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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Apr 17. 2020

내 생각의 좌표는 내 사람들이 찍어나가는 일일지도 몰라

혼자서도 끄적끄적 쓰다


2010년 발령 첫해에 체육 전담이었다고 얘기했던가? 그땐 전담실이 있어서 영어음악체육 등 전담교사들끼리 모여 있었다. 학년 안에서 소속감 갖기 어려운 전담으로 교사생활을 시작하면 물어볼 데도 없고 정 붙일 데도 없어 두 배로 힘들다는데, 나는 그때 일고여덟 식구들 복작복작해서 참 행운이었다. 사람 복 타고난 편!


전담실 식구 중에, 유쾌하고 명랑하면서도 늘 진심이고 불의에 맞서는(?) 띠동갑 동료 S쌤은 내게 큰 정신적 지지자가 되어주셨더랬다. 고민이나 어려움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응원해주셨다. 생리휴가도, 전담교사 처우개선도,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학교문화도 S쌤 손을 탔다. 그를 멋지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런 S쌤이 어느날 볕 드는 전담실에서 책을 하나 건넸다. 읽었는데 참 좋아서 내게 빌려주고 싶다고. 대학 때는 책 선물하고 빌려주고 하는 거 많이 안 했었는데, 이때 이후로 나는 마음이 가는 사람들에게 책을 나누자고 하는 것 같기도.



암튼 그때 그 책이 홍세화 씨의 <생각의 좌표>. 내 생각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성찰에 게을러지지 말라. 폭넓은 독서, 열린 자세의 토론, 직접 견문, 성찰을 경험케 하는 교육을 하라. 무조건 믿어버릇 하지 말고 의문을 품으라. 스물네 살짜리 신규교사에게 으르신이 조곤조곤 건네는 조언들이 고마웠다. 오랜만에 슥 펼쳐보니 뭐, 아마 지금 읽으면 동의하지 못할 내용들이 좀더 늘었을 법하다만.






그런 홍세화 쌤과 저녁 먹을 기회가 생겨 S쌤을 초대했다. 홍세화 쌤은 귀가 깊고, 자신을 낮추는 소탈함이 우아한 분이셨다. S쌤은 아이처럼 좋아하며 최근 책 <결>도 챙겨와 싸인 받았다. 쫌 귀여웠다.

합정과 홍대 사이 오랜 역사를 지닌 공간 '두리반'. 만두전골과 감자전 파전이 일품이다.

팬이라며 호들갑 떤 술자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실 홍세화 쌤이 중요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했다. 여전히 용감하고, 자신에겐 엄격하고 타인에겐 솔직하며, 아이 셋 키우면서도 십 년 가까이 목요일마다 책 토론 모임을 하는 이 분 곁에 나는 오래 머물고 싶다.


아 딴 얘긴데, 이날 함께했던 한겨레 안영춘 기자를 경험(?)하는 일이 참 신선했다. 70대 노 교수님과의 술자리에 딸을 부르는 것도, 딸이 온 것도. 딸들을 신소원, 신소투(신비한 소녀 원투)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도. 딸이 아버지를 영춘~ 하고 부르는 것도, 그 친구가 참 진솔한 언어를 쓰던 것도, 친구들과 <아무튼, 비건>을 읽고 채식을 시작한 것도. 딸을 애 대하듯 하지 않고 오랜 친구와 인생과 정치와 사랑과 낭만에 대해 열띠게 나누려던 태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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