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loudie Jun 25. 2019

삿포로에서의 기억

사나에게

오랜만에 친구와 해외여행을 계획해 다녀오게 되었다. 오래 연차를 써 출근을 하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뭔가 업무적으로 큰일이 발생할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물론 매번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가지만) 취직 이후에는 줄곧 가까운 곳으로 짧은 휴가만 다녀온 탓에 이번에도 여행지는 일본, 삿포로였다.  일본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내가 최다 방문한 여행지이기도 하며 더군다나 삿포로는 작년에 엄마와 함께 다녀온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행은 여행 장소보다는 함께 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번에는 대학교 때 친했던 친구와 라벤더를 보러 삿포로에 가기로 의기투합하였다.

무계획, 게으름, 그저 되는 대로 그때그때 일정에 맞춰 움직이는 나와는 달리 내 친구는 매우 빨리 모든 걸 세팅해 놓는 편이었다. 역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대학시절 내내 붙어 다녔던 친구임에도 여행 준비를 같이 하다 보니 또 새롭다.




친구 덕분에 가장 중요한 항공표 및 숙소 예약 등의 여행 준비를 한 달 하고도 며칠쯤 더 전에 마치게 되었다. 이제 여행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설렐 일만 남았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어느 평화로평일 낮, 나는 악몽 같은 문자 한 통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한 달 후 묵고자 예약했던 숙소의 해외 결제 승인 문자. 처음 몇 초간은 '음.. 이게 뭐지? 숙소 결제가 현장에서가 아니라 예약 후 며칠 후에 이루어지는 거였나.'라는 생각을 하며 애써 현실을 부정하는데 썼다.

그래도 떨칠 수 없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이상한 예감에 부랴부랴 아고다 앱에 로그인을 했다. 그곳에서는 내가 예약했던 숙소 마호로바에서 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왜 아직도 숙소에 도착하지 않았니. 예약했던 저녁 식사 시간은 잠시 후 마감이고 미안하지만 혹시 마감시간 이후에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환불은 어렵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답장 기다릴 테니 연락을 달라.'


내용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평소 나는 불필요한 어플의 알림을 모조리 꺼두는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메시지 알림이 오지 않은 것은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마호로바 호텔에서는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체크아웃 시간까지도 감감무소식인 나를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수수료 100%로 취소처리가 된 것이 문제의 문자메시지의 결제내역임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마치 5년 같은 5분이 소요되었다. 내가 한 바보짓을 다시 되짚어 보자면 나는 2019년 6월 22일에 마호로바 호텔에 묵을 예정이었지만 5월 22일로 예약을 해버린 채 해맑게 친구에게 나 쿠폰을 써서 할인도 받았다며 똑똑한 소비자 인척 갖은 생색을 내며 행복한 삿포로 여행을 꿈꾼 것이다.

이걸 어쩌지. 소중한 내 돈 35만 원.. 내가 싼 똥이니 친구와 반반을 내자고 할 수는 없었다. 내 똥은 내가 치워야지. 그래. 머릿속에서는 현금 35만 원을 갈기갈기 찢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사기로 했던 디카 계획은 한 달쯤 미뤄볼까 생각을 하며.

35만 원이란 무엇일까. 3,500원짜리 구내식당 밥을 100번 먹을 값이며 삿포로 왕복 비행기 표를 한번 더 사서 돌아올 때 내 가방에 로이스 초콜릿을 10만 원어치 쟁이 고도 남을 값이며 인터넷 쇼핑을 할 때 배송비 2,500원 아끼고자 꾸역꾸역 몇 개 더 나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생각하며 담았던 내 시간과 노력들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릴 돈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호로바 호텔도 날 저렇게 애타게 찾아줬는데 그냥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나는 호텔 마호로바로 장문의 메일을 썼다.


'안녕. 나야.. 너의 메시지를 이제야 확인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어. 사실 나는 한 달 후에 갈 예정이었는데 바보처럼 어제로 예약을 했더구나. 나는 친구와 삿포로의 라벤더 축제를 즐길 생각에 부풀어 있었는데. 나도 알아 이 모든 게 내 잘못인걸.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을까?'라는 식의 기구한 사연을 적어 보냈다.

또다시 10년 같은 10분이 지나갔고 시차도 없는 일본에서 한창 근무할 시간에 답장이 오지 않는 것이 답답해 과감하게 국제전화를 감행하게 되었다. 35만 원 보다는 국제전화비 3만 5천 원이 나을 거라는 계산과 함께.

두근두근. 딸깍.

드디어 저 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일본어로 전화를 받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He.. hello...?"


너 영어 할 수 있니 라는 말을 나는 hello로 대신했다. 다행히 상대편은 찰떡같이 나의 의도를 알아듣고는 영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메일을 쓰며 연습이 된 걸까 나는 나의 상황을 술술 읊었고 사나(전화응대직원)가 중간중간 '확인해 볼 테니 잠시만 기다려줄래?'를 외칠 때마다 나는 국제전화비도 잊은 채 사나가 충분히 확인하길 응원하며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게 몇 번의 기다림이 있은 후 사나는 다시 메일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한 시간 후 도착한 메일에는 만약 한 달 후 우리 호텔에 묵는 것이 확실하다면 수수료 취소 후 예약을 변경해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나 만세! 나는 사나에게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발하고 예약을 위한 몇 번의 메일을 더 주고받은 후 무사히 카드 결제 취소 및 예약 변경을 하여 내 35만 원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한 달 후 나는 친구와 삿포로행 비행기에 올라탔고 그 안에서 사나에게 줄 선물과 편지를 준비했다. 배은망덕하게도 한 달 사이에 고마웠던 마음이 무뎌져 버렸는지 쓸 말을 찾느라 고생했지만 어쨌든 귀여운 엽서와 사나에게 줄 핸드크림을 가지고 대망의 호텔 마호로바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사나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웬 남자 직원만이 체크인을 위해 우릴 맞아줄 뿐이었다. 체크인을 마치자마자 사나를 찾고 있다고 말하니 남자 직원은 일본인 특유의 최대한 안타까운 리액션을 취하며 사나는 이곳이 아닌 본사에서 일하는 직원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끝끝내 사나를 만나지 못하고 선물이 전달되기를 바란채 마호로바 호텔에서의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일정으로 인해 마호로바 호텔을 떠나 다른 곳에서 관광을 하던 중 사나로부터 반가운 메일이 도착했다.


사나로 부터 온 메일



'귀여운 편지와 그림 고마워. 그리고 멋진 선물도! 향이 너무 좋아서 매일 쓰고 있어.'

뜻밖의 사나에게서의 소식은 우리에게 또 한 번 큰 기쁨을 주었다. 실제로 선물이 전달되었다는 것도 그러거니와  기대치 못한 답장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신이 났다. 편지를 읽으며  사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이번 여행 중 잊지 못할 추억을 하나 더 만들게 된 것 같았다.


덕분에 4일간의 알찬 삿포로 여행을 마치고, 그토록 고대하던 라벤더도 눈에 가득 담고, 내 최애 음식인 1일 1 편의점표 유부초밥을 달성하며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다.



언제나 그렇듯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은 아쉽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때때로 새로운 나도 찾으며 시간을 보낸 뒤에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 기억으로 삶을 살아간다. 사나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 일을 할 때도 문득문득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만날 확률은 매우 낮을 테지만 혹시 다시 만날 순간들을 기약하며 친구와 '언젠가 이 여행을 추억하며 겨울의 삿포로를 여행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라고 얘기하며 이번 여행을 마쳐본다.


작가의 이전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지하철 타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