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합니다, 젊은 그대
내가 있던 병원은 금연상담을 위한 사무실이 따로 없고 안내데스크에서 금연상담을 했다. 안내데스크에 앉아 있는 것에 대한 장점을 굳이 찾아내자면 병원에서 가장 큰 사무실을 가진 기분이다. 또한 어림잡아 3미터는 되어 보이는 카운터 탑 전체를 책상으로 사용하며 로비 정중앙 안내데스크에 앉아있으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병원을 오가는 사람 모두를 관찰할 수 있었다.
유심히 보는 부분은 자세와 인상과 말투다. 자세에는 그 사람의 애티튜드가 베어 나오고 인상에는 성격이 드러난다. 말하는 투와 언어 습관으로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한다. 범죄자들이 타깃을 정할 때 자세와 걸음걸이 등이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있고 강아지들도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을 피하고 자세가 바른 사람을 선호한다고 하니, 어려운 시기이긴 하나 이왕이면 허리를 세우고 움츠린 어깨를 펴고 가슴을 열어 담대한 태도로 세상에 맞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어 가장 좋은 점은 용이한 접근성이다. 오며 가며 들르는 직원들은 가뭄의 단비 같이 반갑고 원무과를 찾는 용사들에게 금연 영업도 할 수 있다.
평균적으로 하루 열 명 정도의 용사들이 금연클리닉에 방문했다. 이벤트를 하지 않는 이상, 대대적으로 금연 홍보를 하지 않는 이상, 하루 평균 열 명 정도의 방문은 그럭저럭 한 수치라고 생각된다.
데스크에 와서 병원 안내를 받는 외래 환자와 그 가족들까지 세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안내 데스크를 거치는데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을 새까맣게 기억 못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봤던 사람을 도대체 왜 기억 못 하나,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기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중앙 현관문 안쪽에는 회색 생활복을 입은 용사들이 로비 의자에 앉아 티브이를 보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티브이 화면 속 연예인의 동선을 따라 똑같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거나 가끔 흐흐흐, 하고 한 목소리로 웃는다. 모두 똑같이 회색 생활복이나 군복을 입고 짧은 머리 스타일마저 비슷하다 보니 이 용사가 이 용사 같고 저 용사가 저 용사로 보였다.
내가 보니 딱히 금연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슬슬 좀이 쑤시기도 하고 말동무도 필요하고, 시간도 때울 요량으로 금연 클리닉을 방문하는 모양이다. 물론 그중에는 진심으로 금연을 원해서 방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물론 그중에는 흡연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금연 클리닉에 방문하는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한 번 만나고 이름과 얼굴을 동시에 기억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고 보통은 이 정도의 기억을 해낸다.
-금연클리닉에 방문했었다는 사실은 기억함. 허나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음.
-이름은 기억나는데 얼굴이 떠오르지 않음. 하얀 도화지 같은 얼굴에 이목구비는 내가 그려 넣어야 함.
-만났었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 함.
가장 미안한 상황은 몇 분간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두 번째 방문 시 이름은커녕 세상 처음 본 사람처럼 대했을 때이다. 미안해 죽을 것 같은 상황은 심지어 두 번째 만남인데도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하는 경우다. 다행히 어느 한 용사도 화를 낸 적이 없어 고마워 죽을 지경이다. 젊은 친구들 마음이 태평양 바다와 같이 넓다.
한 달에 백 명이 넘는 용사들 중, 한 번 보았을 뿐인데 이름은 물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기억에 남는 친구들이 있기도 하다.
특이한 성씨라던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우리나라 남성 이름 세 글자 중 한 글자는 가문의 돌림자를 쓰는 경우가 많다 보니 독특한 성씨나 이름은 대체로 기억에 남는다.
외모가 남다를 경우 이름은 기억 못 해도 금연클리닉에 방문했었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해 낸다. 외모가 미학적으로 준수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 모두 해당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라는 소설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처럼 못생긴 여자도 남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니 잘생긴 외모이건 아니건 그 자체로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매력을 더한다면.
시간이 지나도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는 친구들이 있다. 함께 웃고, 고민을 나누고, 도움을 주고받고, 함께 밥을 먹고, 실수하고, 함께하던 순간을 희로애락으로 채워주며 스토리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전역 후 면접관이든, 교수님이든, 바이어든, 투자자든, 호감 있는 이성이든 깊은 인상을 주어야 한다면 어떤 스토리를 만들지 고심해 보길 권한다. 기억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스토리이다.
흡연자가 아님에도 금연클리닉에 방문하는 친구들이 간혹 있다. 한참 등록 카드를 작성하고 상담을 하는 중 사실은 흡연을 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이미 금연 중이라고 하는 친구들이 있다. 금연 생각이 전혀 없는 친구들도 방문하곤 했다. 그런 친구들을 만나면 ‘아오, 진짜’ 라기보다는 뭐랄까, 덩치 큰 중학생 아들이 군복 입고 있는 것 같이 귀엽다. 대기 시간의 무료함과 긴장감에 오 분이라도 위로를 줄 수 있다면 만족한다.
희한하게도 깜찍한 거짓말을 한 친구들도 기억의 귀퉁이에 자리 잡는다. 스토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기억이 긍정적 기억일지 부정적 기억일지는 때와 상황과 상대에 따라 매우 예측불가이므로 요령껏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