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지지 않는다는 말>을 읽고 쓴 글
복세편살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이 거대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중심잡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까딱하면 내 생각 내 취향 내 직업 사라지는 세상이다. 모든 게 내가 귀여운 탓인가 해버리는 방법도 있겠으나,
이 어려운 세상에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실감하면서 살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스스로에게 제안해본다.
최근 김봉진 씨가 '책 끝내주게 읽는 법' 강연에서 그랬다. "책을 통해 지난 자신을 계속 부정해가며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고. <자유론>에서 밀도 그랬다. 인간사회가 계속해서 발전해올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자신의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고 보니 김연수도 그랬다. 현재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하고, 더 좋은 게 나오면 또 그걸 따르자고. 자기 삶에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한결같이 이렇게 얘기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을 거다.
확실히 사람은 살던 대로 살기가 훨씬 쉽다. 그런데 이렇게 급변하는 거대한 사회 속에서 살던 대로만 사는 건 퇴보다. 계속 존재하려면 역설적으로 계속해서 지금의 나를 기꺼이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웬만할 때 유연하고, 확신 있을 때 완고해지는 게 잘 사는 비결 같은데 그건 내가 틀렸을 때 빠르게 인정하고 더 좋은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가질 수 있다. 생각이든 습관이든 잘 깨뜨려 나가야 유연해질 수 있다. 유연해지려면 매일 해야 한다. 다리 찢기 잘하려면 못해도 매일 다리 찢어야 된다.
나는 매일 나를 거스르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김연수에겐 그게 달리기고 글쓰기였겠다.) 지난 3년간 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을 계속해서 낯설게 변화시켜왔다. 사는 곳, 직장에서의 위치, 대화 상대... 기존의 나를 깨나가기 좋은 환경 덕분에 나는 예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다. 나를 깨는 경험 지속하자고 거주지를 노다지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계속해서 나와 이질적인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을 찾아 열심히 대화 나누는 것이겠다. 그러려면 나도 그들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래 두 번째 방법이 나를 그렇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리라.
헬스장에서 꼬박 한 시간 동안 진짜 데질 거 같을 때까지 운동하고 온몸이 저릿저릿 고통스러울 때, 비로소 내 몸 구석구석까지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나를 전부 써서 어떤 일에 매진하는 게 나로 오롯이 존재하게 할 터이다. 내가 최선을 다한다 해도 누군가의 적당히보다 보잘 것 없을까봐 두려울 수도 있을 텐데, 그건 최선을 다한 다음에 해도 될 걱정이다. 우선 내가 옳다고 믿는 일에 전심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전심을 다하려면 그 일은 내게 가장 중요한 목표여야 할 테고, 그 중요한 목표를 실천해가며 산다는 건 곧 엄청 살맛나는 일 아닐까.
지금의 내게 그 일은 젠더이슈와 공교육을 엮는 일이다. 이게 나한텐 가장 가치있는 일이고, 잘해내기만 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좋아질 거라는 확신이 있다. 열심히 하고 있냐고 하면 그렇다. 전력투구하고 있냐고 물으면, 부끄럽게도 답 못 하겠다. 6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내 부족한 부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어 고맙다. 그런데, 전력투구하려니 또 세번째 방법이 필요하다.
책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물방울처럼, 유리처럼 투명해지기'다.
무제한으로 노출당하는 세상이라, 오히려 사람들은 숨기기 바쁘다. 나도 그렇다. 노출될 수밖에 없다면 기왕이면 좋은 면이 많이 노출됐으면 좋겠으니까. 그런데 그런 마음에 기대어 살면 '실제의 나'와 '내가 바라는 나'에 약간의 거리가 생긴다. 같을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건강하게 지키려면 현재의 나는 내가 바라는 나보다 매력적이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게 부끄러워 자꾸 감추고 포장하다 보면 그 거리는 벌어지고 나는 점점 초라해진다. 주춧돌이 허약한데 튼튼하고 멋진 건물 지을 수 있을 리 없다.
나에게 좀더 솔직해져야겠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건 늘 무언가 겁내고 있다는 뜻인데, 겁내지 않게 될 때 비로소 나는 더이상 뒷걸음질 치지 않고 분명한 지점에 단단하게 설 수 있다. 김연수는 그걸 용기라고 했다. 내가 불완전한 나를 온전히 인정하는 용기를 낼 때 나는 비로소 전력투구할 출발선에 설 수 있을 거다.
책을 읽으며 내내 생각했다. 결국 사람들을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내가 누군가를, 내 주변을, 나아가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올 거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순간에 우울해하고, 거기서 벗어나려 발버둥치지 않던가. 나를 귀하고 어여쁘게 여겨주는 애인이 곁에 있을 때 좀더 세상이 예뻐보이고 살만하다고 느끼는 것도 비슷한 이치일 것 같고. 사람들이 '외롭다'고 하는 것도 물리적으로 혼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존재하고 있음을 타인이 알아주지 않을 때라고 생각한다.
투명하게 솔직하기, 그리하여 전력투구하기, 그 과정에서 열심히 좌절하고 깨져보기, 이 세 가지 방법을 통해 거대한 세상에서 나로 존재할 수 있다. 그렇게 내가 존재하는 게, 세상에 기여하는 일이 되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