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선택의 시간]
인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상처를 상처로 돌려주지 않고 아픔을 아픔으로 돌려주지 않고 오로지 더 사랑하는 자만이 무지개를 보고 웃는다. 늦게 깨달아 버린 미련한 사랑의 끝에 빛나는 무지개가 걸려 있기를.
태풍 '오마이스'의 영향으로 밤사이 부산에 침수 피해가 심각하게 있었다. 여전히 태풍의 영향 아래 있는 제주도와 남부 지방은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오마이스가 동해상으로 빠져나가 오늘 서울엔 약간의 비가 내리겠으나 태풍의 직접적인 피해는 없을 거로 예상됩니다.”
실내 스튜디오의 기상 모니터 앞에서 노란 우비를 입고 어깨엔 무지개 빛깔의 우산을 걸친 기상캐스터가 발랄한 미소와 경쾌한 목소리로 비 소식을 전했다.
“오늘 비 온대. 20프로 확률로.”
나가기 전 하군이 알려주었다.
“비 올 확률 20프로라는 것은 이십 프로 확률로 비가 온다는 거야? 이십 프로만큼 비가 온다는 거야?”
나가려던 하군이 찌릿, 하고 나를 본다. 살짝 쳐지기 시작한 탄력 없는 볼, 전보다 약간 늙었다.
“이런 생각 한 번도 안 해 봤어? 나는 비 예보를 들을 때마다 헷갈리는 부분인데.”
“비 올 확률이 20프로라는 거지.”
하군이 신발장에서 우산을 고르며 말했다.
“대구 간다 그랬지? 남부지방은 비 많이 온다는데 운전 조심해.”
“알았어.
경기도와 서울은 일기예보를 전할 때만큼은 한 지역이다. 기상청의 예보대로 오늘 아침은 비가 멈출 듯 조금 내리고 있다. 어제는 오후 내내 비가 내려 마추가 한 번밖에 나가지 못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짙은 남색 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남자는 우산을 쓰고 있고, 굵은 체크무늬 셔츠와 가느다란 체크무늬 반바지를 입은 남자는 우산 없이 다니는 걸 보면 밖에는 아직도 옅은 비가 내리고 있다.
사로가 등교 준비를 하는 동안 사로 방의 이불 정리를 하러 들어갔는데 사로의 침대는 벌써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여기엔 누구나 할 수 있는 손쉬운 비법이 있지.”
사로가 말했다.
“그게 뭔데?”
“이불을 깔고 자면 돼!”
이어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연 하리 방으로 들어갔는데 예상외로 하리 침대도 산뜻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뜬 거야? 어쩐 일로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을까?”
“한 때는 매일 침대 정리를 하곤 했었는데.”
요즘 침대 정리를 안 하는 날이 많았다는 것을 알긴 아는 가 보았다.
“오늘 안과 가야 하는 거 알고 있지?”
서리태 만한 다래끼가 일 년째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하리가 왼쪽 눈에 안대를 하며 말했다.
“꼭 가야 하는 거야? 집에서 며칠 쉬면 가라앉을 텐데.”
“아니야. 병원 가야 해.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어.”
하리가 양보하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았어, 그럼.”
하리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오자 마추가 이제 제 차례라고 어서 나가자고, 눈을 맞추며 꼬리를 흔든다. 마추와 함께 살며 깨달은 점 중에 하나는 나갈 수 있을 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밖을 보니 종일 비가 내릴 것이 확실해 보이는 공기 중에 퍼져있는 비를 보며 우산을 가져가야 할지 사뭇 고민이 되었다.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전 사로가 등교할 때, 마추와 따라나서기로 했다. 방에서 사로가 책가방을 매고 나왔다.
“다 챙겼어? 잊은 거 없지?”
사로는 가끔 실내화 가방을 두고 간다. 십 분 만에 학교에 도착해서는 실내화를 가지러 오 분 만에 집으로 뛰어 들어온다. 초등학교 다닐 때 실내화 가방만 흔들며 나간 거에 비하면 많이 양호해졌다.
“없어.”
