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살아가기

두 번째 기회 [최악의 라면, 최애라면]

by 비단구름

나는 아마추어다. 글 쓰는 작가로서도 아마추어고 엄마로서도 아마추어고 주부로서도 아마추어다. 모든 면에서 골고루 아쉽고 여러모로 부족한 아마추어다. 이달의 마지막 날이다. 기대하던 공모전에서는 끝내 전화가 오지 않았다. 발표날 핸드폰엔 “당선되셨습니다!”와 같은 문자는커녕 은숙에게도 엄마에게도 하군에게도 누구에게서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핸드폰은 하루 종일 침묵했지만 개의치 않아야 한다. 이런 일로 멘털이 나가는 것은 곤란하다. 하군은 멘털이 여러 번 나가 터졌어도 매 번 땅바닥에서 찌부된 멘털을 주워왔다. 간하고 쓸개는 진즉에 내다 버려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빙구가 됐다.


우는 것은 사치, 실망하는 것은 복에 겨운 것. 좌절하는 것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공모전은 사막을 걷다 만나는 오아시스 같다, 고 생각한다. 오아시스를 만나면 먼저 오아시스를 마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어서 오라고 하겠지.


“나도 먹어 봤는데 꿀맛이더라.”

아직 오아시스에 당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몹시 부러워하겠지.

“좋겠다. 나도 어서 먹어보고 싶다.”


몇 해 전 지역 잡지사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에서 신인작가에 당선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꿀맛이었다. 부상으로 제공한 커피에서 꿀맛이 느껴졌을 만큼. 하지만 오아시스를 먹었다고 그 자리에 눌러앉을 건 아니다. 오아시스는 죽을 것 같은 갈증에 단 한 모금 정도의 촉촉함만 줄 뿐이다. 한 모금 먹고 힘을 내면 그만이다.


”나 오아시스 먹었어! “ 하고 외치면,

조금 뒤편에 오고 있던 사람들과 먼저 앞서간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축하해 줄 것이지만 박수와 환호와 관심이 평생도록은 아니다. 오아시스는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를 먹으려면 잘 걸러 마셔야 한다. 오아시스에 너무 취하면 오아시스는 되려 독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사막의 원주민들은 오아시스를 농업용수로 사용한다. 오아시스는 내 안에 아직 발아하지 않은 작품의 씨앗을 촉촉하게 적셔 사막 같은 환경에서도 싹이 트게 하고, 막 싹이 트기 시작한 어린싹에게는 힘을 주어 세상에 우뚝 서게 하는 농업수이다.


나 또한 운이 좋아 몇 번 맞닥뜨린 오아시스 한 두 방울을 마신 뒤, ‘내가 너무 못쓰지는 않나 봐. 열심히 하면 어쩌면. 글을 계속 써도 되나 봐.’라며, ‘아무리 봐도 재능이 없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침범할 때마다 그때 그 몇 모금의 오아시스 맛을 음미하며 힘을 내 보고 있는 것이다.


기대했던 오아시스가 신기루였다 하더라도 실망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계속 걸어야 한다. 궁극의 목표를 향해. 그래야 결국엔 도달한다.


궁극의 목표는,

한 두 차례의 공모전 당선(이것은 무척 대단한 일이지만)을 너머,

몇 차례의 출간(이것 또한 무척 대단한 일이 분명하지만)을 너머,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긴 호흡의 작가로 사는 것이다.

순수하고 강렬한 열망이 예술의 경지를 향하도록.


그러니,

전에 출품했던 것들을 재정비를 시작한다. 요렇게도 바꿔보고 저렇게도 구성해 보아야 한다. 퇴고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지가 개벽을 할 만큼 글이 달라질 수 있다, 고 이론상으로는 알고 있다.

카테고리의 글들을 풀고 다시 정리하기로 했다. 마음이 번잡스러울 땐 정리가 엉킨 마음을 풀어준다.

