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기회 [긍정 회로]
새벽에 하군이 쿨럭, 쿨럭, 컥, 컥, 컥, 기침을 심하게 해 몹시 걱정이 되었다.
“기침 심하게 하던데 괜찮아?”
“너 기침해?”
“아니, 너 기침 심하게 하던데.”
“비 심하게 온다고?”
“아니, 너 기침한다고. 기! 침!”
“아, 난 또 비 온다는 줄 알았네.”
이쯤 되면 내 말을 안 듣는 건지 못 듣는 건지, 귓구멍이 막힌 건지 닫힌 건지 모르겠다. 백신 접종 날이라 하군이 집에 있다. 코로나 시국에 맞추어 개발한 백신의 효용과 강제 접종에 대한 논란과 상관없이 정부 방침을 일차적으로 잘 따르는 것이 성숙한 시민의 자세라고 여기는 하군은 오늘 하루 종일, 아무 데도 안 나가고 집에 있을 예정이다. 그래, 어차피 맞을 거 백수일 때 백신 접종하는 편이 낫지,라고 긍정 회로를 가동해 본다.
하군이 실직 상태일 때 뜻밖에 좋은 점은, 하군과 모닝커피를 즐길 정도로 아침이 무척 여유롭다는 점이다.
“커피 한 잔 할까?”
아침을 먹은 하군이 다정하게 말을 걸더니 소파에 앉는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것이 세상 이치이거늘, 커피 마시자는 사람이 커피를 타 줄줄 알았다! 하군에게 커피를 갖다 바치고 하군과 최대한 멀찌감치 앉아 글 쓰는데 집중해 보는데,
“점심은 들기름 막국수 어때? 저번에 봐 뒀던 집으로 막국수 먹으러 갈까?”하고 아침 아홉 시에 점심 타령을 하며 말을 건다.
으으윽,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 오늘은 글렀다.
“그러자.”
그러자 만족스러운지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보는가 싶더니 오 분만에 일어난다.
“갔다 올게!”
“벌써? 10시 예약이라며! 지금 가면 병원에서 한참 기다려야 돼. 50분에 나가도 충분해.”
다시 하군을 앉혔다. 병원은 기어가도 집에서 도보 3분 거리에 있다.
으윽, 몹시 신경 쓰인다. 좀 앉아 기다리는 가 싶더니, 결국 50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갔다 올게!”하고 나갔다.
백신 접종을 한 하군이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앉아 글을 수정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얼굴을 코앞에 들이댄다.
“으아악, 깜짝이야!”
“나 열나는 것 같아?”
“모르지.”
“만져 봐.”
“싫어.”
하군의 번들번들한 이마를 굳이 만지고 싶지 않았건만 내 손을 제 이마에 갖다 댄다.
“어때? 열 나?”
“모르겠고 마침 거대한 이불 빨래가 다 되었으니 빨래나 널읍시다.”
마침 하군이 집에 있으니 벼르고 있던 가장 큰 안방 이불을 빨아 버렸다. ‘왜 하필 내가 집에 있을 때 이불을 빤 것이지?’라고 하군이 의아해할 법도 하다. 이불을 널면서 하군이 말했다.
“근데 팔이 뻐근하네.”
“너는 독감 주사를 맞지 않으니 잘 모르겠지만 독감 주사 맞으면 원래 팔이 뻐근해. 이건 더 심하겠지. 팔 반쪽이 다 뻐근할걸. 며칠 갈 거야.”
“며칠이나?”
“그니까 누워 있어.”
하군이 팔이 뻐근한 와중에 집 앞 식료품점에 들러 계란과 고구마를 사 왔다.
“하리 고구마 좋아하지?”
“좋아하지. 이따가 하리 들어올 시간 맞춰서 찔게.”
하루 종일 말을 걸 모양이다. 오늘은 이만 노트북을 접고 고소한 들기름 막국수 먹으러 갈 채비를 해야겠다.
