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재 에세이드라이브 15기에서 함께 쓰다 / 키워드: 번복
두유
우유를 안 마시려고 노력중이에요
이렇게, 그리 어렵지 않은 도전들로 성공경험을 쌓아요
그러면 기분이 조크든요, 덕분에 큰 도전도 할 만해지구요
당신은 어떤가요 do you ~ ?
“어? 꿈꾸는 초식공룡? 이거 혹시….”
독서모임에서 발제해야 할 책이 말썽이었다(정확히는 책이 아니라 책을 소화할 수 없는 내 두뇌가 말썽이었다). 이미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책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굳이 골랐는데, 나에게도 영락없이 어려웠다.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럴 땐 일등시민들(블로거)에게서 고견을 얻는 게 제일이다.
음, 실패다. 블로그에도 온통 난해하다는 불평 반, 오독일 것이 거의 분명한 해석 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스크롤을 내리던 중 발견한 책 모임 기록을 무심코 클릭해보았다. 토론을 이끌어간 발제 질문들과 의미있는 각자의 의견들을 옮겨적어 둔 글이었다.
질문도 좋다, 답변자마다 개성에 따라 의견의 결이 조금씩 다른 것도 좋다. 오, 여기서 건지면 되겠다. 얼추 질문을 베끼고 창을 닫으려는데, 포스팅 말미에 여러 번 눈길을 두게 되는 문장이 있었다. 이 포스팅은 2019년 7월 23일에 쓰여졌는데, 거진 일 년이나 지난 뒤에 글을 수정한 흔적이 이렇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래에 멤버가 반론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옳은 생각이라 여겼으니 기록으로 남겼던 것일 텐데, 무려 일 년이 지난 뒤에 다시 이 게시글을 찾아서, 열어서, 수정한, 것이다. 번거롭게! 게다가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었던 것처럼 삭- 지울 수도 있는데, 굳이 가운데 줄 그어 자신의 과거 의견을 남겨두고, 수정한 날짜와 함께 ‘반성한다’고 남겼다. 이 생각이 왜 문제적인지, 어떤 반성을 한 것인지까지는 적어두지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반성의 의미로 기꺼이 번복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어쩐지 그 흔적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글이 좋으면 글쓴이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라, 주인장이 블로그 이름을 뭐라고 지었나 보았다. ‘꿈꾸는 초식공룡’ 호호 귀엽네. 어? 꿈꾸는 초식공룡? 이거 혹시….
“시원! 혹시 블로그 해요?”
“응! 해요.”
“친구들이랑 독서모임도 한다고 했죠. 혹시 이 블로그 시원 거예요?”
“오? 어떻게 알았어요? 맞아요 제 거예요.”
워! 나의 궁예력 오진다! 그러고 나니까 내가 아는 시원의 목소리가 덧입혀져 다시 읽혀 배시시 웃음이 난다. 이를 테면 이런 부분.
‘이해 못했을 수 있다. 근데, 그럴 수도 있지.’
‘예전엔 부끄러운 생각을 했다. 근데, 그럴 수도 있지.’
‘생각이 바뀌었다. 근데, 그럴 수도 있지.’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무책임해서 쓰는 표현은 아니었다.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무수히 자빠져봐야 하는 법이다. 자빠지기 두려워서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해서는 걷는 법을 터득할 수 없다. 그가 쓰는 ‘그럴 수도 있지’는 제대로 생각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마음껏 삐끗 생각해보기’를 허용하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주 그런다.
“(…) 그랬지. 근데 내가 그때 잘못 생각했던 거 같아. 헤헤헤.”
“그 이후에 생각해봤는데, (대충 그때보다 반대의견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는 말 블라블라).”
대화가 끝난 이후에도 조금 더 생각을 이어가보는 노력을 할 줄 아는 사람.
그는 모르겠다는 말, 결정을 보류하는 말도 잘한다.
“섹트*가 나쁜가? 청소년들에게도 성적 욕망이 있고 자기결정권도 있어. 근데 성인에 비해 표출할 방법이 부족하잖아. 하지만 그러다 보면 위험에 처할 확률도 높은 편이긴 하지. 그치만 보호해야 하는 것도 맞는데 보호라는 미명 아래 청소년은 계속 무성의 존재가 되어 왔는데, 음... (한참 재고 따져보더니) 이 문제는 아직 모르겠어요.”
* 섹스+트윗. n번방의 피해자들 중에는 트위터에서 일탈계라 일컬어지는 성적인 트윗을 했던 것을 빌미로 협박 받기 시작한 경우가 있다.
젠더감수성 교육한다면서 뒤처지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 계속 배워야 했다. 젠더감수성 기르기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의 연속이다. 설리와 현아를 욕했었고 설리와 현아를 응원했다. 박원순의 행보를 열렬히 응원했고 그의 마지막 행동에 비추어 그의 지난 행보를 재평가했다. 흑형을 칭찬으로 썼고 이제는 혐오표현이라 부른다. 때마다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기 싫어 갖은 변명을 동원해 우겼었고 결국 어쩔 도리가 없어질 때에야 울며 겨자먹기로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항복하는 식이었다. 그런 과정을 시원은 때마다 더 가뿐하게 해냈다. 마법의 주문 덕분이렷다.
번복하는 게 끝끝내 우기는 것보다 낫다. 지금은 맞은 내가 내일은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참 어렵고, 그 어려운 일을 해낼 때 우리는 차차 어른이 된다. 유연함은 ‘척’할 수 없다. 대화하다 보면 고집부리는 성미는 금방 탄로나고, 사람이 시시해져 버린다. 그래서 마치 생각하기를 진탕 연습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유연함을 자주 부러워했다. 그런 습관은 부쩍부쩍 시원을 자라게 한다. 그래서 시원이 나보다 어른이다, 나보다 아홉 살인가 어린 어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