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의 씨앗을 퍼트려 萬物을 움트게 하라(6)
善의 씨앗을 퍼트려 萬物을 움트게 하는 것은 인류 공동의 業이다(6)
선의 씨앗을 퍼트린다는 것은, 마치 민들레 홀씨가 바람을 타고 사방 천지로 날아가듯이, 조류의 먹이를 통해 수천 리 수만 리로 옮겨지고, 동물·사람 등 여타의 방법 등을 통하여 사람들 사이를 순환하며 온 세상으로 번져나가 善의 기운으로 흐르게 됨을 뜻한다. 萬物(만물)을 움트게 하라는 것은, 비록 善의 흐름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치 물방울이 모여 냇물을 이루고, 큰 강물을 이루며, 결국 바다에 이르러 하나가 되듯이 조금씩 조금씩 善의 숲을 이루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路程(노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역에서 이르길,“積善之家 必有餘慶(적선지가 필유여경), 積不善之家 必有餘殃(적불선지가 필유여앙)”즉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즉 선과 악의 결과는 그 자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니, 이 세상 나와 우리 가족만 잘살고 죽으면 끝나는 세상이 아니다. 다만 善한 일을 하거나 惡한 일을 했다고 해서 금방 그 결과가 나에게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인연이 도래하면 자신에게 반드시 과보가 미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마치 맛있는 사과가 먹고 싶다고 하여 사과나무를 심었는데 금방 사과가 열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거름도 주고, 비·바람·눈보라 등 혹한의 추위에 대비하고 병충해에 대비하는 등 정성을 들여 수년 동안 잘 관리해야 사과가 열리는 이치와 같다. 하물며 惡의 인연을 맺은 경우에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 결과가 금방 나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부로 輕擧妄動(경거망동)해서는 더 큰 재앙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마치 봄 동산에 잡초가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앉지만, 무럭무럭 자라듯이, 죄업을 짓는 행위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점점 늘어나 큰 재앙이 따르게 될 것이다. 시절 인연이 도래하면 반드시 그 대가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인과법칙이다.
善의 씨앗을 퍼트려 萬物을 움트게 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인류 공동의 業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동물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동물이 인간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사유하고 현실의 문제를 헤쳐나가기 위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토론하고, 연구하며 고민하고, 상상한다. 더 나아가 미래를 설계하며, 잘못을 반성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공동의 業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왜 善의 씨앗을 퍼뜨려야 하는가?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니, 마음속에 선한 생각을 품으면 그 사람의 행동도 착한 마음을 내게 되어 그 행동이 善해 지리라. 반대로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니, 마음속에 惡한 생각을 품으면 그 사람의 행동도 惡한 마음을 내게 되어 그 행동이 惡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선한 마음을 내면, 선한 마음의 전파를 타고 자신을 포함하여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즐겁고 편안해지게 마련이다. 반대로 악한 마음을 내면, 악한 마음의 전파를 타고 자신을 포함하여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하게 되어 함께 하길 꺼린다. 결국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혼란스럽게 되고, 신뢰가 무너져 험한 세상이 된다. 반면에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은수록 사회는 선의 기운이 움트고, 사람들 사이를 순환하며 번져나가 행복한 사회, 살기 좋은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因果應報(인과응보)가 내 뒤를 따르는 것은 마치 내 몸을 따르는 그림자와 같다고 했다. 보시할 때는 모든 생명은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내어 미생물에서 식물·곤충·동물·사람에 이르기까지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를 가리지 않고 베풀어야 한다.
옛날에 송나라 소동파(蘇東坡)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쥐를 생각해서 늘 밥을 조금씩 남겨 두고, 나방을 가엾이 여겨 등불을 밝히지 않는다 [愛鼠常留飯(애 서 상류반), 憐蛾不點燈(린아불점등)].살아있는 생명의 존엄성을 표현한 내용이다. 이 정도의 생명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아야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작은 미물일지라도 생명의 존귀함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만물을 사랑하는 핵심은 생명 있는 것을 함부로 헤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보시는 남을 시키지 말고, 자기 손으로 정성스럽게 직접 보시해야 그 공덕이 있게 된다.