안방 화장실 세면대가 오래 사용한 티가 난다. 사용하고 나선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다. 양치질을 했을 뿐인데 물을 얼마나 썼다고 물을 입안에 머금고 물이 모두 빠지기를 지켜보며 기다려야 할 정도다. 그때마다 하군이 뚫어 주었는데 어제저녁 ‘세면대 바꿀까?’ 하고 물었다. 곧 다시 돈을 번다고 생각하니 돈이 마구마구 쓰고 싶어졌나 보았다. 그래서 내가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괜찮아. 크게 불편하지 않아.”
다시 한번 힘주어서 말했다.
“돈 쓰는 거 보면 사우디 왕세자 같단 말이지. 나 몰래 로또 맞았어?”
불안해서 물었다.
“돈이 남아도는 건 아닐 테지?”
글을 쓰고 있는데 하군이 아까부터 조용하다 싶었다. 돌 지난 유아와 하군이 어딘가에서 너무 조용하다 싶으면 사고 치고 있는 거다. 몹시 신경 쓰였지만 외면하고 있는데 하군이 다가와 옆에 앉더니 휴대폰을 들이밀며 물었다.
“이거 어때?”
청색의 식물무늬가 들어간 청아한 백자, 같은 세면대였다.
“예쁘네.”
“그지? 예쁘지? 이거로 바꿀까?”
예쁘다는 나의 말에 이렇게 얼굴이 화사해지며 기뻐하는 걸 보니 벌써 산거다.
“수전도 황금색으로 바꿔줄까?”
로코코 시대 귀족들이 썼을 법한 섬세하고 화려한 디자인의 황금색 수전도 눈앞에 들이민다. 구체적으로 묻는 폼을 보니 수전도 벌써 산거다.
“호텔 세면대로 바꿔줄게.”
돈도 없는 백수 남편이 호텔 세면대 타령을 하는 것을 보며 눈을 질끈 감고 어차피 답정너, 우리 하군 하고 싶은 거 다 하시구려, 반쯤 자포자기 심정으로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군이 일어나더니 벌써 장비 체크를 시작한다.
“우리 집에 커터칼 있지?”
실리콘을 뜯어낼 모양이다.
“줄자 어딨지?”
선 주문, 후 사이즈 체크인가 보다. 호텔 세면대를 선물해 줄 요량으로 아주 신났다.
세면대는 아주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왔다. 박스의 크기를 세면대 크기의 2배쯤으로 잡았는지 아주 어마어마하게 커서 상자 안에서 혹시 빙구 남편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거실을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거대한 상자를 풀어보려다 안에서 정말 하군이 튀어나오기라도 할까 봐, 상자를 그대로 방치하고 하군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상자를 풀어본 하군이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 줄자를 가져와 세면대를 재보았다.
“우와, 이거 생각보다 높네.”
하군이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높네, 라니. 업체에서 과소 광고라도 한 거야?”
내가 물었다.
“그렇지만 너 키가 크니까 문제없을 거야. 그지?”
“내가 크다고? 언제는 아담하다더니!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세면대를 가까이서 보니 크기로 제압하겠어,라고 뻐기는, 잘난 체할 거라곤 써도 써도 줄지 않는 돈뿐인, 거인처럼 거대한 덩치뿐인, 재래시장 골목을 더 좁게 만드는 고급 외제차뿐인, 원래부터 예뻤던 척하는 성형 미모뿐인, 장 볼 때도 들고나가는 명품 가방뿐인, 한 자리하고 있다는 알량한 우월감뿐인 짝퉁 명품을 닮은 괴이한 위풍당당함이 있었다. 반면 오백 년 된 느티나무의 허리처럼 볼록한 곡선형 바디는 잘난 체할 거리라곤 없지만 무엇이든 수용하는 넉넉한 품을 가진 잘 빚은 항아리 같다.
“여기다 깍두기를 담가도 될 거 같은데.”
명품 대야 같은 세면대를 보자 어째서인지 깍둑 썰기한 무를 잔뜩 넣고 고춧가루 양념을 버무리고 싶어졌다.
