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 May 26. 2020

무음형 인간의 변

태재와 에세이드라이브 6기에서 쓰다 / 키워드: 벨소리

    

 애인이 서운해한 적이 있다.

“당신은 왜 나까지 무음으로 해 놔? 나는 알림 설정도 돼 있고 상단 고정도 해놨는데!”

 언제나 모든 걸 무음모드로 해 놓는단 변명을 할 새도 없이 그 삐죽거림이 너무 귀엽단 생각이 들었으므로, 다 잘못했다고 하면서 그이만은 알람 설정을 해두었다.

 하지만 귀여움에 대한 감탄도 잠시, 그 알람과 진동의 볼록함이 내겐 너무 큰 소음이라 조금 불편해졌다. 그와는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각자 1인분의 삶을 지내기로 합의했다. 알람 모드와 무음 모드 만큼의 거리를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 우리 사이에 자질구레하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비~겁한 변명이고 사실 결정적이었던 건 그냥 알람 모드 때문일지도 몰라.   


 귀가 예민하거나 풍요로운 친구들이 주변에 많아서, 나 같은 무음형 인간들이 어딘가 있다면 참 반가울 것 같다. 막귀도 이만한 막귀가 없어 2만 원짜리 샤오미 스피커도 2000만 원짜리 쿠르베 스피커랑 똑같이 들린다. 동굴 목소리를 가진 남자도 만약 나 같은 여자가 좋다면 다른 걸로 어필해야 할 터다. 대충 ‘좋은 소리’가 필요 없다는 뜻. 뿐만 아니라 ‘그냥 소리’도 필요 없다. 집에서 엥간해선 음악을 틀지 않는다. 막상 틀면 흥겹게 따라부르거나 어깨춤을 추지만, 음악이 없는 상태를 결여로 보지 않는다. 고요를 즐거이 부린다.

<유미의 세포들>, 나에게 소리세포는 절대 프라임 세포가 될 수 없엇!

 이건 고요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는 또 다르다. 방음 구린 오피스텔 옆집에서 핫하게 섹스하는 소리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다들 노이즈캔슬링이 어쩌고 노래를 할 때도 관심이 1도 안 간다. '고운의 세포들'이 있다면 소리 세포 같은 애는 가장 쩌리일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애인과 구태여 헤어질 필요가 무에 있었겠냐고 물을 만도 하다. 맞다. 왜 그게 불편했는지 지금부터 합리화 겸 자아성찰을 해보려고.  

   

 무음형 인간(=나)은 알람이 어떤 형태를 지녔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소리가 크고 작은지, 긴지 짧은지, 진동이 두두—두두—하든지 두두두두두! 하든지 말든지. 

다만, 원할 때 알람을 인식하고 싶어한다. 빨간 숫자가 늘어가도 처리 가능할 때 메일을 확인하고 답하고 싶은 거지. 말했듯, 고요를 즐거이 부리는 일.


 그렇게 고요를 즐기다 보면, 볼록하게 알람으로 해두고 싶은 것들이 슬며시 떠오른다. 누구누구의 카톡 연락, 에세이드라이브 메일, 어떤 등산 일정, 귀한 추억이었던 ▢년 전 페북 게시글 같은 거.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 볼록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들이 떠오를 때까지’ 고요를 즐긴다고 말하는 게 좀더 적절하겠다.     


 일상에 소음이 즐비하니까 말이다.

 직장에선 쉴 새없이 메신저 알람과 전화가 나를 찾고, 동의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왓챠는 좋아하는 배우의 영화가 떴다고 알려오고, 토스는 재난지원금으로 할 수 있는 투자를 알려온다. 재난문자는 강남에 가면 강남 어디 술집, 일산에 가면 일산 어디 식당에 가지 말라고 꼭 세 번씩 야단이다. 읽을 계획 없었지만 팔로우한 페이지에 뜬 책 소개, 입을 생각 없었지만 보자마자 이미 입고 있었어야만 했을 것 같은 위기감을 주는 옷 광고도 소음이다. 직장 메신저 속 메시지 하나씩 쳐내다 보면 중간중간 낀 부고가–누군가의 귀한 생이 이만 다했음을 알리는 일마저- 소음처럼 느껴질 만큼, 내게 입력되고 싶어하는 것들로 가득차는 하루하루가 쌓이는 건 꽤 고단한 일이니까 말이다.


 내 속에서 한껏 알람으로 울려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갈수록 선명해져 간다. 반대로 무음 처리하고 싶은 존재들도 뚜렷해져 간다. 취향이나 성격이 지어지는 중이라고 선해해주면 고맙겠으나,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고집이 느는 쪽에 가깝다. 그래도, 사는 데에 중하다고 판단한 것들로 속시끄러워지는 게 낫다. 그 고집을 접고 둥글어지려 애쓰는 대신, 고집의 기준을 치우침 없이 엄정하게 세워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편이 좋겠다고, 속을 고요히 비운 채로 다짐해 보는 밤이다.





* 표지에 ATELIER CECILIA ROSSLEE 의 그림을 썼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