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미워하지 않기

첫 번째 기회 [오랜 친구]

by 비단구름

따사로운 햇살이 통유리창으로 들어와 실내를 포근하게 데웠다. ‘알바 베이커리’엔 스탠딩 에그의 ‘오래된 노래’가 흐르고 있다. 베이커리 앞 광장 맞은편 덩실한 건물 창틀에는 수십 마리의 비둘기 떼가 일렬로 서서 늦은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저들의 출근 시간이 끝나면 땅으로 내려가자!” 우두머리 비둘기가 지저귀는 듯했다.

파란 페인트를 칠한 나무 문을 열고 나온 알바가 베이커리 앞 벤치에 누군가 버려두고 간 맥도널드 음료수와 종이봉투를 치운 다음 손걸레로 벤치를 쓱쓱 닦았다. 그 곁에서 마추가 맥도널드 종이봉투에 코를 가까이 대고 안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알아내려는 듯 코를 씰룩거렸다. 알바가 마추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머니에서 북어포를 꺼내 마추에게 주었다.


-슬퍼하지 말기를.

살았을 때 좋았으나, 죽음이 안타깝지 않다.

세상과 작별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떠나니 아무도 비통해하지 말기를.

나는 즐겁고 유쾌하게 떠난다.


“이 정도면 남은 사람들이 슬프지 않을까.”

자못 비장한 마음과 달리 장난처럼 가볍게 표현된 내용이 아쉬워 나는 작은 목소리로 여러 차례 문장을 다듬으며 읽어보았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꽤 심각해 보이네. 내가 좀 읽어볼까?”

풍성한 회색 머리카락에 느슨하게 핀을 꽂은 알바가 구수한 보리차 향이 나는 커피를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알바에게 방금까지 작성하고 있던 문장을 보여주었다. 말없이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알바의 크고 깊은 눈빛에 혼이 나는 것 같아 움츠러든다.

“누가 봐도 유서 같아 보이는구나.”

알바가 건조하면서 따뜻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벌써 죽으려고 하는 거야? 왜? 우울해?”

“우울증이나 우울감이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런 글을 작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울한 지도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알바가 재차 물었다.

“가끔씩 심장 부근의 통증을 느끼지만 지병이라 부를 만한 것은 아니에요.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은 아니고요.”

내가 말했다. 알바가 고개를 저었다.

“돈 필요해? 내가 빌려줄까?”

“알바가 돈이 어디있다고요. 저는 부자는 아니지만 죽을 만큼 생계의 곤란함을 겪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어째서?”


하는 수 없이 나는 알바에게 털어놓았다.

“아직 작품이 완성되지 않았지만 알바에게 말해 줄게요. 제 주인공이 죽으려고 해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 버렸거든요.”

“오호, 치정 사건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지.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데?”

알바가 물었다.

“음치인 주인공은 노래방에서 백지영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아요. 누군가 남편 앞에서 자신 있게 백지영 노래를 선곡했다는 사실을요.”

알바는 대답 대신 단단하고 따뜻한 손을 내 손 위에 포갰다.

“주인공은 남편이 오래전 자신과 이별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요. 그녀가 깨닫지 못했던 것은 그의 오랜 배려였다는 것을요.”

알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알바가 가져다준 커피를 마셨다.

“주인공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는 성품이지요. 그래서 상처받았음에도 상처를 되돌려주기보다는 큰 사랑으로 품으려고 해요. 그녀가 남겨진 사람들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그들이 상처받지 않는 거예요, 주인공의 남은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돌봄이자 배려의 마음이 잘 드러나도록 그녀의 유언을 더 간결하고 명확하게 다듬고 있어요.”

알바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며 가만히 쳐다보았다.

“젊은이는 실컷 살다 천천히 가도 되는데 그런 일로 삶을 포기하려는 거야?”

"아니에요, 그런 건."

나는 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한 통증에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나는 너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라고 했지 유서를 적으라고 한 것이 아니야.”

알바의 화장기 없는 양 볼은 반질하게 윤이 났다.