“이 사람이, 깍두기라니.”
하군이 다시 고개를 갸웃, 하면서 세면대의 지름을 재보았다.
“음, 홈페이지에서 보던 것보다 3센티미터가 작네.”
“사이즈 안 재고 산 거야?”
“쟀지. 그런데 이게 설명보다 좀 작네.”
“어째서 그렇지?”
“구울 때 줄었나 보지.”
“3센티미터나?”
“하지만 이게 딱 좋아. 아주 적당해. 업체에서 제공하는 사이즈가 좀 크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왜 샀어?”
“왜긴, 호텔 세면대로 바꿔 주려고 그러지.”
애써 외면하고, 아닌척하고, 남들 보기에 행복한 가정으로 보이길 원해 아등바등 유지한, 이 도시에서 무난한 중산층으로 포장한 나의 명품 짝퉁 같은 집. 세면대가 날아온 어느 오후 돈을 아끼겠다며 쭈그리고 앉아 세면대를 이리 보고 저리 보는 하군을 보며 불현듯 명품으로 포장한 짝퉁 같은 마음이 휘몰아쳤다.
세면대와 함께 주문한 황금색의 고풍스러운 수전을 손에 들고 회전시키며 요리조리 살펴보고 수전 꼭지를 올렸다 내렸다 점검하더니 하군이 코앞에 수전을 들이밀고 물었다.
“어때? 예뻐?”
“응. 예뻐.”
예쁘다는 대답을 듣고 안심하는 하군의 얼굴이 밝다.
“까꿍!”
하군이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세면대 분리를 위해 고심하는 동안 옆에서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마추에게 까꿍, 하고 인사했다.
“마추한테 애교를 부리고.”
“남편이 쳐다보지도 않아서 그렇지.”
“쳐다보지 않다니. 이 사람이. 이렇게 세면대도 교체해주고 있고만.”
화장실 바닥에 낮아 한껏 몸을 낮추고 세면대 아래에서 낑낑 거리며 하군이 말했다.
“너한테도 애교 부려줘?”
화장실 바닥에 누워있는 하군에게 물었다.
“아니. 넌 애교 안 부려도 돼.”
세면대 아래에 얼굴을 구겨 넣느라 얼굴을 찡그리며 하군이 말했다.
“왜? 애교 부리는 거 좋아하지 않아?”
끙끙 거리며 말이 없던 하군이 한참 뒤 대답했다.
“네가 애교까지 부리면 반칙이지.”
공구함을 활짝 펴놓고 수전에 관을 연결하느라 바쁜 하군이 수전을 내 코앞에 들이밀며 물었다.
“근데 왼쪽이 찬물이야. 오른쪽이 찬물이야?”
“음????”
“왼쪽이 찬물이고, 오른쪽이 뜨거운 물이지 않나? 대게는?”
당연하다 싶은 걸 진지하게 물으니 헷갈린다.
하군이 몹시 전문적인 기술자 포스로 다시 확인한다.
“왼쪽이 찬물, 오른쪽이 뜨거운 물? 오케이!”
상판에서 세면대를 들어내니 세면대가 있던 자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물때와 검은곰팡이와 묵은 때가 엉키고 겹쳐 굳어져 있었는데 매일 세수하고, 손 씻고, 양치하는 바로 아래가 이 난리였다니, 눈뜨고 못 볼 지경이다. 철수세미와 설거지할 때 사용하는 일반 수세미를 가져와 힘을 주어 닦아 냈는데 이 집을 오래 깔고 앉은 만큼 묵은 때는 꿈적도 않는다. 손가락에 힘을 최대로 주고 십 분 여를 문댔더니 때가 약간 사라지기는 했다. 상판이 갈렸는지 수세미로 힘주어 문지른 부분이 물길처럼 허옇게 파였다.
“어때? 예뻐?”
