일깨워, 실제로 보이는 이미지와는 반하는 뇌 속의 특정한 시각신경을 강력하게 자극하는 '울트라 노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추상미술의 본질이다. 이러한 내용을 명심했으면 좋겟다. 예술에 대해 너무 과장된 생각을 갖고 있는 환원주의자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예술이 전부가 아니라 나의 중요한 부품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울트라 노말’ 자극의 원리는 미술뿐 아니라 여러분이 누구에 매혹된 것처럼 미적 취향의 다른 기이한 성격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우리 개개인은 성이 다른 사람들(예를 들어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흥미진진한 여러분의 진정한 첫사랑)에 대해 어떤 견본을 갖고 다닌다. 어쩌면 당신은 납득이 안 가고 균형 감각이 없으면서도 끌리는 그 사람들이 이러한 초기 원형의 울트라 노말 버전이라는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여러분이 어떤 면에서도 분명히 아름답지 않은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이유 없이 끌린다고 해서 단지 페로몬 혹은 '정호가한 화학 신호'와 같은 결론을 바로 내리지 마라. 그녀 (혹은 그)는 당신의 무의식에 깊이 묻혀 있는 성에 대한 울트라 노말 버전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기 바란다. p.
나는 나디아의 뇌 영역 가운데 많은 부분이 빈약하게 기능하기 때문에,오히려 그녀의 주의지원이 가장 큰 몫을 얻도록 그녀의 남은 오른쪽 두정엽-그녀의 라사 모듈-을 해방시켰다고 제안하고 싶다. 그러나 정상적인 여러분과 나는 단지 훈련과 노력을 통햇만 그런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가설은 어째서 그녀의 그림이 다빈치의 그림보다 더 많이 시선을 끄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p.351
이 청동작품의 위엄을 느끼기 위해 신앙심이 깊을 필요도, 인도 사람일 필요도, 혹은 로댕이 될 필요도 없다. 이 작품은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파괴하는 시바의 춤을 아주 기본적인 수준으로 요사한다. 그러나 조각품에는 더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우주의 춤, 우주의 움직임과 에너지 그 자체의 비유다. 예술가는 많은 장치들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이러한 감각을 묘사한다. 예를 들면, 팡릐 원심동작과 다리의 여러 방향으로 흔들거리는 것, 그리고 구불구불한 머리가 나부끼는 것들이 우주의 동요와 광란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소요-삶의 변덕스러운 광기-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시바의 고요한 영혼이다. 조각가는 최상의 평온과 균형으로 손수 만든 창조품을 바라본다. 한손에는 외견상 상반되는 움직임과 에너지의 요소를, 다른 손에는 영원한 평화와 안정을 얼마나 능숙하게 조합했는가!
내부의 영원하고도 안정된 감각은, 광기 속에서도 살짝 구부린 왼쪽 다리를 통해 그에게 균형과 평온을 준다. 그리고 그것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표정에 의해 전달된다. 이것은 영원한 감각을 전달하는 것이다. 몇몇 나타리자 조각품에서 이런 평화로운 표정은 신비에 싸인 반 미소가 대신한다. 마치 위대한 신이 생과 사를 보는 것 같은 웃음을 띤 것 같이 말이다.
이 조각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하인리히 지머와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같은 인도학자들은 열정적으로 그 의미를 빛내고 있다. 대부분의 서양 조각가들이 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한 반면, 인도 예쑬가는 자연의 시간 자체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불의 고리는 동양 철학의 일반적인 주제인 우주의 창조와 파괴의 영원한 순환, 윤회를 상징한다. 그러나 때로 서양 사상가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나는 트히 영국의 천문학자이자 공상과학소설가인 프레드 호일의 진동우주론을 떠올렸다).
시바의 오른손 중 하나는 북을 쥐고 있다. 이것은 우주를 때려서 창조하고, 움직이는 물체의 맥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왼손 중 하나는 불을 들고 있다. 열을 내고 우주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파괴를 허용하여 영원한 순환에서 균형을 잡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역할도 한다. 그렇게 나타라자는 시간의 추상적이면서 역설적인 삼라만상을 전달한다. 이전에 창조된 모든 것을 삼키면서 말이다.