“물은?”
“챙겼어.”
“숟가락은?”
가끔 수저를 가지고 가지 않아 학교 수저를 사용하는데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사로가 가지고 다니는 수저세트는 초등학교 때 사용하던 어린이용 수저세트다. 사로가 다른 애들 수저는 다 어른용인데 자기거만 작다고 했다.
“괜찮아. 먹는 데 지장 없어.”
“그렇긴 하지.”
“너도 큰 거로 바꿔줄까?”
“아니, 됐어.”
“숟가락 챙겼지?”
“어.”
“실내화.”
사로가 손을 뻗어 책가방 뒤를 툭툭 건드린다.
“챙겼어.”
“정신상태.”
“그건 안 챙겼어.”
사로의 싱거운 농담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게 평소와 다름없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공기 중에 퍼져있던 비가 방울이 되어 한 두 방울씩 뚝뚝, 블록으로 떨어진다.
“안녕. 이따 만나자!”
사로와 다시 만날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 우산을 가져왔다. 비가 더 세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나갔다 오는 편이 낫다,라는 것은 마추를 키우면서 확실히 실행하고 있는 점이다.
비가 오는 걸 다들 알았는지 오늘따라 동네 강아지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 마주치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시바견 정식이도 안 나왔다. 몹시 신비롭게 생긴 웰시코기와 허스키의 자식 하쿠나도 보이지 않는다. 비를 맞으며 똥꼬 발랄하게 동네를 뛰어다니고 있는 것은 마추뿐이다. 나는 우산 너머로 보이는 하늘과 눈을 맞추며 무지개를 기대했다.
세 시쯤 집안 청소를 시작한다. 청소하는데 한 시간쯤 걸린다. 원래는 오전에 청소를 했었는데 어느 날인가 하군이 내가 집 청소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이상하다. 이 정도로 말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집과 청소를 하지 않는 집이 동일선상에 있을 수 있는 건가? 하군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물건을 사용한 즉시 제자리에 돌려둔다면 집은 더러워지지 않지.”
하군과 소모적인 기분 상함을 하는 대신 오후에 청소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군은 내가 청소를 하지 않는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이상한 일이다. 도대체 얼마만큼 집이 깨끗해야 하군이 내가 청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얼마나 전문적인 청소를 원하는 걸까. 그런 정도를 원한다면 청소에 특화된 전문 가사도우미를 고용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늘 하지만 오후에 청소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주말에 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내 모습을 봐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하루종일 느긋하게 굴 수는 없다. 하군과 달리 나는 주말에도 빨래하고 밥하고 뒷정리하고 설거지한다. 이것만 해도 하루 다섯 시간은 된다. 회사를 다니는 하군은 주말에는 집에서 온전히 뒹굴뒹굴할 자격이 있다는 듯 당당하게 여유롭지만 나는 주말이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쉴 수 있는 날이 없는 것이다. 하군과 함께하는 한 아마 죽을 때까지, 내가 다시 혼자가 될 때까지 온전히 주말을 보낼 수 있는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군이 은퇴를 하고 난 후를 생각해 보았다. 하군이 은퇴하면 하군은 영원한 휴가를 맞이하겠지만 나에게는 은퇴도 없다. 하군은 나를 배려한다고 이렇게 말한다.
“이다음에 우리 둘이 살면 밥 할 필요 없어. 근처에서 간단하게 먹으면 되겠는데!”
번화가에 살고 있어서, 동네에 식당이 많아서 매우 만족하는 하군이다.
'그렇긴 하지. 그것도 좋지.'