몇 시간 동안 좁은 화장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며 수전 교체하고, 새로 산 세면대 올리고, 물 잘 나오는지, 물이 세는 곳은 없는지 여러 차례 꼼꼼하게 확인한 하군이 물었다. 끈적이는 걸 세상에서 젤 싫어하는 하군 얼굴에 구슬땀이 송골송골한데 환하게 웃고 있다. 몹시 힘들어 보이는데 본인은 꽤나 뿌듯한 모양이다.
하군에게는 아마도 태고부터 인이 박혀 내려오는 두 가지 요소가 확실하게 있다고 짐작된다. 사냥과 건축의 경험. 그래서 가만히 있질 못하고 밖으로 나가 수색, 아니 탐색을 해야 하고, 동료를 찾고 팀을 구성하고 집에서는 뭘 또 그렇게 고친다. 하군의 은퇴 후 소박한 꿈은 집을 짓는 것이다. 아기 돼지 삼 형제의 셋째 돼지처럼 제 손으로 직접 한 땀, 한 땀 벽돌을 올리고 흙을 쌓겠단다.
“왜? 은퇴하고 왜 또 힘들게 뭘 하려고 그래? 그냥 쉬어! 그냥 놀아!”
“이 사람아! 놀면 뭐 하나! 사람이 일을 해야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몰라?”
수십 년 동안 쇄골 빠지게 뼈를 갈아 넣으며 일하고도 은퇴 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로서의 존재 이유에 불안함을 느끼고 우울해하다, 결국 무언가를 심고, 만들고, 어디로 다시 나가야 마음이 안도하는 자들에겐 사랑 타령보다 구슬땀이 마음을 안도하게 한다.
“이리 와 봐. 물 내려가는 거 개통식 해야지.”
등골 뽑혀도 행복하다는 하군이 수도를 틀어 세면대에 물을 채우더니 진지한 종교의식 치르듯 두 손을 꼼꼼하게 씻고 물을 뺀다.
코로로록. 막힌 하수구 뚫리듯 물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내려간다.
“너도 해 봐.”
무엇을? 난 씻을 게 없는데? 손도 다 씻고 샤워도 벌써 했지만 그래도 하라니까, 뭐. 경건한 마음으로 경건한 의식 치르듯 손 씻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하군이 말했다.
“그거 누르고.”
또르르륵, 묵은 체증 내려가듯 시원하게 물 내려가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가 보았다.
“물 많이 받아도 돼.”
“정말? 가득 받아도 돼? 여기서 빨래해도 돼?”
“그럼! 빨래도 해!”
하군 말대로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가 팝업을 꾹 눌렀다. 갈증 난 목에 맥주 내려가듯 콜륵콜륵 콰르콰르 콸콸 거리며 물이 시원하게 내려간다. 우리의 악재도 이 물길 따라 저리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물 시원하게 내려가니까 좋지?”
암요, 암요. 격한 동의의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맘에 들어?”
최종 확인이다.
“좋은데! 정말 좋아! 몇십만 원 번거나 마찬가지야! 이거 업체에다 맡기면 어디 보자, 세면대가 고급이고, 황금 수전도 고급이라고 더 받겠지? 하루 일당이 이십만 원쯤 하나, 요새? 못해도 몇 십만 원은 들었을 거야.”
몹시 만족한 하군이 하리와 사로를 불러 세면대를 자랑한다.
“오, 세면대 바꾸니까 분위기가 다르다. 예쁜데?”
“되게 고급스러워.”
청색 실로 수를 놓은 조선 후기 백자 같은 거대한 세면대와 18세기 프랑스 왕실의 연회장이 연상되는 우아한 황금 수전을 보고 하리와 사로가 환호했다.
“그렇지? 엄마가 골랐어.”
응? 내가? 하군이 고른 거 아니었어?
“엄마가 딱 보자마자 예쁘다고 한 거야.”