베이커리 앞 광장에는 비둘기 떼가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광장에는 사람보다 비둘기가 더 많아져 수적 우세인 비둘기들은 사람들이 지나가도 피하지 않았다. 오븐 타이머가 딩동, 소리를 내자 알바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나몬 롤을 접시에 담아 가지고 와 내밀었다.

“방금 구운 거야. 먹어 봐. 그리고 조금 있다가 네 오랜 친구가 가게를 도우러 올 거야.”

알바가 말했다.

“제 오랜 친구요?”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일찍 죽은 오랜 친구가 없어요.”

“기다려 봐. 곧 올 테니.”

알바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구워진 갈색 시나몬 롤을 찢어 입에 넣자 달콤한 설탕과 고소한 버터향과 시나몬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사실 소설은 제 이야기예요. 하군은 더는 저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해요. 하군은 퇴근 후 매일 작은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묵묵히 화초에 물을 줘요. 아무리 고되고 마음에 안 들어도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견디어 내고야 마는 성품을 타고난 하군이 회사를 바꾸면서도 저만은 용케 바꾸지 않고 있어요. 일종의 의리 내지는 책임감 같은 기분 아니면 체념 같은 기분일지도요.”

언젠가 심장이 멈출 거라는 사실을 예보하듯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손가락이 심장을 꼬집는 것 같은 통증이 지나간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즉흥적으로 이는 죽고 싶은 마음을 밀어내면서요. 죽어도 상관없을 기분으로 죽지 못해 살지만 죽은 사람처럼 살아요. 즐겁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요. 요즘 좀 지쳐요. 이렇게 사느니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완전히 체념했고 무기력해요.”

나는 야단을 맞을 것 같아 알바의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복에 겨워 어리석은 소리 한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렇지 않아. 어떤 감정이든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알바의 음성은 실크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원망스럽니?”

알바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아요. 하군이 매일 화초에 물을 주며 삶을 가꾸듯 저도 그래야 해요. 그가 그렇듯 저도 견뎌야 해요. 그의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좋은 날을 한 번 더 가꾸어 주려고 해요.”


“다시 태어나도 하군과 결혼할 거야?”

알바가 물었다.

“네, 하군이 허락하면요.”

“다시 태어나면 잘 살 거야?”

알바가 재차 물었다.

“네, 잘 살게요.”

“무엇을 하고 싶은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싶어요.”

“당장 죽을 비장한 표정으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치고는 꽤 희망적으로 들리는구나?”

알바 입가의 주름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사랑이 바닥나고 있더라도 사랑을 담아주려고 해요.”

“어떤 이에게는 가장 어려운 사랑을 너는 쉽게 하는구나.”

알바가 미소를 짓자 비둘기 떼가 날아올랐다.




딩동, 베이커리 문에 매달아 놓은 풍경이 흔들리며 맑은 종소리가 울리고 해그린이 들어왔다.

“네 오랜 친구가 도착했구나!”

알바가 말했다. 해그린이 옅은 미소와 함께 눈인사를 건넸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너무 일찍 왔잖아!”

알바가 해그린을 보고 소리쳤다.

“오전에 일이 있어 나왔다가 이쪽으로 바로 왔어요.”

알바의 말에 대답을 하면서 해그린의 시선은 줄곧 나에게 향해 있다.


“안녕하세요! 해그린이에요.”

“안녕하세요. 김선유예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그린에게 인사했다. 크고 동그란 눈매, 깊은 쌍꺼풀, 오뚝한 콧날, 날렵하면서 단단한 턱선, 분홍빛 입술, 흐늘거리는 짙은 갈색 머리, 딱 벌어진 어깨, 균형 잡힌 체형. 해그린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저기, 알바? 이 사람이 제 오랜 친구라고요?”

“그렇단다.”

알바가 눈웃음을 지었다. 해그린도 옆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알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남자는 없는데요. 저는 이렇게 잘생긴 남자랑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거든요. 제가 아는 남자 중 그나마 하군이 잘생긴 편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내가 해그린을 향해 얼굴을 돌리자 해그린이 세상에서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사람은 심지어 보고 있는 것만으로 행복을 주는걸요.”

해그린의 선한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기분 좋은 긍정의 감정이 몽글하게 피어올랐다.