다음은 보시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옛날에 어떤 여인이 절에 들어가서 보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이 워낙 가난한 살림살이다 보니, 보시할 재물은 없었고 단지 두 냥밖에 없었다. 여인은 할 수없이 가진 것을 모두 털어 보시하였다. 그러자 주지 스님은 친히 그녀를 위해 정성껏 참회 기도를 해 주었다. 나중에 이 여인이 황궁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이 여인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지라 수천 냥의 은을 마차에 싣고 그 절에 가서 시주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지 스님이 문하 제자를 시켜서 불공(회향기도) 좀 드려주라고 분부하는 데 그쳤다. 그 여인은 두 차례에 걸쳐 시주하였으나 왜 처음과 대접이 다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의심이 크게 들어 주지 스님에게 여쭈었다.
여인: 제가 옛날에 엽전 두 냥밖에 시주하지 못하였을 때는 스님께서 직접 저를 위해 참회 기도를 올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수천 냥의 은자를 시주하였는데 오히려 주지 스님께서 저를 대신해 회향 기도를 올려주시지 않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주지 스님: 예전에는 비록 보시한 재물이 아주 적었지만, 보시하는 마음은 몹시 진실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노승이 친히 참회 기도를 해 주지 않는다면, 그 진심의 공덕에 보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재물은 몹시 많지만, 보시하는 마음은 옛날처럼 그렇게 간절하지 못하니, 남을 대신 시켜 참회 기도를 올려도 충분합니다. 라고 했다.
이런 상황을 일러, 천 냥으로 베푼 공덕은 절반 짜리 선행이고, 두 냥으로 베푼 공덕은 꽉 찬 선행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실하고 간절한 보시가 되어야 공덕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위대한 성인이신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 등의 삶을 들여다보자, 세상을 살면서 개인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한 삶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고 만인을 위한, 즉 인류를 위한 삶을 살아오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장 43-44). 예수님은 온 누리에 사랑을 천명하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탄생 이후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 세계 인구의 약 20여 억 명 정도가 예수를 신으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점은 위의 성경 구절을 통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까지, 사랑하고 기도하라는 것은 인류에 미워할 대상이 없고 무조건적인 사랑, 즉 아가페적인 사랑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복음 5장(39,42). 이런 성경 구절은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상대가 구하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고, 다 주라는 것은 나와 남을 차별하지 말고, 필요한 이를 위해 다 내어주라는 福音(복음: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즉 상대가 아픈 것은 내가 아픈 것이요, 상대가 기쁜 것은 내가 기쁜 것이 된다. 이 얼마나 위대한 말씀인가? 이런 구절을 접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감동을 받고, 무한한 신뢰를 보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어찌 온 누리에 존경을 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부처님의 경우를 보자,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오직 중생들의 일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데, 모든 것을 다 바쳤다. 6년 동안의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신 후, 평생을 거리에서 걸식하며 솔선수범으로 모범을 보이신 분이시다. 때로는 200km 정도가 되는 갠지스강을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먼 거리를 꼬박 7일을 맨발로 걸어서 걸식하며 바라나시(당시의 수도)까지 가셨다. 그 이유는 다섯 수행자를 찾아 법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인도 사회는 인간의 신분이나 인격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수드라나 불가촉천민은 인간 이하의 억압과 고통 속에서 비인간화되어 갔고,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같은 귀족계급들은 다른 계급을 인간 이하로 억압하고 구속함으로써 자신들도 인간의 심성을 잃고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었다. 한 브라만이 인간의 신분이나 인격은 태어나는 카스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하자, 부처님은 그에게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인간은 태어나는 것에 따라 성인이 되고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브라만이나 수드라라고 해서 자식들이 성인이나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오직 그 행위에 의해서만 그의 성품이 결정된다. 아무리 훌륭한 브라만 혈통의 자식이더라도 부정한 생각과 삿된 행동을 한다면 그는 천민이 되는 것이요, 아무리 수드라의 자식으로 태어났더라도 세상을 올바로 보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성인이 되는 것이다.”부처님은 이처럼 모든 계급적 차별을 부정하셨다.