그런 거였다. 어쩌다 보니 내가 고른 거였다. 긴 타원형 세면대를 떼고 동그란 세면대를 올려놓았더니 세면대 바닥에 가려져 있던 바닥 때를 지운다고 지워냈지만 대리석 상판에 때의 흔적이 여전하다. 어쩔 수 없다. 살면서 세월만큼 때가 생기기도 하고, 때가 생기면 벗겨내기도 하지만 그래도 또 흔적이 남고. 그러나 흔적 위에 새로운 것을 올리면서 다시 시작해 보고.
그런데,
“왼쪽이 뜨거운 물이었나?”
이 빙구 남편이!
“왼쪽이 찬물!”
“지금 보니까 왼쪽을 뜨거운 물로 했네.”
할 말이 없다. 혹시 사랑스러운 나의 빙구 남편은 오른쪽에 좌뇌가 있는 건가?
“어떡하지? 하는 김에 다시 바꿀까?”
이제 막 끝났는데, 밥 먹자마자 몇 시간 동안 고생했는데 또 낑낑거릴 남편을 생각하니 좀 짠하다.
“냅 둬. 괜찮아. 그냥 쓰면 돼. 어차피 우리밖에 안 써.”
그러나, 하군은 구석기시대부터의 사냥과 건축 인자를 가지고 있는 트리플 에이형이시다. 모르면 모를까 알고는 못 지나간다.
“제법 근사한데?”
최종 마무리를 한 하군이 세면대를 보면서 흡족해한다. 하군은 우리를, 우리가 함께 있는 이 공간을 꽤 근사하다고 여기고 있나 보다.
나는 앞으로 몇 년간 사용할 새 세면대의 사진을 찍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왕실에서나 쓸 것 같은 세면대와 황금 수전을 교체하는 하군의 땀방울과 수고로움이 사진에 같이 찍혔다. 물론 그건 나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본 하군이 “오, 사진으로 보니까 더 고급스러운데?”하며 몹시 뿌듯해한다.
맞아. 고급스러워.(너의 마음이)
하군은 5성급 호텔 화장실에 있을 법한 고급 세면대와 황금 수전을 사용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이 순간은 명품 짝퉁 같은 행복일까.
아니.
지금 행복은 진짜다. 세면대를 바꿔줄 요량에 번거로움보단 기꺼이 공구함을 꺼내 수고로움을 즐거워하는 하군이 있어 가장 우울하다는 목요일에 명품 행복을 느끼고 있다.
하군이 낮잠을 자는 동안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왔다. 주방에서 장바구이의 식재료를 꺼내며 정리를 하고 있는데 하리가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살금살금 다가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운지 앞니를 환하게 드러내고 목젖이 드러나도록 웃어 버렸다.
“짜잔! 엄마한테 줄 거 있어.”
하리가 쇼핑백을 내밀었다.
“엄마한테? 뭔데?”
하리가 자랑스럽게 내민 쇼핑백 안엔 패딩조끼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선물.”
“선물? 갑자기? 왜?”
“아빠가 엄마 선물 사라고 돈 줬어. 근데 엄마가 계속 집에 있어서 못 사서 아까 엄마 나갔을 때 사 왔어.”
사로가 다가와 하리 곁에 섰다.
“아빠가 돈 줬어? 언제?”
“엄마 생일 전에. 엄마 이런 거 입고 싶어 했잖아. 집 앞에 산책 다닐 때 입을 겉옷 없다고. 그래서 패딩 조끼 샀어. 맘에 들어?”
“그럼, 맘에 들어.”
선물이 마음에 든다는 말에 하리가 기뻐한다.
“갑자기 선물이라니! 기적이야!”
내가 외쳤다.
"엄마는 기적이 있다고 믿어?
"응."
"그래?"
하리가 놀라며 되묻는다.
"엄만 기적을 봤어. 세상에 기적은 있더라. 오늘처럼."
“엄마 나는 결심했어!”
“뭐를?”
“하루하루 가장 즐겁게 살 거야.”
하리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둠칫둠칫 춤을 춘다.
“빨리 입어 봐.”