“일 없으면 다른 일을 봐야지 왜 이리로 와. 제멋대로 일찍 온 것이니 아르바이트비는 더 못 줘. 코로나로 매출이 절반 이하로 떨어져서 이대로 가다간 망할 예정이야.”

대답 대신 알바가 해그린을 향해 장난꾸러기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거 바라고 온 거 아니에요.”

해그린이 카운터 뒤로 가 황토색 앞치마를 맨 뒤 홀로 나와 빵의 수량을 체크했다. 그리곤 테이블을 닦고 테이블의 간격을 맞추고 밖으로 나온 의자가 있으면 집어넣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아이야.”

야무지게 가게를 정돈하는 해그린을 보고 알바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하리와 사로가 먹을 빵을 사기 위해 진열장 앞에 섰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대부분의 진열장이 비어 있다.

“아직 빵이 다 나오지 않았어요. ‘설레요 쵸코 크로플’은 아홉 시에 ‘열정 소시지 빵’은 열 시에 나와요.”

가까이 다가온 해그린의 음성은 설렐 만큼 맑았다. 알바는 빵마다 감정을 붙여 놓았다. 기대돼 도넛, 자신 있어요 패스트리, 고마워 소보로, 사랑스러워 티라미수, 감사 크루아상, 만족 우유식빵, 흥미로워 깜빠뉴, 즐거운 바게트, 인상 깊은 마늘빵, 기쁜 몽블랑, 다정한 모카빵, 기운 내 치아바타.


‘속상해. 실망, 걱정, 당황, 두려워, 무서워, 막막해. 긴장돼. 좌절했어요. 질투 나요. 화나요. 간절해요. 놀라워. 어리둥절해. 끔찍해. 망설임. 혼란스러움. 미안해. 서운해. 슬퍼요. 외로워. 우울해. 불안해’ 세트를 주문하면 알바가 골라주는 빵 두 개와 알바가 직접 내린 풍미 가득한 커피 두 잔이 제공되었다.


“다른 거로 가져가.”

알바의 말에 진열대를 다시 훑어보았다. 몇 개 올려 있는 빵은 하리와 사로의 취향이 아닌 것 같아 망설이다 만족 우유 식빵을 골랐다. 다행인 건 냉장고에 케이크와 샌드위치들이 제법 있어 햄치즈 샌드위치, 새우 샐러드 샌드위치를 하나씩 샀다.

“하나는 오후에 아이들 간식으로 주고 다른 하나는 내일 아침으로 먹을 거예요.”

계산을 하며 나는 해그린에게 설명했다. 베이커리 앞에 마추를 묶어 놓을 데가 마땅치 않아 그냥 앉아 있으라고 했더니 마추가 베이커리 벽 앞에 얌전히 앉아 기다리고 있다. 베이커리의 유리벽으로 보니 베이커리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마추를 보고 귀엽다는 눈빛을 보내며 지나가고 있다.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제 좋은 말 하는 것을 알아들은 마추가 앉은 매무새를 고쳐 앉았다. 마추도 이 동네가 자기 동네인걸 알고 있다.


“마추가 얌전하게 잘 앉아 있네요.”

해그린이 마추를 보며 말했다. 밖으로 나오니 얌전하게 앉아있던 마추가 “벌써 나왔어?”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올려본다. 해그린이 따라 나와 마추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마추와 교감하듯 해그린과 마추가 한동안 맑은 눈을 맞추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해그린이 일어서며 말했다.

“마추는 참 행복한 강아지네요.”

“노력하고 있어요.”

나는 맑은 영혼의 해그린에게 미소를 지으며 마추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사로의 도복을 세탁기에 돌렸다. 사로는 일주일에 세 번 도장에 가는데 도장을 다녀올 때마다 도복을 빨아 달라고 부탁했다.

“운동할 때마다 빨아야 하는데 뜨거운 물에 세탁하면 안 되고, 꼭 찬물에 빨아야 해. 벨트는 안 빨아도 돼. 알았지?”

관장님이 이렇게 알려주었다고 했다. 다행히 세탁기에 돌려도 된다고 했다. 사로 마음이 편하도록 사로가 운동을 갔다 올 때마다 도복을 세탁기에 넣는다.