하지만 나는 매번 먹는데 돈을 쓰는 것은 싫다. 배가 고프지 않은데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아무 식당에서나 하는 외식은 돈 쓰면서 몸을 망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간단하게 집에서 먹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하군은 간단하게 못 먹는다. 나는 김과 김치만 놓고 먹어도 맛있는데 하군은 계란 프라이라도 해야 하고 고기가 있었으면 하고 그럴듯한 요리가 있어야 좋아한다. 그러려면 누군가는 밥을 해야 하는데 하군은 해 먹느니 사 먹을 정도로 요리할 마음은 없다. 결국 집에서 간단하게라도 먹으려면 내가 밥을 하고 치우고 설거지까지 해야 한다. 나도 가끔은 하군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다. 엄마가 그랬듯 누군가 나를 위해 차려주는 집밥이 그립다.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날씨 정보를 확인하니 지금 내리기 시작한 비는 오늘 종일 내릴 예정이다. 하군이 있는 대구도 비가 쏟아지고 있다. 아침에 마추 데리고 나갔다 오길 잘했다고 생각할 때 사로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나 병원 가야 돼.”
대뜸 병원 가야 한다는 말부터 하는 사로.
“왜?”
“농구하다 손가락 다쳤어.”
“비 오는데?”
창밖으로 굵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물었다. 사로로 말할 거 같으면 모기에 물려도 밴드를 붙이는 아이 아니던가. 괜찮을 거라는 아빠의 말보다 고작 그런 일로 죽지 않는다는 나의 말보다 무리하지 말고 푹 쉬라는 의사의 말을 더 신뢰하는 제 몸 끔찍이 챙김이다.
“강당에서 했어. 검지손가락 부러진 거 같아.”
“응. 아닐 거야. 손가락 부러졌으면 벌써 학교에서 전화 왔겠지. 너 이상 없어.”
“아이참, 엄마는 왜 맨날 아들 말을 못 믿어? 진짜 부러진 거 같다니까.”
“오늘 누나 다래끼 째러 병원 가야 하는데, 비도 많이 오고, 너는 그냥 집에 있으면 안 될까?”
“나 병원 가야 해. 손가락이 너무 아파.”
“알았어, 그럼.”
휴,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의 '괜찮다'는 말을 들어야 안심하는 사로에게 슈퍼 울트라 십 대의 면역력으로 집에서 자연 치유를 하라고 설득하며 진을 빼고 싶지 않다. 가자, 병원.
밖으로 나와 보니 안에서 보는 것보다 비는 세차게 내렸다. 우산을 뒤집을 기세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빗줄기가 쉼 없이 차창으로 떨어졌다. 세차게 때리는 비바람 따라 좌우로 촐싹거리는 와이퍼가 툭 부러져 날아갈 것 같았다. 거리의 모든 것이 흔들렸다. 가로수의 허리가 꺾여 도로 가장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가게들은 문밖에 내놓았던 입간판들을 전부 안으로 치워두었다. 덜거덕 거리는 간판들이 곧장 자동차로 날아들 것 같았다.
으슬으슬한 차 안 공기를 달래려 에어컨을 껐다. 그래도 좀 아쉬운 것 같아 히터를 켰다.
그랬더니,
차 앞 유리에 뿌옇게 김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앞 유리에 히터 틀면 김이 걷히지 않나? 왜 이러지?’
그러다 말 줄 알았는데 앞 유리 아래 부분에서 시작된 희뿌연 김이 금방 앞유리 전체를 잠식하듯 덮어갔다. 빗방울이 무자비하게 앞유리를 강타하고 있는데 시야마저 확보되지 않았다. 급하다고 도로 한복판에 급정차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급해진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앞유리 안쪽 시야 부분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안개가 잠식하듯 곧 김이 앞 유리 전체를 먹어치울 참이었다.
운전석과 조수석 창문을 서둘러 열었다. 옆으로 부는 바람 때문에 빗줄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들이 보면 태풍이 몰아치는 날 자동차 문을 열고 운전하는 미친 여자를 보고 식겁할 상황이었다. 차문을 열었음에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마수의 손길이 뻗치듯 뿌연 김이 곧 나를 덮칠 기세로 차를 공격했다.
”이게 왜 이러지?”
당황한 나는 소리쳤다. 앞유리가 뽀얗게 덮인 차가 일 차선에서 질주하고 있었다. 나는 하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쪽 공기하고 바깥공기가 달라서 그런 거야.”
그제야 겨울에 앞유리에 김이 서리면 히터를 앞으로 보내는 이유를 알았다. 안쪽과 바깥쪽의 온도를 맞춰주어야 한다는 것을.
