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의 씨앗을 퍼트려 萬物(만물)을 움트게 하라 (5)
인과응보 이야기(사례 3, 4)
일타스님에 대해서는 친가·외가 합하여 41명이 출가한 집안의 스님이며, 부처님 다음으로 집안 출가자가 많이 배출한 경우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일임을 소개해 드린 바 있다. 다음에 소개되는 인과응보 이야기는 일타 스님께서 직접 밝히신 내용 중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위암이 치료되고, 질녀의 딸로 다시 태어난 무량심 보살(3)
대구에 살았던 무량심(無量心) 보살은 일찍이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외동딸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딸이 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하여 미용사가 되었을 무렵, 그녀는 위암에 걸렸습니다. 그것도 병원에 찾았을 때는 위암 3기에 접어들어 2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개월의 시한부 생명………, 무량심 보살은 그날부터 내가 있는 지족암으로 와서 부처님께 기도하고 참선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일인 양 너무나 천연스럽게 받아들였고, 한 생각을 쉰 사람처럼 담담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 전에 앉아 깜빡 졸았는데,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법당 안으로 들어오더니 바닥에 누우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자 순간적으로 자신의 배를 가르고 위장에 붙은 혹들을 도려냈습니다. 그러고는 배 위에 손을 얹자 갈라진 배가 원래처럼 붙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수술 시간은 불과 10초도 걸리지 않은 듯했습니다.
무량심 보살은 너무나 상쾌함을 느끼며 깨어났고, 그 뒤 10여 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살다가 죽었습니다. 내친김에 조금 더 무량심 보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녀는 살아생전 나를 찾아오면 늘 “내생에는 스님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죽고 얼마나 지나지 않아 언니의 딸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질녀가 차를 타고 대구 시내의 명덕 로터리를 지나는데, 이모인 무량심 보살이 깨끗한 옷을 입고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질녀 : “이모님, 왜 여기에 계십니까?”
이모님(무량심 보살):“글쎄 말이다. 어디로 가기는 가야겠는데 탈 차가 마땅치 않구나.”
질 녀 : “어서 제 차를 타세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이모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꾼 직후 그녀는 임신하였고 딸을 낳았습니다. 그 딸은 이모인 무량심 보살과 너무나 닮아 있었습니다. 사실 무량심 보살이 꿈속에서‘탈 차가 마땅치 않다’고 한 그 차는 딸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딸 선도행은 자궁에 이상이 있어 아기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곧 무량심 보살은 외동딸 선도행의 아기로 태어나고 싶었지만, 딸의 신체적 이상 때문에 그 차를 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때문인지 새로 태어난 아기는 이모인 선도행만 가면 막 울다가도 기어가서 안기며 좋아했고, 달려들어 갖은 재롱을 피우곤 하였습니다. 현재 그 아기는 세 살 정도 되었고, 지금도 선도행을 부모보다도 더 따른다고 합니다.
무량심 보살의 이야기는 기도의 영험과 윤회의 실체를 우리에게 함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만일 그 아기가 자라 출가한다면 무량심 보살이 스스로 부처님 앞에서 세운 원(願)과 같이 한평생 도를 잘 닦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죽은 부관이 아들로 태어난 사례(4)
1971년 여름, 인도 불교대학의 초청을 받은 나는 영어 회화를 익히고자 잠시 대구의 ECA 학원에 다녔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다닌 것이었건만, 학원 수강생 중 나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대구에 온 김에 법문 해달라며 여기저기서 계속 졸라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연한 계기로 2군 사령부 장교들 모임에 가서 저녁마다 한 시간씩 일주일 동안 법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법문을 듣는 사람 중 2군 사령관의 불심은 특히 깊었습니다. 그는 2군 사령부 안에 무열사(武烈寺)라는 T자형 군 법당을 짓고 종각도 세우고 탱화도 봉안하는 등 많은 불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법회를 마치는 날 사령관의 집안에는 매우 불행한 사건이 불어닥쳤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사령관의 외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감포 앞바다로 해수욕을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이 사고로 2군 사령부 전체는 초상집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사령관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방 안에만 들어앉아 있었으며, 거의 실신 상태에 빠진 부인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층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이윽고 팔공산 동화사에서 아들의 49재(齋)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른 볼일로 참석할 수 없었으므로 뒤늦게 그날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스님들의 독경과 염불을 들으며 아들의 명복을 빌던 사령관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위패를 모신 영단(靈壇)을 향해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이 놈의 새끼! 모가지를 비틀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 이놈.......!”
감히 보통 사람으로는 입에도 담지 못할 욕설을 있는 대로 퍼붓고는 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법당을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독경하던 스님과 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돌발적인 소동에 어리둥절해할 뿐이었습니다. 그날 밤 1시경, 2군 사령부 헌병 대장이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낮에 있었던 소동도 소동이지만 통행금지 시간이 넘은 야밤중에 헌병 대장을 시켜 나를 데려오라고 한 데에는 필시 까닭이 있으리라 짐작하며 사랑관 공관으로 갔습니다. 가는 도중, 헌병 대장은 사령관의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소상히 일러주었습니다.
