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줍다 쓰러진 할머니를 만나다.
▣ 일어나 보니 작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뜨거운 비닐하우스 안에 갇혀 있는 것 마냥 숨 쉬는 것조차 버겁게 했던 무더운 더위를 서서히 물러나게 하는 9월의 비였다. 9월의 비는 급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았다. 더위야, 이만 물러가렴, 하고 잘 어르고 달래고 있었다. 더위에 지쳐 한껏 짜증을 내듯 퍼붓는 성난 비에 발이 흠뻑 젖거나 하루 종일 걸어도 바지에 빗물이 튈 것 같지 않은 수줍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커다란 우산을 챙겨 들고 개띠개와 7시 즈음 산책을 나갔다. 비가 오든 말든 나가야 하니까, 이것은 하루도 거를 수 없는 몹시도 중차대한 일정이므로.
▣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소운동장이라 불리는 작은 운동장 가를 걸었다.
운동장 옆으로는 넓은 화단이 주욱 이어져 있다. 더위가 한풀 꺾이자마자 동네 할머니들이 이른 아침마다 화단에 나타나 도토리를 줍기 시작했다. 9월 초입인데, 아침 바람이 꽤 선선해졌지만 아직 더운 것도 같은데 벌써 도토리가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계절의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먹거리를 획득하는 사람들이었다. 먹을 것이 넘친다는 시대, 너무 먹어서 탈이라는 시대에 도토리가 맺히는 계절이 되면 청설모와 라이벌이 되는 그녀들의 생존 본능. 이쯤 되면 청설모도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것인지 바닥의 도토리를 줍기 위해 높은 나무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있는 모습을 목격하곤 한다. 그럴 때 가장 신나는 생명은 청설모라면 환장하는 개띠개다.
우리 동네 화단에선 까맣고 커다란 청설모가 자주 목격된다. 개띠개는 여기저기에서 나는 청설모 향기에, 나는 공기 좋은 강원도 설악산 아래 사는 착각으로 기분 좋은 아침 산책.
▣ 저 멀리 화단에 할머니 한 분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할머니는 얇은 핑크색 셔츠를 입고 있고 마스크와 밝은 황토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할머니 곁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가냘파 보이는 할머니가 있다. 가만 보니 아마도 도토리를 줍는 모양이었다. 그녀들 쪽으로 가까워지며 이제 보니 가녀린 할머니가 마스크 쓴 할머니 몸통을 붙잡고 끙끙대고 있었다.
빗방울이 나뭇잎을 스치며 땅을 적시는 소리와 고즈넉한 산사를 향해 걷는 것 같은 고요한 평화가 살짝 뒤틀리는 묘한 이질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확신이 없었다. 아침부터 할머니 두 분이 저렇게 어울리는가 보구나, 지나치려 했다.
그 순간, 고요함이 깨지고 가냘픈 체구의 할머니가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도와줘요!”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