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약해지되, 부디 쓰러지지 말자고
우리반에 다같이 망하는 마법의 단어를 즐겨쓰는 녀석이 있다.
"어차피 남들이 계속 일회용품 쓰면 쓰레기는 안 줄어드는데 저만 안 써서 뭐해요"
"어차피 남들이 그 회사 물건 살 텐데 저만 불매운동해봤자 소용없잖아요."
"어차피 수행평가도 아니잖아요."
"됐어, 어차피 우리가 이렇게 해봤자 이미 다른반이 1등이야."
녀석는 자신이 바라던 상태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방법으로 '체념'을 선택한 것뿐이다. 시행착오를 충분히 겪으며 성공경험으로 자기효능감의 씨앗을 조금씩 쌓는 대신, 시행을 아예 하지 않음으로써 착오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냉소에 빠진다. 끝까지 열심히 해내려는 급우를 비웃고, 만성적인 무기력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체념은 쉽다. 쉬운 방법이다 보니 전염성도 강하다. 그렇게 여럿이 체념하게 되면,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문화가 되어버린다. 그쯤 되면 의욕 있는 친구들은 점차 비웃는 친구들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잘난척하면 안 되고, 욕먹을 수 있으니 튀면 안 된다는 교묘한 압박 속에서 다같이 침잠한다. 학급 전체가 바싹 말라버리는 것이다.
이와중에 잘난척해도 되는 아이가 간혹 있다. 정확히 말하면 '닥치고 찬양'이 가능한, 잘나도 된다고 주변 친구들이 허락해 준 아이다. 공부, 운동, 사교, 예술 가릴 것 없이 모든 분야에 뛰어난. 하지만 이 친구들은 겸손마저 장착했다. 잘난척 한 번에 훅 갈 수 있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잘할 수 있는데도 한 발 빠지기도 한다. 잘하는 걸 서로 뽐내고 응원해주는 대신, 뭐 하나 책 잡히면 얄짤없다. 아이들도 이미 완전무결함을 추앙한다. 헛점은 보이기 싫어하고, 못하는 것에 대해 받는 비난에 익숙해져 있다. 이는 어른들이 '순수함에의 의지'를 희구하고, 그렇지 못할 때 냉소와 체념으로 귀결하는 것과 닮아 있다.
이 사회는 진공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완전무결함 같은 걸 기대하는 건 "씨 없는 참외 내놔라" 하는 꼴이다.(근데 막 개량종 있고....) 김문수 같은 열혈 빨갱이도 극우 보수가 되고, 정경유착 사건 떴다 하면 연예계 스캔들로 쉽게 덮이곤 하는 게 세상이다. 노래를 참 잘하는 어떤 가수는 젠더감수성 빻은 게 단점이고, 국가 이미지 개선에 기여한 어떤 회사는 임금 체불 기업 명단에 올라 있는 게 문제이고, 전세계 아이들 돕는 어떤 NGO단체는 모금액 일부가 특정 종교단체에 쓰이는 게 결점이고 그렇다. 군데 군데 구멍이 나거나 누덕져서 너저분한 그게 사회다.
혐오는 대화와 갈등, 경쟁을 통한 사회발전을 가장 강력하게 막는 회피기제이다. 문제를 개선할 것을 목표로 지적하는 대신 '회생불능한 문제'로 상정해 두고 그에 피해 입는 우리를 '어차피' 같은 단어로 용두질하는 쪽으로 흐른다. 헬조선 담론이 한창 떠올라 노오오력 같은 단어가 유행할 적에도 그 단어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자조적 유희로 우리를 달래는 동안, 직면해 있는 문제가 저절로 개선되지는 않으니까.
또한 혐오는 많은 경우, 아래로 흐른다. 강하고 거대한 무언가와 싸울 힘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니 더 왜소한 이들에게 화살을 겨누고 분노로 맞서는 약자들을 파편화시킨다. 토끼같은 자식 볼 시간 없이 내 업무가 과중되는 이유가 같은 팀 출산휴가 여사원이 아니라 노동환경 잣같은 회사인 걸 모를 리 없다. 포악한 개의 본성이 문제가 아니라 반려동물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적절한 규제와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회가 문제라는 것도 다들 안다. 수많은 문제에 우리가 맞서기보다 그저 외면하게 만드는 것은 "성공 경험의 부족"이다. 저 거대한 산이 도무지 무너질 거 같지 않은데, 무너지는 꼴을 본 적도 없으니까.
이 책에서 다섯 저자들은 저마다 혐오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공교롭게도 메시지는 하나로 수렴한다.
'약함을 인정하라'
빈 공간이 나와야 채워야 할 각이 나오지 않겠나. 나의 약함을 인정해야 약자들과 연대해서 힘을 키울 수 있고, 사회에 포진한 문제들은 본래 해결이 어렵다고 인정해야 해결을 위한 첫 단계를 모색할 수 있다. 신 같은 개인이나 만능의 제도나 완벽한 회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그것들이 도래하기만을 바라며 눈앞의 불편과 부조리함을 외면한다고 사라질 리 없잖은가. 작은 바람조차 일지 않는데 거대한 돌풍을 상상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한동안 나의 학급운영 제1과제는 이 '어차피'가 유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가 유행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이런 것들이었다.
첫째, 담임이 못해버린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은 선생님이 나서서 망가지는 모습을 자꾸 보여준다. "앗 선생님도 안되네, 이게 진짜 안 쉽구나"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앗 또 못했다. 내일은 되겠지"
셋째, 누군가 성공했을 때 포풍 홍보를 한다. "와 이거 지호가 했어? 대~박. 찍어찍어 클래스팅에 올리자."
넷째, 첫째부터 셋째까지 했던 분야를 다른 데로 확장한다.
말하자면 "으쌰으쌰"를 미친 듯이 전파했다. 옳다고 믿는 것은 행해야 하고, 같이 행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며,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고 나면 반 전체에 행복감과 효능감이 흐른다는 걸 아이들이 직접 느껴야 했다.
'어차피 소년'은 사실 성공 경험이 부족했다. 또한 소년이 보는 사회 역시 그랬다. 1년만에 이 친구의 태도 전반이 개선될 수는 없었지만, 이제 더이상 '어차피'를 밥먹듯이 사용하지 않는다. 냉소가 주변인들에게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도 일단 해봤더니 제법 되기도 하고.
우리는 사회에서 많은 변화를 더 입증해낼 책무가 있다. 우리의 비극은 우리 시대에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들은 우리의 사회를 보고 배우며 자란다. 더 많은 성공경험을 안겨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절망하지 않는 힘은 그래서 중요하다. 누덕진 사회를 기우고 기우는 일은 언젠가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함께 단련해야 한다.
함께 단련하기 위해, 우리에겐 더 많은 성공경험이 필요하다. 작은 긍정적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해낼 수 있어야 하고, 서로가 잘해낸 일에 대해 더 많은 격려를 해야 하고, 상대의 결점을 들추는 것보다 상대의 강점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혐오를 법으로 제재하는 대신, 우리는 각자의 약한 부분을 더 많이 감내하고 악한 부분에 맞서야 한다.
트레바리 국내이슈의 11월 도서 <#혐오_주의>를 읽고 쓴 글입니다.
http://trevari.co.kr/book_reviews/15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