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하는 주된 노동은 영화과 입시 학원에서 논술 수업을 하는 것이다. 논술 수업이라고 하면 무척 차분한 분위기에서 지적인 토론을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요약하면 지킬박사와 이수연 씨.
와 우리 은형이, 과제에 지난주 코멘트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구나. 아주 자신 있게 논리가 안 맞으면서 잊을만하면 비문이 등장하네? 지킬 박사님은 불안도가 높은 바, 문을 걸어 잠그고 말로 팬다. 정신을 차리고 학생들을 보면, 그들의 얼굴은 너무나 무해하고 무방비해서 애틋하기까지 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렇게 예쁜 아이들한테. 아냐, 그러다가 얘들이 합격 못 하면 어쩌냐고. 이 두 가지 간극에서 나는 언제나 혼란스럽다.
수업이 끝나고 밤의 골목으로 사라지는 학생들을 보면 급작스럽게 피로함이 몰려온다. 이때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귀여움이다. 귀여운 것을 보며 힐링한다는 것이 진부하다는 걸 알지만, 속절없이 빠져든다.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멍하니 동물이나 아이들의 영상을 본다. 천국의 단면을 훔쳐보는 마음으로. 그중에서도 특히, 요즘 빠져 있는 귀여움은 바로바로.
해달이다. 꺄!
입문영상은 이러했다. 어미 해달이 새끼 해달을 배 위에다 얹고 물 위를 둥둥 떠 다닌다. 새끼가 이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이리 봤다 저리 봤다 한다. 지도 귀여우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곳을 그리라고 하면, 그곳 어딘가에는 반드시 해달이 있을 것 같다. 시간이 나서 나무 위키에 해달을 검색해 보았다.
해달은 전 세계적으로 십만 팔천 마리 정도가 있고,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종이다. 핵심종이란, 얘들이 없으면 생태계가 심각한 타격을 입기 때문에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건데, 무거운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얼굴은 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만화 ‘보노보노’의 주인공이 해달이다. 만화 속 귀여운 외모는 같지만, 느린 말투와 맹한 행동은 현실과 조금 다르다. 해달은 족제비과인 만큼 행동이 재빠르고 재치가 있다. 주 식량인 조개를 깨 먹기 위해 돌 같은 도구를 사용하며, 자신에게 맞는 도구를 발견하면 앞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며 다닌다. 얼마 전 동물원에서 관람객이 핸드폰을 해달 우리에 떨어뜨렸는데, 핸드폰을 조개로 착각한 해달이 돌로 열심히 깨 부수는 영상이 화제가 됐었다. 얼마나 속 상하고 황당했을까. 기껏 깼는데, 먹지도 못하고. 참으로 민폐가 아닐 수 없다.
해달은 또한 바다가 주 서식지인 것에 비해 지방층이 유난히 얇아 추위에 약하다. 그 대신 엄청나게 조밀하고 방수가 되는 털이 있다. 질이 좋은 모피를 가지고 있고, 인간에게 우호적이라 포획하기가 쉬워서 멸종될 뻔했다. 인간은 왜 땅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동물의 모피까지 필요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해달이 생태계의 핵심종이라는 것을 깨닫곤 포획을 멈췄다고 한다. 페이지를 읽을수록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해달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해달의 수컷은 다른 종의 새끼를 죽을 때까지 강간하는 경우가 있다. 일부다처제인지라 암컷과 교미하지 못한 수컷들이 생겨나고 그들은 교미하지 못한 스트레스를 이런 식으로 해소한다. 심지어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새끼(특히 잔점박이 물범)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고 강간을 하는데, 보통 한 시간 이상 자행되고 심지어는 그 과정에서 물범이 죽어도 그 시체에다 계속 시간을 한다고 한다. 범행이 끝나면, 태연히 그루밍. 잠깐만, 이거 해달 페이지가 맞나? 맞네. 해달이네. 그대로 핸드폰을 껐다. 누군가의 심연을 들여다본 듯 얼얼했다.
그러다 문득 해달의 입장이 되어본다.
나는 내가 귀엽고 무해하기만 한 동물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누구 맘대로 나를 보면서 힐링해? 나는 조개를 깰 때도, 아이폰을 깰 때도 진지해. 체중의 4분의 1 무게만큼은 먹어야 하루를 생존할 수 있거든. 물 위에서 우리가 서로의 손을 잡거나, 미역을 잡고 잠을 자는 것도 그래. 자다가 깼는데 바다 중앙이면 큰일 나니까 그러는 거지 누구에게 귀여우라고 그러는 게 아니란 말씀. 니가 지금 하는 행동은 니들 언어로 ‘대상화’야!
해달에게 큰 실례를 범했다. 무릎을 꿇고 이 글을 쓴다. 뻥이다. 요즘 무릎이 좋지 않다. 몸이 좋지 않으면 덩달아 정신도 게을러지나 보다. 나는 왜 달의 이면을, 해달의 심연을 생각하지 못했는가. 왜 이 세상에 내 맘에 쏙 드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런 불가능한 것에서 힐링을 찾으려 했을까.
반성한다.
어떤 누구에게도 내가 원하는 모습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러니까 나 혼자만의 생각에서도 말이다. 저 사람은 참 좋은 사람 같다. 저 사람 참 귀엽다. 이런 생각 대신 저 사람은 사람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얼핏 멀쩡해 보여도, 말도 안 되는 한심한 생각을 하고, 얼핏 착한가 하면 치졸하고 , 치졸한가 하면 다정하고, 다정한가 하면 어쩌고. 뭐 이런 식의 허점과 심연으로 둘러싸인 사람일 뿐이다라고 생각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이건 우리 반 학생들에게도 적용된다.
이렇게 좋은 애가 이렇게 무서운 무논리의 글을 썼을 리가 없는데.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겠다.
망신창이라고? 설걷이라고? 어의가 없다고? (국어 2등급이라며… 야.) 이런 혼란도 그만 멈춰야겠다.
그저 해달도, 학생들도, 내 친구도, 심지어 나 자신도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겠다.
(그리고 뭔가 이다음 문장에는 교훈적인, 진취적인 행동사항을 적어야 할 것 같지만, 오늘은 제가 여기까지만 깨달았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언니 어떻게 김치찌게라고 쓸 수가 있어?’라며 나를 바보라고 단정했던 신모양은 공개 사과하라.
해달에게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