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안 보내서 미안해.
미안합니다, 젊은 그대
엊그제 중간고사를 본 것 같은데 벌써 기말고사가 돌아왔다. 6월 첫 등교를 한 이후 격주 등교를 하여 1주 정도 등교하고 중간고사를, 그 후 3주 정도 등교하고 기말고사를 치르고 있다. 시험을 잘 보고 싶은지 아이는 줄곧 책상에 앉아있다.
문제는,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학원을 다니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새벽 두 시에 잠에서 깨어 나와 보니 공부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가 불을 켜 두었나, 하고 들어가 보니 큰아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여섯 시 반쯤 아침으로 누룽지와 김과 계란 프라이를 먹던 아이가 잠깐 자겠다고 했다.
“지금? 잔다고? 학교는?”
“어제 밤샜어.”
“뭐?!!! 어휴, 힘들어서 어떡해!”
“삼십 분만 잘 거니까 일곱 시 오분에 깨워줘.”
문제는, 수행평가 준비도 알아서 하고, 온라인 클래스도 성실하게 듣고, 공부도 저렇게 하니 되었어,라고 생각했던 나의 시대착오적 착각이었다.
고등학생인 큰아이와 중학생인 작은 아이 모두 교과목 사교육을 하지 않고 있다. 모든 사교육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내가 가르칠 수 없는 분야, 아이 혼자 하기보단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예체능 분야는 사교육을 시켰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예체능 관련해서는 두루두루 경험하게 해 주어서 지인으로부터 뜻밖에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삼 학년쯤 되자 반 아이들 중 수학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생겼다. 이미 영어 유치원은 기본 코스로 여겨지고 있었기에 영어 학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는 찾기 어려웠다.
초등학교 삼 학년인데 왜 수학학원을 다녀?
당시 그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으니 큰아이를 수학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두 살 터울의 작은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그새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일학년인데도 하교 후 수학학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가 없는 지경이었다. 이제 초등학교 아이들도 하교 후 주 2회+주 3회 영어학원과 수학학원을 가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왜? 뭐 때문에 초등학교 아이들이 공부하느라 밤 열두 시, 한 시에 자야 하는 거지?
여전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 작은 아이 역시 수학학원을 보내지 않았다. 수학학원뿐 아니라 영어와 국어, 과학 등 다른 교과목에 대해서도 사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아이 친구들과 그룹 논술과 과학 수업을 일주일에 한 번 이 년 정도 했다.
학원을 보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공부는 할 사람이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공부할 사람’이란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아이작 뉴턴이나 인도 수학자 브라마 굽타 같이 알고자 하는 열망, 강력한 지적 호기심이 있어 내가 서있는 곳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궁금해서, 지구의 둘레가 궁금해서,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가 궁금해서 풀 방법을 고민하고 기어이 풀어보고, 나 같은 사람도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도록 간편하게 공식으로 만들어준 사람들 말이다.
우리 모두 공부가 ‘하고 싶은’ 특별한 사람이다. 다만 지적 호기심의 분야가 제각각 다르고 공부를 ‘하고 싶은 시기’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므로 때가 되면 기회의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또한 공부는 특정 시기에만 국한되는 업이 아니므로 고차원적인 기술 습득이나 철학적 사고를 향한 배움의 과정을 부단히 걸어야 한다.
그 외에도, 아이들이 원하지 않아서, 공부는 자기 의지로 해야 하는 거라서, 돈이 아까워서, 3-4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온 아이들이 매일 학원에 가서 밤 열 시까지 앉아 있는 것은 나도 못하는 거라서, 나야말로 공부를 열심히 했던 사람은 아니어서, 내가 하기 싫은 걸 남에게 강제할 수 없어서, 그리고... 공부 말고도 다양한 길이 있다고 믿어서, 등등 부모로서 다소 현실 감각 떨어지는 이유로 학원을 보내지 않았다.
“너 그러다 후회해.”
“너 그러다 진짜 큰일 나.”