“이번에 죽은 아들은 저희 사령관님의 금쪽같은 외동아들입니다. 친구들과 감포 해수욕장에 갔다가, 사람들이 많은 해수욕장을 피하여 주위의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바위에서 다이빙하였는데, 친구 둘은 금방 물 위로 나왔으나 사령관의 아들만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황급히 수색해 보니, 그 아들은 뾰족한 바윗돌에 명치를 찔려 숨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토록 말 잘 듣고 착하던 외아들이 그렇게 죽었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습니까.”
잠시 후 나는 사령관이 기거하는 내실로 안내되었습니다. 방안에 촛불을 밝혀 놓고 따로 자리 하나를 마련하여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령관은 내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제가 지금까지 불교를 믿기는 믿었어도 헛껍데기만을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부터는 불교를 진짜로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하는 나에게 자리를 권한 사령관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 한 편을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습니다.
”6.25 사변 당시 저는 30여단장을 역임하고 있었습니다. 늘 자신감에 넘쳐흘렀던 나는 백두산 꼭대기에 제일 먼저 태극기를 꽂기 위해 선두에 서서 부대원들을 지휘하며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문(電文)이 날라왔습니다.‘지휘관 회의가 있으니 급히 경무대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황급히 경무대를 향해 출발하면서, 평소 아끼든 신임하든 부관에게 거듭거듭 당부하였습니다.‘지금 들리는바 소문에 의하면 중공군 수십만 명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한시도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시간 내에 돌아오지 못하면 부관이 나 대신 백두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아라.’그런데 ‘가는 날이 바로 장날’이라더니, 그날 저녁 중공군 30만 명이 몰려와서 산을 둘러싸고 숨 쉴 틈 없이 박격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우리 부대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몰살당하였습니다. 뒤늦게 급보를 받고 달려가 보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저는 급히 부관을 찾았습니다.
‘부관은 어디에 있는가?’
얼마 동안 찾다가 ‘어찌 그 와중에 부관인들 무사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에 한 가닥 희망조차 포기한 채 허탈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당연히 죽었을 것으로 여겼던 부관이 쫓아 들어왔습니다.
여단장 :‘살아 있었구나. 어떻게 너는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
부 관 :‘죄송합니다. 실은 이웃 온천에 있었습니다.
사령관 : ’온천? 누구와?
부 관 : ‘기생들과 함께…….’
사령관 : ‘너 같은 놈은 군사재판에 회부할 깜도 되지 못한다. 내 손에 죽어라.’
어찌나 부아가 치미는지 그 자리에서 권총 세 발을 쏘았고, 부관은 피를 쏟으며 나의 책상 앞에 꼬꾸라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21년 전의 일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 낮 아들의 위패를 놓은 시식장(施食床) 앞에 그 부관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였으므로 엉겁결에 일어나 고함을 치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로 그날 죽은 부관이 이번에 죽은 아들로 태어난 것이 틀림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부관이 죽은 날과 아들이 태어나 날짜를 따져보아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 야밤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을 모셔 오게 한 것입니다. “
당시의 2군 사령관이었던 육군 중장 박은용 장군은 이렇게 이야기를 매듭지었습니다. 부관은 자기의 가슴에 구멍을 내어 죽인 상관의 가장 사랑하는 외동아들로 태어났고, 가슴을 다쳐 죽음으로서 아버지의 가슴에 구멍을 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동감이 있는 인과응보는 참으로 섬뜩하기까지 하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은 죄업에 대해 과보를 당연히 받는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아예 인과응보에 대해 잊어버리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떤 큰 재앙이 발생하면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업에 대한 인과라 생각하는 사람은 그나마 인과에 대해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남을 탓하고 재수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자들은 인과를 믿지 않아 반성함이 없는 자들이다. 죄업이라는 것은 사람을 살생하거나 물건을 훔치는 등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죄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신(身)∙구(口)∙의(意) 삼업, 즉 행동을 함부로 하여 몸으로 죄업을 짓고, 말을 함부로 하여 입으로 죄업을 짓고, 올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죄업을 짓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되며, 이 중에서 구업, 즉 입으로 죄업을 짓는 것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거짓으로 꾸며대는 말,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골탕 먹이는 행위, 이간질을 함으로써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 등 대부분의 죄업이 입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면,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인과응보를 무서워해야 깊이 받아들일 수 있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되며, 반성하는 마음을 지니게 됨으로써 몸과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에서 이와 같은 이적을 보이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이런 내용을 접하고, 자신이 살아온 대로 제멋대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항상 조심하고 반성하는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하늘이 내리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