꿈을 꾸듯,

지금 이 집에 나 밖에 없다, 최면을 걸며 집중해 본다. 가상현실을 펼치듯 캐릭터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머릿속에서 꺼내 눈앞에 펼쳐본다. 자고로 프로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 법. 나는 아마추어지만 프로의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허리가 아프다. 비가 와서 더하다. 혹시나, 하고 사로에게 물었다.


“너 친구들은 관심사가 뭐야?”

“왜?”

“엄마가 청소년 소설을 쓰는데 참고하려고.”

“청소년 소설이 뭔데? 청소년이 읽는 거야? 청소년이 나오는 거야? 청소년이 쓰는 거야?”

“청소년이 주인공이지. 청소년이 대상이고. 넌 어떤 소설이 나오면 재밌을 거 같아?”

“난 애초에 소설을 안 읽어.”

역시, 혹시나, 했는데, 역시다. 사로가 옆에 앉는다.

“엄마 소설 아이디어 생각 중이야.”

이참에 빈둥거릴 작정이다.

“음, 학업 스트레스?”

“그래?”

“내색은 안 하지만 학교에서 쓰러져.”

“그리고?”

“땅 파고 들어가?”

혹시나, 했는데, 역시다.

“우와, 엄마 타자 되게 빠르다!”

“후훗, 한 때 반에서 타자 일등이었어.”

사로 앞에서 한껏 허세를 부리는 가 싶지만 말리고 있는 중이다.

“정말?”

“보여줘?”

잊고 있던 한컴 타자를 열었다.

“엄마, 내가 한 번 해볼게.”

이참에 게임한다. 띵띵, 띠리리링, 소리를 듣고 홀린 듯 하리가 기어 나와 사로 옆에 대기한다.

“키보드가 어색해.”

사로가 장비 탓을 한다.

“네 거랑 똑같잖아.”

하리가 팩트로 대적한다.

사로가 8단계에서 ‘최우수’로 죽었다.

“나도 해볼래.”

내 솜씨를 보여줄 차례인데 하리가 벌써 시작했다.

하리가 손이 안 풀렸다며 재도전한다.

“안경을 쓰라고.”

시력이 영점 삼인 하리가 안경 없이 맨눈으로 게임하더니 금방 죽으며 아쉬워한다. 한 번 더하겠단 소리다. 마침내 내 차례다. 실력을 보여주지, 했는데, 금방 죽었다. 나보고, ‘불량’하단다! 불량? 나는 불량하지 않지. 호기롭게 다시 8단계 도전, 손쉽게 패스하는 모습을 사로에게 보여주었다.

“봤지?”

“오, 엄마 좀 하는데!”

후훗. 9단계도 압살 하는 걸 보여주겠어.

“보고 있지? 신들린 손가락!”이라고 하는데 죽었다. 잘하고 있었는데 죽었다.

“뭐지? 나 왜 죽었어? 안 틀렸는데!”

“괴물한테 계속 공격당하고 있었잖아!”

“괴물? 무슨 괴물? 누가 공격당했는데?”

“엄마가. 괴물한테.”

“괴물이 공격하고 있었다고? 누굴?”

“내가 보여줄게.”

이참에 한 판 더한다.

“진짜네.”

30년 전엔 못 보던 괴물이 출현했다.

“엄마 나보다 못하네.”

9단계를 패스하더니 사로가 말했다.

“못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타자로만 하면 너보다 빠르지. 엄마는 게임을 못하는 거잖아.”

대답이 없다. 이참에 게임에 몰두한다.


“나는 아마추어다.”라는 생각으로 글쓰기를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아마추어라는 것은 프로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애호가라는 뜻입니다. 원래 돈벌이로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을 프로라고 하고, 좋아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을 아마추어라고 합니다. ‘나는 글쓰기 아마추어다. 글쓰기를 진짜 좋아한다.’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평생 거의 직업적 글쓰기만 한 탓에 순수하게 글을 쓰는 기쁨을 별로 누리지 못했습니다. -고종석의 문장 2, 고종석-


나는 어느 것에서도 돈을 벌어들이지 못하고 있는 아마추어다. 하지만 좋아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만약 글 쓰는 데 취미가 없었다면 뭘 했을까. 어쩌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공예를 했을지도 모르고, 도예를 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표현의 욕구, 아웃풋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 소설, 에세이, 칼럼, 기사, 그림, 조각, 도예, 공예, 만화, 포스터, 광고, 작사, 노래, 작곡, 연주, 사진, 영화, 시나리오, 연극, 연기, 코미디, 스포츠, 댄스, 라디오에 사연 보내기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내면의 목소리, 의견,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 여기 있어요.’