우리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지 않는 것을 보고 지인들로부터 숱하게 들었던 걱정이고 그 걱정은 지독한 현실이 되었다. 수행평가를 하느라 밤늦게까지 씨름하고 시험 준비를 하느라 밤을 새우는 아이를 보니 그들의 진심 어린 충고를 일찌감치 들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인 큰아이의 시험지를 보니 이게 과연 학교 수업 충실히 듣고 집에서 꾸준히 복습을 하면 풀 수 있는 난이도인가, 하는 의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뾰족한 묘수란, 과연 학원에 보내는 것뿐인가, 라는 생각 역시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정도면 당장 학원을 보내야 하는데 뭔가 잘못되었다고,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실체가 잡히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만다. 이건 마치 ‘우리 때는 학원 같은 거 안 다녀도 대학 갈 놈은 다 갔어.’ ‘우리 때는 공부 할 애들만 공부했어.’라고 무턱대고 우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왜 이렇게 현실과 갭이 큰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일까. 어쩌자고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일까. 이쯤 되면 나야말로 사회 부적응자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힘들게 공부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현실 감각 없는 엄마로 인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이 지는 것 같아,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다.
아이 친구들을 보니 진도가 빠른 아이들은 초등학교 5-6학년이 되자 중학교 수학을 시작했다. 더 빠른 아이들은 고등학교 수학을 들어갔다. 영어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즈음이면 토플 영어를 비롯해 수능 영어까지 끝내버리는 아이들과의 격차는 고등학교 입학 후 치르는 첫 중간고사에서 확연히 판가름 났다.
따라잡기 힘들 만큼 커져버린 격차를 실감하며 당황해할 때 “중간 망쳤다고 절대 포기하지 말아라.”라는 담임 선생님의 조언이 사실이길 바랄 수밖에. 영어와 수학 진도를 부지런히 빼 고등학교 입학 전 고등 과정을 끝낸 아이들은 어떤 유형의 문제가 나와도 잘 풀었다. 아이가 육 학년일 때 아이 친구 엄마들과 모임을 가지면 선행학습이 늘 화두였다. 중학교 입학할 때 중학교 수학을 끝내고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 고등 수학을 끝낸다는 이야기가 그거 일부이기를 바라며 딴 세상일이라고 치부해버리곤 했다.
시험 첫날, 수학과 과학과 기가를 보고 온 큰아이에게 80년대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책과 영화가 있었다며 시간 없는 아이를 앉혀 놓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데 아이가 재밌어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영화 제목이었어?”
“너도 들어 봤어?”
“들어봤지. 옛날에도 그랬구나!”
“옛날에도 그랬어.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했다.”
“어떻게 됐어?”
“주인공이 결국 죽었어. 주인공이랑 주인공 엄마가 생각하는 행복이 달랐어.”
“너도 학원 다닐래?”
“음... 시험 봐 봤더니 안 다녀도 될 거 같은데. 혼자 해도 될 것 같아.”
얘는 또 왜 이러는 걸까. 얘도 나처럼 현실 파악을 못하는 걸까.
“2학기에는 지금보다 더 잘 볼 거야.”
아이가 성적 향상을 목표로 야무지게 다짐하는 걸 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한 마음에 다시 한 번 묻는다.
“학원 안 가도 괜찮겠어?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금방 고3이야.”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은데. 더 열심히 해야지.”
학교를 마치면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바로 학원으로 가서 아홉 시 열 시까지 공부하고 돌아와 학원 숙제를 마치고 새벽 1-2시에 자도 어쩌면 아이들은 그 안에서 일상의 기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이 시대의 아이들이니까. 우리는 언제고 시대에 적응하며 살았으니까.
“... 그래, 포기하지 마.”
“나 포기 안 할 거야.”
너무 힘든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 같아 미안한데 아이는 생각보다 강한 것 같다. 어떤 시대든 적응하며 살아낸 세상 모든 생명의 강인함이다.
여전히 모르겠다. 이제라도 이 광풍의 중심으로 뛰어 들어가 함께 도는 것이 나은지 광풍에서 한발치 벗어나 관조하는 편이 나은지.
학원을 보내지 않는 이유가 과거의 영광에 매여서인지, 현실 파악을 하지 못해서인지, 판도가 바뀌고 있는 미래를 느껴서인지 그 누가 알겠는가, 답은 여전히 미궁이다.
사교육은 선택의 문제이긴 하다. 시대의 생명으로 태어나 이왕이면 잘살고 싶어 최선을 다하는 행위에 대해 뭐라 할 사안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잘사는 방식이 이런 식이어서, 이런저런 연유로 나의 아이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우리 모두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