하군의 말을 듣고 앞유리에 히터를 보내는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고 나서야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히터를 끄고 에어컨을 틀었다. 맑고 투명한 앞유리 전체를 잠식하던 뿌연 김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안도했다.
“비가 많이 와서 애들 데리러 가고 있어. 태풍이 심해서 애들 날아갈까 봐.”
휴, 빗줄기 떨어지는 것이 잘 보여 안심이 된 나는 하군에게 유머를 발포했다.
“우리 애들 날아가면 안 되지.”
하군은 이걸 또 받아준다.
“사로 말이야. 농구하다 손가락 다쳤대.”
“그래? 심하대?”
“사로 말로는 오른쪽 검지손가락이 골절된 거 같대.”
“병원 가야겠네.”
“우선 하리 다래끼부터 째러 병원에 가려고. 다래끼 같은 거로 병원 가나 싶지만 부풀어 오른 눈두덩이는 다래끼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커져서 째지 않고는 별도리가 없어 보이긴 해.”
“옛날엔 다래끼 나면 눈썹 뽑아서 돌멩이 위에다 올려놨었는데 말이야.”
“그 돌멩이 누가 지나가다 차면 다래끼가 그 사람한테 옮고 말이지?”
“그렇지.”
“하하하! 너는 꼭 베이비부머 시대 사람 같이 말한단 말이지!”
“너는 국민 체조 열심히 하던 새마을 운동 시대 사람 같고 말이야.”
도로의 배수로가 부지런히 물을 빼냄에도 자동차들이 지날 때마다 도로에 쌓인 물이 첨벙거렸다. 나는 중앙로 교차로의 신호대기에 멈춰 건너편에 보이는 신호등의 빨간 등을 보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후기 봤는데 시간은 별로 안 걸리네. 근데 눈 뒤집어서 눈꺼풀 안쪽을 칼로 살짝 짼대. 그다음 짜나 봐. 엄청 아프다는 후기도 많고 심하면 눈두덩이에 시퍼런 멍도 드나 봐.”
“우리 하리 고생하네.”
교차로의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좌우를 살폈다. 앞유리에 굵은 빗줄기가 마구 쏟아졌다. 와이퍼가 좌우로 요동쳤지만 거세게 떨어지는 굵은 빗줄기가 금방 시야를 가렸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천천히 액셀을 밟아 교차로에 진입했다.
“비 많이 오는데 괜찮아? 운전 조심해서 해.”
“그래야지. 올라오고 있지?”
“응. 올라가는 중이야.”
“거기도 비 많이 와?”
“어. 여기도 엄청 쏟아지네.”
“비 많이 오니까 운전 조심해. 비 오면 감속해야 하는 거 알지? 100킬로로 마구 밟지 말고.”
“나야 조심하지.”
하군은 운전하는 거에 대해 잔소리 듣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얼른 농담을 걸었다.
“빗속으로 막 달리...”
-쾅!
스마트폰 너머로 들리는 폭발음 같은 강한 충격음.
“무슨 일이야? 하군? 야, 장하군!”
하군이 대답이 없다. 나는 하군을 소리쳐 불렀다. 예리한 유리가루가 온몸에 달라붙어 살을 에는 공포가 엄습했다.
“하군! 무슨 일이야? 야! 장하군!”
-쾅!
두 번째 굉음.
“악!”
기억나는 청각은 포탄이 터진다면 이런 소리일 거라고 생각되는 굉음뿐이다. 너무 충격을 받은 나는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희미하게 눈을 떴을 때 기억나는 시각은 빛이다. 빛이 줄곧 나를 따라온다. 복도를 따라 길게 이어진 병원 형광등이 천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듯 빛나고 있다. 의료진이 이동 침대를 빠르게 옮겼다. 뒤로 한쪽으로 비켜나던 사람들의 웅성거린다. 나는 눈을 감고 있는 하군의 얼굴을 본다. 하군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다. 하군의 표정이 지금껏 본 적 없이 일그러져 있다. 몹시 고통스러운 얼굴이다.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떡해, 선생님들, 우리 하군이 많이 아픈 것 같아요. 얼른 와서 하군 좀 살펴주세요!’