무척 독립적인 마추가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다. 아마 소파 밑이나 문을 열어둔 안방 침대 아래에서 동그란 눈빛으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관찰하고 있거나 평화롭게 한숨 자고 있을 것이다.


세탁기에 넣어둔 도복 세탁이 끝나 도복을 꺼내 앞 베란다로 갔다. 건조대의 속옷들을 걷어내고 사로의 도복을 널었다. 어제 널어둔 속옷들이 눅눅하다. 살짝 코를 대보니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음, 역시 건조기가 필요한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한다. 조금 시큼한 냄새가 나는 속옷이지만 어차피 한 번 입고 벗을 거니 다시 세탁기에 넣고 새로 빨지는 않을 생각이다.


주방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가지 볶음과 락앤락에 넣어둔 찬밥을 꺼내 웍에 넣은 뒤 간장을 조금 더 넣어 볶아주었다. 낙지젓갈을 조금 꺼내 볶음밥과 함께 먹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열어둔 창문으로 빗소리가 들어온다. 쏴아, 시원하게 쏟아진다. 아침에 마추와 나갔다 오길 잘했다는 안도감이 드는 한편 집중 호우로 피해를 입을 사람들이 걱정된다.


하리가 제 것을 타며 함께 타 놓은 하얀 머그컵에 담긴 홍차를 보니 아침부터 하리에게 냉정하게 말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오늘은 하리가 봉사활동을 하는 날이라 복지관에 데려다주었다. 내가 모진 말을 했음에도 하리는 내리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복지관을 향해 걸어가는 하리의 뒷모습을 따라 비가 내렸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어떤 날은 아이를 바라만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가, 아이가 건강하기만 한 것도 감사했다가, 어느 날은 공부 잘해야 한다고 했다가, 어느 날은 공부 안 해도 된다고 했다가,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가, 놀고 있는 걸 보면 화가 났다가, 변덕도 이런 변덕이 없다. 필시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원래부터 이랬는데 운이 좋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남자를 속였던가.


널뛰기처럼 널뛰는 엄마의 감정을 보고 하리와 사로가 몹시 무한 카오스 상태일 법도 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아이들은 고요한 바다와 같이 잔잔한 성품, 반짝반짝 빛나는 눈, 그리고 미소가 찰랑거린다.

“우리 아기는 너를 닮았으면 좋겠어.”

하군은 내 배를 살살 문지르며 염불을 하듯 했다.

“성격을? 외모를?”

“둘 다.”


하군의 바람대로 아이들은 나를 닮은 모양으로 태어났는데 성격은 하군을 닮았다. 역시 하군의 내면이 더 강한 것이다.

“우리 애들 너무 착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지?”

아무 생각이라곤 없어 보이는 근성을 타고난 하리와 사로를 보며 하군은 염려스러워했다. 나는 그런 하군의 염려를 들으면 ‘아이들 성격이 나를 닮았으면’ 하고 바라던 하군의 바람의 의중을 헤아려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하군을 닮아 덤덤하고 무덤덤하고 잔잔한 아이들이 좋다. 저렇게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것도 어쩌면 복잡하고 빠른 요즘 세계의 뜻밖의 생존전략의 일환이겠지, 뭐. 그러니까 저런 정신 상태를 가지고도 걱정이라곤 우선 넣어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엄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침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

“감정은 신의 그림자 같은 것이어서 하루 종일 따라다니지. 때문에 아무리 화가 나도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낼 수 있도록 아침에는 밖에 나가는 식구들에게는 물론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아야 해.”

엄마에게 그런 말을 여러 차례 들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몹시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고 보니 엄마는 어떻게 참았지? 나 같은 자식을 키우면서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을까. 이제 보니 엄마도 아침마다 어지간히 화가 났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인내심이 나와는 다른 차원의 레벨이다. 창문을 보니 비가 잦아들며 반짝하고 해가 나기 시작한다. 갑자기 쏟아져 내린 우중충하고 불손한 단어들을 몰아내고 하리 마음에도 반짝반짝하게 해가 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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