‘나라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에요.’라고 수줍지만 당당하게 고백하는 마음으로 나는 글을 쓴다.

그래도 대문짝만 한 창이 있어 몹시 만족하는 작업실에서 선의의 희망을 가지고 충실하게 살아내는 수밖에. 별 거 없다, 사는 것은. 그저 하루하루 걷는 것과 같은 삶, 결과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지만 결실 같은 거 없다 해도 매일 걸어가는 삶, 을 증명하려 글을 쓴다.


나는 매우 부족하고 허점투성이다. 하지만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 내게 보이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좋아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창문을 열자마자 “굿 모닝!”하고 인사를 건네며 기다렸다는 듯 밀고 들어오는 상쾌한 바람과 “오늘도 좋은 하루!”를 속삭이며 파란 하늘에서 주방으로 비취는 눈부신 아침 햇살부터.


하리가 물었다.

“엄마, 최악의 라면이 뭔지 알아?”

“몰라.”

“물 많은 라면, 불은 라면, 그리고 진라면 순한 맛.”

“뭐? 진라면 순한 맛이 왜?”

“나도 몰라. 그게 최악의 라면이래.”

“그게 그렇게 맛이 없어? 나는 진라면 순한 맛 좋아해.”

“나는 결심했어!”

하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리가 오늘은 무엇을 결심했을까?”

“나를 소중히 여기기로! 건강한 음식만 먹을 거야!”


하군에 대해 소개하자면,

하군은 주중에는 한 번도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

주말 아침에는 마추 산책을 시킨다.

주말에 한 번 앞 베란다 청소를 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청소기를 돌린다.

화장실 청소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일 년에 두 번 정도 밥을 하고,

일 년에 한 번 정도 설거지를 한다.


그런 남자랑 왜 결혼했어?라고 사람들이 놀래 자빠질 수도 있겠지만,

이만하면 꽤 잘생겼다, 고 생각해서 반했다.

이만하면 꽤 성격이 좋다, 고 생각해서 결혼해 버렸다.

이만하면 꽤 똑똑하다, 고 생각했는데, 똑똑한 건 맞는 것 같은데 빙구였다.

그리고, 이럴 줄 몰랐다.


그런 남자랑 어떻게 살아?라고 요즘 사람들이 질색할 수도 있겠지만,

대신 하군은,

하루도 빠짐없이 일터로 나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감기 몸살이 걸리거나 반차 따윈 쓰지 않는다. 남편이 반차를 쓰는 날은 제삿날뿐이다.)

매일 꼬박꼬박 집으로 돌아온다.(밤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도대체 하군이 밖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뭘 하고 다니는지,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총, 칼만 안 들었을 뿐 치열하고 살벌한 전쟁터 같은 사회에서,

‘미생’처럼 일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하군은 아직도 소년 같다.(원래 소년 같았다.)


선유 자기야, 부부는 전생에 원수라더라.

하군 그래? 우리가 원수였어?

(휙, 휙, 두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그럼, 싸우자!


그리고, 결국, 나를 웃게 한다.(빙구 짓으로,)


선유 근데, 자기야, 이번 생에 우리가 서로 잘하면 다음 생에 안 만날 수 있대. 업을 쌓지 말자.

하군 그래? 그럼 싸우지 말자!!!