나는 소리쳐 의료진을 불렀다.
‘어떡해, 죽었나 봐.’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 죽는 거야? 안 돼. 이렇게 가면. 너는 제발 살아야 해. 너는 아직 행복하지 않았어. 너는 지금껏 고생만 했어. 너는 아직 누려야 할 게 많아. 신이시여, 우리 하군을 살려 주세요, 제발. 하군을 다시 돌려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엄마가 매주 교회 나가라고 했는데 진즉에 엄마 말을 들을 걸 그랬다. 교회를 나가지 않아도 좋으니 매일 기도하라고 했는데 진즉에 엄마 말대로 할 걸 그랬다. 너무 늦은 걸까. 나는 처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살려 주세요.
알바 베이커리 앞 광장엔 수 십 마리의 비둘기 떼가 차지하고 있다. 광장의 벤치 뒤 나무에 걸려있는 ‘비둘기가 스스로 먹이를 획득하여 생태계의 건강한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라고 굵은 고딕체로 인쇄한 현수막 앞에 서서 알바가 비둘기에게 스낵을 던져 주자 수십 마리의 비둘기들이 광장으로 내려왔다. 비둘기 수는 계속 늘어나 베이커리 앞 광장은 비둘기 서식지가 되고 있다. 발밑으로 옹기종기 모여 꿈쩍도 않는 비둘기들을 피해 베이커리에서 풍겨 나오는 고소한 빵 냄새를 맡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알바가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배고프지?”
알바를 따라 베이커리 안쪽 테이블에 앉았다. 알바가 갓 구운 밤식빵과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내왔다.
“먹어 봐. 방금 구운 거야. 원래 레시피보다 버터를 한 스푼이나 더 넣은 밤식빵이지.”
알바가 말했다.
“밤식빵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빵이에요! 엄마가 늘 가장 먼저 만들어 주시던 빵이기도 하고요. 뜨끈한 밤식빵을 쭉쭉 찢어서 안쪽의 부드러운 속살을 혀에 올려 눈을 감고 음미하지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겠구나.”
“네. 엄마와 여행을 가는 것도, 엄마와 외식을 하는 것도 모두 행복했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엄마가 구운 밤식빵을 엄마와 마주 앉아 함께 먹을 때였어요.”
나는 베이커리를 둘러보았다. 파란 나무문으로 되어 있는 양문형 입구를 열고 들어오면 노란 펜던트 조명이 아이보리 빛 홀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밝은 나무 바닥에 라운드 테이블과 페브릭 의자가 홀 안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나무 책장에 꽂혀 있는 익숙한 책들.
“잠시만요.”
무언가 떠오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쪽을 좀 봐도 될까요?”
“그러려무나!”
미소를 지으며 알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카운터 뒤쪽으로 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카운터 뒤쪽으로는 작은 주방이 있었다. 주방에는 커다란 이태리제 오븐이 세 대 있었다.
“말도 안 돼.”
나는 홀로 나왔다. 지중해 빛깔의 파란 문에 다가가 손을 대어보았다. 손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다 나는 멈칫했다.
'선유♡선유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
어느새 눈물이 폭포처럼 떨어졌다.
“여기는!”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 틈에 알바가 가까이 다가와 서 있었다. 알바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기는 우리 엄마 빵집이에요!”
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운전 중에 전화질이야.”
알바는 부드럽게 농담한 걸 테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어떻게 된 건가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다 잊은 거 같아요. 여긴 분명 엄마 빵집인데 엄마는 어디에 계신가요?”
나는 흐느꼈다.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쏟아져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여기는 실수로 일찍 온 사람들이 들르는 공간이야. 백 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기대 수명은 고작 83세지. 사고 치지 않고 건강검진 잘 받으면 대부분 그 정도는 살아.”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알바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너도 예정대로라면 곱게 나이 먹은 86세의 할머니가 되었어야하지. 그런데 그만 실수로 제명까지 못 살게 되었어. 지금 의식을 잃은 채 병실에 누워있지. 그러니까 왜 운전 중에 딴짓이냐 말이야!”