시바의 오른발 아래에는 무서운 악마인 아파스마라가 있다.'무지의 환영'이라 불리는 것으로 시바가 그것을 일그러뜨리고 있다. 그러면 이 환각은 무엇인가? 이 환각은 과학적 형상을 한 우리 모두가 그것으로 고통 받고, 지각없는 원자와 분자의 나선 이외의 어떤 것도 우주엔 없다는 것이며, 외적인 것 뒤에는 더 심오한 실재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일부 종교에서 망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각각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그 자신의 특별한 지점에서 생의 현상들을 지켜본다는 것이다. 사후에는 끊임없이 공허함밖에 없다는 논리적인 망상이다. 시바는 만약 여러분이 환각을 부수고 그래서 들어올린 왼쪽 발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한다면(그의 왼손이 가리키고 있다), 외부 모습(마야) 뒤에 더 심오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 말한다. 이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냉담한 관중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쇼를 지켜보기 위하여, 여러분은 죽을 때까지 우주의 썰물과 밀물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더불어 불멸과 열반에 다가갈 수 있다. 환각의 주문에서 해방되고 최고의 진리인 시바 자신과 일치가 된다. 내 마음 속에는 시바나 나타라자보다 신이라는 추상적 사고에 대한 더 위대한 예시화는 없다. 예술비평가인 쿠마라스와미는 “이것은 詩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다"라고 말한다. p.375-376
그릇된 사실은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과학 발전에 있어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근거가 뒷받침 되기만 한다면 잘못된 시각은 거의 해롭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오류를 증명하면서 유익한 즐거움을 느기기 때문이다. 증명이 끝나면 오류로 가는 길은 폐쇄되고 동시에 진리로 가는 길이 열린다. -찰스 다윈, p. 383
5. 사회적 수용. 자아는 다른 이의 뇌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프라이버시와 자율성이란 오만한 감각을 보유한다.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내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자존심과 거만함, 허영심, 야망, 사랑, 두려움, 자비, 질투, 분노, 자만, 겸손, 동정, 그리고 자기연민까지, 사회적 공백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397
질병부인은 내가 이 책에서 '신념'은 하나가 아니라고 반복해서 강조한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예이다. 신념은 진실한 자아가 대수롭지 않은 추상적 개념이 될 때까지 포장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낼 수 있도록 수많은 층으로 되어 있다. 철학자 댄 데네트가 한때 말한 것처럼 자아는 개념적으로 복잡한 사물의 '중력의 중심’ 즉, 하나의 가상점에서 교차하는 많은 매개체와 유사한 것이다. p.426
철학은 특질과 자아와의 관계 등과 같은 추상적 질문들을 생각하며 의식의 문제를 바라보는 방법을 제시했다. 정신분석학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두뇌의 프로세스라는 조건에서 문제의 틀을 만든다. 그러나 시험 가능한 이론들을 분명히 공식화하거나, 그것들을 테스트할 수 있는 장치는 없다. 이번 장의 내 목표는 신경과학과 신경학이 자아구보와 기능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롭고 독특한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행동 관찰을 통해, 외부로부터뿐만 아니라 뇌의 내적 진행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말이다. p.451
자각은 인간답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단순한 인간 이상으로 원하게끔 만드는 특징이다. BBC 라이스 강의에서 내가 말한 것처럼 “과학은 인간을 짐승이라고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짐승이라는 육체 속에 갇힌 천사로 느낍니다. 짐승을 초월할 것이라고 갈망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호두 껍질 속에 갇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다. (중략)
그러나 자아를 이해하려는 진정한 원동력은 치료법의 발달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우리 깊은 곳에 자리잡은 강렬한 욕구에서 나온다. 즉 자신을 이해하겠다는 열망 말이다. 자각이 진화를 통해 나오고 한 유기체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살기 힘든 공간과 측정할 수 없는 끝없는 시간을 가로질러 한 인간이 갑자기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 우주의 먼지로 만들어진 여러분은 지금 절벽 끝에 서 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인간의 기원과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마 바로 그 자리에 5만 년 전 또 다른 한 인간이 서서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초자연주의 경향이 강한 물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에르빈 슈뢰딩거가 이렇게 물었다.
“그는 진정 다른 사람이었는가?”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형이상학의 세계를 방황하지만 인간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중략)
과학자로서 나는 다윈, 굴드, 핀커, 그리고 도킨스 등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나는 지적설계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다. 노동에 시달리는 여인을 본 사람이라면, 백혈병 병동에서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세상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치스럽지만 인간으로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뇌와, 신이 창조한 우주를 아무리 깊이 이해한다 해도 궁극적인 기원에 관한 질문은 항상 우리와 함께 머문다는 것이다. p.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