그리고 인간의 절대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카스트제도에 대해 인간의 귀천은 오직 그 행위에 의해서만 결정됨을 인과론으로 설파함으로써 오랜 인도 전통의 카스트를 부정하시고 인도의 사회구조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런 일은 부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으며 공양을 올리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처님 입멸 후 2,600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가르침의 성행은 여전하다. 그가 행한 善의 因果는 무수한 세월이 흐른다 해도, 결코 쇠퇴함이 없이 경계가 없는 인류를 향해 지속적으로 뻗어나갈 것이다.
위대한 교육자이자 사상가인 공자님의 경우를 보자, 그는 주역(周易)을 즐겨 읽어 가죽끈이 세 번 끊어졌다는 韋編三絕(위편삼절)이라는 고사성어에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후손은 지끔까지 70여 세대에 걸쳐 중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을 막론하고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가 행한 福은 매우 커서 역대 제왕들도 견줄 수가 없었다. 그의 제자는 모두 3,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敎人不倦(교인불권)을 실천으로 옮겼다.
공자의 외할아버지인 안씨(顔氏)가 자기 딸을 공자의 부친에게 아내로 주려고 할 때, 그 집안의 조상들이 쌓은 음덕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그 조상 대대로 쌓아온 음덕이 오래되고 매우 큰 것을 보고, 그 자손들이 흥성할 줄을 미리 알고 공자 아버지에게 딸을 보냈다. 과연 시간이 흘러 만세의 사표인 공자를 낳았다. 음덕을 쌓아야 자손들이 흥성한다는 말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고,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공자 사후 2,500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선의 씨앗을 퍼트리라는 것은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부처님·공자님 등 성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수천 년이 흘렀음에도 국적과 인종·종교를 초월하여 전 세계인들의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이분들의 행한 공통점은 善의 씨앗을 퍼트려 萬物(만물)을 움트게 함으로써, 善의 숲을 이루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즉 善의 循環(선의 순환)을 이루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수천 년이 지났음에도 전 세계인들은 이분들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마음이 치유되고, 善을 향한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나침반의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평범한 일반인이라고 하더라고 이런 사례들을 깊이 새기고 성인들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밝아지고 마음이 선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말 없는 가운데 善을 행하는 분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수년 전에 한 방송에서 방영되기도 한 내용이다. 매년 자선냄비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수억 원씩 기부하는 사람, 혹은 패지를 모은 돈, 수백만 원·수 천만 원을 기부하는 어르신 등 선행을 하는 분들을 보면 깊은 감동을 받는다. 우리는 남을 도우면서도 돕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무심히 이런 행동을 할 때 福이 깃들게 됨을 알아야 한다. 이 얼마나 위대한 행위인가?
인간은 행위(karma)로 말미암아 선한 사람도 되고, 악한 사람도 되며, 성현도 되는 것이다. 불교 업설은 인과응보의 교설로서‘善因善果 惡因惡果(선인선과 악인악과)’또는‘善因樂果 惡因苦果(선인락과 악인고과)’의 인과법칙을 설파하고 있다. 즉 善한 업을 지으면 즐거움의 과보를 받고, 惡한 업을 지으면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우리 속담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나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으로 善의 씨앗을 퍼트리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도 함께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善의 기운이 온 인류에 퍼져나가 善의 순환을 이루어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善의 씨앗을 퍼뜨려 萬物을 움트게 하는 것은 인류 공동의 業이라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