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이따가 잠깐 5시에 맨션 앞으로 내려올 수 있어? 주고 싶은게 있는데. 괜찮으면 잠깐 내려와~ ”
일본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의 라인(메시지)다.
일본에서 나의 사회적인 관계는 友達(토모다치-친구)와 ママ友 (마마토모-아이친구엄마), 知り合い(시리아이-아는사람)라는 단어로 구분지어졌다. 보통 아이 친구 엄마로 만나면 딱 아이친구 엄마와의 관계에서 그치기 마련인데, 처음 몇마디 나눈 대화에서 나랑 동갑이라는 것, 한국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외국인인 나에게 스스럼없이 정말 호의적이었다는 것 만으로도 우린 급속도로 친해졌고, 만나면 언제나 아이가 아닌 “나”에 대해 다정하게 물었던 소중한 친구(토모다치)가 되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것은 a4 정도 크기의 작은 종이봉투. 그 안에는 사과 2개, 배 1개, 오이, 감자 등 종류별로 1-2개씩 들어있었다.
“이거~ 나 주말에 부모님 댁에 다녀왔는데 부모님이 농사지으신거야. 먹어봐.”
일본에서는 누군가에게 아무 이유 없이 (설령 친구 사이일지라도) 무언가를 나눠준다는 일은 흔치 않다. 그 이유는 암묵적으로 오카에시(받은 것은 반드시 되돌려주는)라는 문화가 있고, 그것이 서로 부담스럽기 때문에 특별한 일 없이는 주지도/받지도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사과 1개에 200-300엔(약 3000천원 남짓) 정도의 과일이 비싼 일본에서의, 그녀의 본가에서 받아온 소중한 양식들을 종류별로 골라 담아 20여분을 자전거를 타고 집 앞에 온 그녀를 생각하니, 한국과는 다른 형태의 ‘이런 것이 그들의 정(情)일까?’ 라는 생각에 마음 한켠이 찡했다.
이런 일은 그녀 말고도 가끔씩 있었다. 같이 일하던 점장님께 받은 양말 두켤레(이유 : 나는 늘 복숭아뼈가 보이는 바지에 개성있는 양말을 신고 다니곤 했는데, 나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였다), 직접 만든 비즈 반지 (비즈 반지라니;; 이건 정말,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었다), 여행 다녀오며 사온 초콜릿 한 개, 그 지방 유명한 커피집에서 산 드립 커피 하나 등 한국에서는 주고 받지 않는 방식의 소소한 류의 물건들을 받으며 처음엔 내가 외국인이라서 무시해서 이런 걸 주나? 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이런 사소한 걸 굳이 포장해서 직접 주러 온다고? 라고 의아해했던 적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해주면, “그런걸 왜줘?” “한봉지도 아니고 한개? 너무한 거 아니야?” 등 우리의 가치관에서 이해가 안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각각의 물건이 지닌 의미와 이유의 순수함이 느껴 졌기에 나를 위한 특별한 물건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 뒤로는 나도 같은 방식으로 답례를 하거나 마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본질에 집중하니 이런걸 줘도 괜찮나? 라고 생각할 정도의 한국에서는 쩨쩨하다고 여겨지거나 인색하게 보여질 법한 행위에 고민거리가 적어지고 적극적이게 되었다. 집에서 김밥을 싸면서 한두줄을 포장해 손편지를 함께 담아 자전거를 타고 가서 전해주거나, 여행을 다녀오면서 그 지역 맥주 1-2캔을 마셔보라고 건네 준 것. 한국에서 받은 고기리 들기름 막국수와 만드는 방법을 번역하여 전달해주거나.
“어머, 이런 귀한 걸 주는거야? 고마워 정말 잘 먹을께.” “와~ 이거 정말 맛있겠는 걸. 너무 고마워. 나 줘도 괜찮은거야?” 라던가. 내가 주는 모든 것들을 귀하고 소중한 것을 나눠주는 것으로 생각해주었고, 나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주는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들, 그의 취향을 캐치해서 담고 있다가 주는 방법은 크기나 방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과 친절, 생각하는 마음이란 물건 자체가 아닌 마음이 담긴 것을 주는 것 이었으리라.
한국에서의 마음을 전하는 선물이란 잘 갖춰진 완제품, 푸짐한 양이 오고 갔었기에 그에 미치지 못하는 소소한 것을 주고 받는다는 것의 본질과 그 의미에 대해 실은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을 준다는 것, 마음을 준다는 것을 주고 받는 행위와 겉치레에 신경 쓰지 말고 사람에 대한 관심 그 본질에 집중한다면 물건과 방식이 무엇이든 진심이 전달 된다고 믿게 되었다. 환경보호에 관심있는 친구에게 고체의 샴푸솝을, 책을 즐겨 읽는 친구에겐 북클립을, 육아에 지쳐 있던 애주가인 친구에겐 아주 잘 만들어진 안동의 귀한 막걸리를.
어느 나라에나 정이 있다. 단지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나는 일본에서 한국의 “정”을 느꼈다. 인간과 인간사이에서 뗄 수 없는 것이 정인 것 같다. 사람을 향한 관심과 관계속에서의 교류는 불가항력적이다. 단지 한국인에게 정이란 내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주는 것이 라면, 일본인에게 정이란 줄 수 있는 것의 최선을 주는 것이 아닐까.
정이라는 것은 결국 만국 공통의 언어이고 표현이다.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 나는 타지에서 기대하지 않은 작은 챙김을 받고, 한국인의 정을 느끼고, 그것을 의지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