종종,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뭘 주워 와서 선물처럼 주곤 한다. 네 잎 클로버, 나무 이파리, 솔방울, 돌멩이(조약돌이라고 해두겠다), 도토리 한 두 알, 은행 한 두 알, 뭐 이런 것들이다. 어이없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생물인 듯 무생물인 듯, 이런 것들을 발견해 내는 심성에 반해 결혼해 버렸다. 내 발등은 내가 찍은 건가?


“지금 회사 분위기는 어때? 사람들이 잘해줘?”

혹시 하군이 이직한 회사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다들 착해. 잘해 줘. 사업부장은 점잖은 사람이고 나보다 어리지만 편안하게 해주려고 해.”

“다들 서울 살아?”

“그런 건 아니야. 김 부장은 용인 살고, 이 부장은 구리 살아.”

“서울 사는 게 쉽지 않지.”

“아저씨들 다들 잘 사는 것 같더라고. 정 부장은 강남에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작은 건물이 있다고 하더라. 사람들이 건물주라고 놀리면서 매일 쏘라고 하지.”

“그런 이야기들을 나눴다니 친해졌나 보네.”

안심이 되었다. 새로운 회사에서 낯선 사람들과 적응하고 있을 하군을 생각하니 애잔하다.


“조그만 건물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해. 고 부장은 집이 판교라는데 아파트가 하나 더 있다나 봐. 사람들이 고 부장한테도 부자라고 커피 쏘라고 하는데 고 부장은 은행 거라고 겸손하게 말해.”

“다들 꿀리지 않으려고 엄청 애쓰네. 어쨌든 다들 착하다는 거지?”

“응. 다들 무던한 사람들이야.”

그거면 되었다. 세상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 바라는 건 우리 하군에게 잘 대해주는 것뿐.


회사에 뼈를 묻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군이 고민하고 선택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지지해 주기로 했다. 항상 잘된 것은 아니었지만 하군이 애쓰던 시간들이 그렇게 하라고 일러주고 있었다. 무엇이든 어떤 의견이든 하군의 결정에 끼어드는 대신 하군이 결정하는 대로 믿어보는 것이 십 년 동안 하군의 성실함과 한결같음으로 보여준 책임감에 대한 내 보답이다.


“그런데 학자금은 어쩌지? 좀 아깝네.”

“애들이 대학을 가야 받는 거지 뭐. 덜 쓰고 더 벌면 돼.”

누군가에게 최악의 라면인지 몰라도 나에게는 최애 라면이다. 순한 맛 진라면 같은 하군이 그렇다. 하군에게 나 또한 그렇겠지만.


둘 다 물러 터지고, 똑소리라곤 나지 않고 뭐 하나 잘하는 것이 없는데 아이들을 이만큼이나 키워내고 있는 것이 대견할 지경이다. 아이들을 대단한 스펙으로 키우는 것은 확신할 수 없는 사회에서 부모 노릇하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이러한 마음가짐을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군은 빙구고 그런 하군을 사랑하는 나는 더빙구다. 요리보고 저리 봐도 여러모로 모자라고, 많이 부족하며, 잘난 구석이라곤 없다. 자신감이 넘치도록 잘난 사람들은 무엇이든 버릴 수도, 혼자 있을 수도, 찢어질 수도, 누구든 새로 만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우리 같은 빙구들은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잽 날리는 덜덜덜 떨리는 세상에서 손 붙잡고 붙어 있는 편이 전략적으로 낫다. 내가 잘났지, 네가 잘났냐,라고 시비를 가리는 대신 너 잘났소, 한다. 잘나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모자라서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며 살아보는 중이다.


결혼생활은, 부부는, 부모로 살아가는 것은, 때로는 눈물 쏟는 희생과 양보와 배려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결혼하는 순간부터,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 죽었소, 버티는 삶이다.


먼 훗날 아이들이 장성하고 나면 꽤 근사했던 우리의 청춘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덩그러니 남겨있을 미래를 기다린다. 흔들리는 바람은 미래에도 늙고 힘 빠진 몸뚱이라고 봐주진 않겠지. 매일 바람이 불 듯 삶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아무 때고 불어와 아무 방향이고 분다. 그리고 갈 길을 간다. 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져도 요란스럽지 않게, 호들갑스럽지 않게, 맞이할 수 있다. 살다 보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거니까.