화이트와 누드 핑크 양면으로 입는 패딩조끼를 입어보니 그새 또 살이 쪘는지 가슴 부분의 단추가 살짝 낀다.
“어쩌지? 사이즈 교환해야 하나?”
하리가 가까이 다가와 옷매무새를 만져주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쩌지, 상상했던 핏이 아닌가 보다.
“100 사이즈 입으려면 주문해야 된대.”
“그래? 그냥 입을까?”
“내가 누나한테 엄마 나랑 비슷하다고 100으로 사야 된다고 했는데.”
사로가 가슴부터 토르소 전체에 타이트하게 끼는 내 상체를 보며 뾰로통한 어투로 말했다.
“괜찮은 것도 같은데.”
하리가 패딩 조끼를 입은 내 몸통을 훑으며 연신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거리는데 차마 예쁘다는 말이 안 나오는 가 보았다.
“선물 또 있어.”
원래 작게 입는 건가, 아니면 낙낙하게 입는 건가, 이리 보고 저리 보고하는 사이 사로가 작은 쇼핑백을 가져왔다.
“어머나! 웬 뷰러야?”
“엄마 뷰러 너무 더럽더라. 화장대에 있는 뷰러 볼 때마다 뷰러가 너무 오래됐다고 생각했지.”
하리가 말했다.
“한 이십 년쯤 썼을 거야. 결혼할 때 샀을 걸?”
“헉! 결혼할 때? 그 뷰러가 나보다도 오래된 거였어?”
하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새로 샀어. 직원이 시세이도가 좋다고 권했는데 음, 그냥 이거로 샀어. 이건 그립감이 좋대.”
연봉 퀸 쇼핑 호스트처럼 한 손으로 뷰러를 들고 설명하는 하리 얼굴이 시의적절한 선물을 잘 골랐다는 뿌듯함으로 가득하다.
“너네가 돈이 어딨다고.”
“아빠가 돈 많이 줬어. 엄마 선물 사라고.”
아, 이런 빙구 남편!
“엄마,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돈 많아.”
사로가 플렉스를 하려나 보았다.
“아빠가 도대체 얼마 줬는데?”
“그냥 많이 줬어.”
“엄만 필요한 거 없어. 너네 필요한 거 있으면 사. 사고 싶은 거 없으면, 음, 우선, 그냥 아껴 둬.”
이런, 또 이래 버렸다. 방에 있던 하군이 소란을 듣고 나와 합류했다.
“우와, 좋겠다! 우리 애들이 선물도 주고. 너희들 어떻게 엄마 선물 생각을 다했어?”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하군을 멍, 하니 보고 있는데 아이들이 자꾸 당장 뷰러를 써보라고 재촉했다.
“그거 이름이 뷰러야?”
하군이 신기한 듯 뷰러를 손에 올려놓고 살펴보았다.
“왜 뷰러지? 눈썹 올리면 더 잘 보여?”
뷰러가 뷰러라고 불리는 타당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하군이 뷰러를 요리조리 돌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봐. 눈썹을 가지런하게 샤삭, 올려주거든.”
“오, 신기한데.”
허술하기 짝이 없는 해명이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러운가 보다.
“애들이 나보다 낫네. 뷰러 바꿔야 되는 줄도 알고.”
“엄마, 새로 산 뷰러 빨리 해 봐. 되게 잘 된대.”
좋아, 보여주지. 성냥개비 다섯 개쯤 너끈히 올라가도록 눈썹을 최대한 올려주겠어. 앗, 그런데, 이전에 쓰던 뷰러가 손에 익어서 그런가, 새 뷰러가 눈두덩이를 살짝 집었지만, 하리와 사로가 지켜보고 있으니 아픈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좋아, 아주 잘돼,라고 했다. 지켜보던 세 명의 여섯 개의 반짝반짝한 눈동자에 안도의 빛이 돌더니 입에 미소가 퍼진다. 짝퉁이 마음을 흔들지라도 삶은 명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