알바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교차로로 진입했을 때 단숨에 교차로를 통과할 수 있을 거라 오판한 승합차 운전자가 왼쪽 도로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돌진했어. 승합차는 곧장 네 차의 옆구리를 들이받았어. 네 귀여운 검정 SUV는 기계체조 선수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일 회전을 하고 땅으로 떨어졌어. 시간이 멈춘 듯,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얼음이 될 정도로 강렬한 사고였어. 네 차의 유리는 산산이 깨지고 사이드 미러는 십여 미터를 혼자 날아가 엉뚱한 곳에 착지했어. 네가 교차로에 진입한 지 불과 3초 만에 일어난 일이야.”
“제가 잘못했어요.”
나는 흐느끼며 겨우 대답했다.
“하군은요? 하군은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코에서 눈물처럼 흘러나오는 콧물도 손등으로 닦은 뒤 옷에 쓱, 닦았다. 훌쩍거림이 딸꾹질처럼 나오는 바람에 한 단어 한 단어 겨우 뱉었다.
“하군은 무사해. 실은 하군은 태안에 들렀다 가는 중이었어. 네가 먹어 보고 싶다던 게국지를 포장해서 말이야. 일종의 서프라이즈로 널 놀라 자빠지게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야. 그러다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5중 추돌사고를 당했지. 하군이 사고의 최초 원인자는 아니야. 게국지 국물이 흐르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지만 안개가 심했고 앞이 보이지 않았어. 앞에서 4중 추돌 사고가 난 걸 약간 늦게 발견하고, 전화질을 하는 바람에 말이야. 곧바로 브레이크를 밟았지. 하군이 순발력이 좋긴 해. 앞차 뒤꽁무니를 들이받긴 했지만 하군은 손끝하나 다치지 않았어. 하군 차는 앞범퍼를 통째로 교체해야 하긴 하지만 말이야.”
“하군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래. 하군은 무사해. 하군이 받은 앞차 운전자도 그 앞차 운전자도 그 앞차 운전자도 모두들 뒷목을 잡고 내리더니 죄다 병원에 입원해 버렸지. 하군은 입원도 하지 않았어.”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군은 무사하구나. 다치지 않았구나. 다행이야, 정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하군은 지금 비탄에 빠져 있어. 자책이 심해서 나까지 스트레스 받을 지경이야. 전화를 받지 말걸, 하면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어. 그리고 간절하게 빌고 있지. 자기가 죽어도 좋으니 너를 살려달라고 매일 울부짖고 있어. 하리와 사로한텐 자기보다 네가 더 필요하다나 뭐라나. 자기 파괴적인 스트레스성 탈모와 자기학대로 아무래도 예상보다 빠르게 대머리가 될 것 같아.”
“너는 이제 선택을 해야 해. 나는 결정을 해야 하고. 너를 돌려보낼지, 이대로 저 세상으로 보낼지.”
“제게 기회가 있나요?”
나는 여전히 훌쩍 거리며 물었다.
“물론이지. 실수였잖아. 넌 죽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 단지 조심하지 않았을 뿐. 그 정도의 실수는 누구나 해. 신은 인간의 인간다운 실수에 놀랍도록 관대해. 실수엔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기회를 주지.”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알바가 가까이 다가와서 안아주었다.
“괜찮아. 잘 될 거야. 너를 아끼는 사람들이 많아.”
“제가 무엇을 하면 되나요?”
“나는 너를 당분간 지켜보고 판단할 예정이야.”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판단의 근거는 사랑의 유무야.”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요?”
“이대로 저세상 가야지. 사랑이 없으면 의미도 없어. 그렇게 계속 살아서 뭐 해.”
“네, 알겠어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면 쌍무지개가 뜰 거야.”
알바의 하얀 머리가 하얗게 빛났다. 하지만 그것은 알바 뒤에서 빛나는 펜던트 조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