우리는 힘도 없다. 힘이 없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잔잔한 바람에도 팔락거릴 얇은 가죽만 남은 지친 몸과 마음뿐이겠지만 빙구끼리 서로 의지하고 꼭 부둥켜안고 있어 볼 요량이다.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까지고.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다. 사회에선 우리를 가족이라 부른다.



기사를 검색하다 백신 접종 후 사망하였다는 사람에 관한 뉴스와 백신 접종의 부작용에 대한 기사를 읽고 며칠 전 백신을 맞은 하군이 걱정되었다.

“머리 괜찮아? 배는? 응? 배는 안 아파? 어디 불편한 데 있으면 참으면 안 돼, 알았지?”

“그럼, 바로 병원 가봐야지.”

(아무래도 아파 죽어도 참을 것 같다.)

“죽으면 안 돼. 알았지?”

“당연하지. 토끼 같은 자식들을 두고 어떻게 죽어. 누가 돈 주고 죽으라 해도 안 죽을 거야.”

“그래, 그래.”

“저승사자 만나면 도망쳐야지. 저기요, 잠깐만요! 저기 뭐가 있는데요? 하고 튈 거야.”

“그런 사람들 많아서 저승사자도 그런 식으론 안 속을 걸?”

“그래? 그럼 저 하군 아닌데요, 하고 도망칠 거야.”



정부에서 백신 4차 접종을 시작했다. 50대 이상, 기저질환자에게 권고되었다. 백신 접종에 대해 정부를 신뢰하고 따르던 하군은 4차 접종에 대해서는 여태 말이 없다. 회사에서 접종을 의무화하면 어쩔 수 없이 맞기야 하겠지만 분위기를 보니 권하지 않는 회사가 늘고 있다.


코로나가 지독한 감기와 같은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늘었다. 종합 감기약을 먹고 며칠 아프니 나았다는 사람도 늘었다. 정부에선 코로나 격리로 인한 상품권과 의약품 지급을 중단했다. 증상이 있지만 영업에 방해가 되어 검사를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영업자의 말에 비난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늘었다.


여전히 어딘가에선 코로나에 걸려 사망하는 노약자가 있을 테지만, 백신 접종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을 테지만 더 이상 코로나와 연관된 죽음은 기사에 올라오지 않았다. 코로나 역시 소모되는 유행 같은 것일까, 태풍과 같은 불운을 이런 식으로 취급할 수 있어 씁쓸한 한편 다행이었다.


나는 코로나를 감기 취급하듯 불안과 이별하기로 했다.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해하는데 오늘을 허비하지 않을 작정이다. 대신 오늘을 발견해 낼 것이다. 반복적이고 지루하며 쓸쓸한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더라도 나는 하군을 사랑할 것이다. 사랑할 기회가 있다면 몇 번이고 하군을 사랑한다. 지향해야 하는 가치를 기억하고 다다를 때까지 또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그 여정의 마지막에 즐겁고 유쾌하게, 다시 만날 것처럼 인사하고 웃을 거다.


산더미 같은 빨래를 개며 쭈그려져 있는 마음도 함께 갠다. 하군이 치킨을 사 온다고 해서 치킨을 기다리고 있다. 골목 치킨집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휴일이다. 덕분에 하군은 월요일이 휴무라 몇 번 허탕치고 여태 한 번도 맛을 보지 못한 돈가스 집 돈가스를 포장해 왔다.

“같이 쉬는 게 이득일까, 번갈아 쉬는 게 이득일까.”

원래 먹으려던 치킨 집이 문을 닫아 맛보게 된 돈가스를 소스에 찍으며 물었다.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는 법이지.”

청명한 푸른 하늘에 솜사탕을 찢어 얇게 펼쳐 놓은 구름들이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세상이 멈춘 가운데 구름들의 세상이 잔잔하게 흐른다.

이전 18화18 행복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