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재와 에세이 드라이브 4기에서 쓰다 / 키워드: 소유자
인생 33년 하고도 4개월이나 사는 중인데 그래서 뭘 갖고 있냐고 하면 1억 전세빚과 반려묘들만 있는 빈털터리라, 뭘 갖고 싶은지에 대해서나 허랑방탕하게 시일컷 써볼까 한다. 아따 짜잘하게 맥북, 명품백, 차 그런 거 늘어놓는 짓 안 한다. 자고로 꿈은 크게 꾸랬다. 어차피 꿈이다. 나는 용인의 한 양지 바른 땅에다가 지은 지하 1층 지상 3층 짜리 마당 딸린 땅콩집을 갖고 싶(었)다!
읽으면서 집을 함께 상상해 주시라. 읽다 보면, 꿔본 적 없어도 내 꿈이 마치 당신의 오랜 꿈처럼 느껴질 확률이 높으니.
뽐뿌는 2011년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꺼내 읽은 한 권의 책으로부터 시작됐다. 건축가 이현욱 씨와 지금은 고인이 된 구본준 건축전문기자가 쓴 <두 남자의 집 짓기>는 3억으로 땅콩집을 지은 과정을 담고 있다. 마당을 함께 쓰는, 독립적이면서도 조화로운 두 집. 주거 공간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삶의 방향과 깊이, 그리고 관계에 대한 두 저자의 생각과 닿아 있었다. 스물다섯의 내게 ‘네 인생 전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묻는 인생선배 같은 책이었다. 설렜고 감동받았다. 유온리리브원스 그런 말이 유행하기 전부터 이미 졸라 오늘만 살던 나는 처음으로 10년, 30년 뒤를 상상했다. 곧장 솔에게 고했다.
“솔아! 딱 1.5억만 모아 와! 나랑 살자.”
구구절절 내 얘기를 듣는 동안 ‘뭔 개소린가’ 했을 테지만 솔이는 내 얘기를 허투루 들어넘기지 않는다. 대체로 심드렁하지만 온기 묻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한다.
“재밌겠네. 그러지 뭐.”
되네 안 되네를 떠나서 '(일단)그렇게 하자’고 말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행복한 철없는 인간은 마냥 신이 나서 밥을 먹다, 기차 여행을 다니다, 술을 마시다가 종종 떠들어대곤 했다. 뜨문뜨문 한 10여 년을. 지하에는 당구대와 와인바를 두자. 마당에 도랑까진 힘들겠지만 작은 나무를 하나 심자. 과일수는 해충이 기승을 부릴 테니까 향이 적은 꽃나무로. 2층은 공동 공간으로 설계해서 저녁을 함께 해서 먹자. TV는 두지 말고 길고 긴 테이블을 놓고 가끔 같이 일하고 책을 읽자. 아, 넌 TV 너무 좋아해서 안 되지. 그럼 네 집엔 TV, 내 집엔 큰 나무 탁상을 놓지 뭐.
늘푸른 바위 같아서 열 번 호들갑 떨면 한 번 리액숀 해 줄까 말까 한 솔도 이 허무맹랑한듸 쓸데없이 구체적인 꿈만은 맘에 들었는지 가끔 먼저 언급하곤 했다. 이를 테면, 15년간 여행을 함께 하면서 둘이 동시에 가장 맘에 들어했던 프라하의 MH호텔에서 느즈막한 아침에 겨우 깨서 햇살에 바삭해진 이불 냄새를 한참 누리다가.
“이런 데라면 아담해도 괜찮을 것 같아, 우리 땅콩집. 이런 기분이겠지? 그 집에서 사는 게."
아힝,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난 그만 프로포즈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럼 마치 처음 얘기하는 양, 또 똑같은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참 상상의 집을 짓는다. 땅콩집에서 너랑 마당에서 고양이 같이 키우고, 테라스에서 모닝커피 마시고, 주말이면 청소 같이 하고, 밤엔 파스타랑 전복버터구이 해서 와인바에서 술 한잔 하고, 각자 침실서 나와서 테이블에 앉어 책 읽고 일하고, 우리가 함께 아는 친구들을 매주 그룹별로 초대해서 파티하고 그리고….
그래서, 십 년 사이 꿈이 얼마나 실현됐냐고? 글쎄 그런 게 뭐 중요한가? 원래 물욕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진짜로 그 물건이 갖고 싶다기보다는 그 물건에서 퐁퐁 솟아나는 예정된 기쁨이 갖고 싶은 거잖아. 돈이 부족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맞긴 한데).
그니까 내가 정말 갖고 싶은 그 기쁨은, 사실 3억(이젠 3억으론 택도 없지만)으로 짓는 땅콩집 따위가 아닌 거다. 십오 년간 솔이와 전주에서 청산도로, 영덕에서 포항으로, 서산에서 군산으로, 순천에서 장흥으로, 바르셀로나에서 포르투로, 방비엥에서 루앙프라방으로, 프라하에서 비엔나로 쏘다닌 시간을 더 풍미있게 우리 기억에 오래 담는 일이다. 땅콩집 얘기를 주고 받는 시간 동안 우리는 인생에 대한 우리의 같고 다른 관점들을 조율해가며 서로에게 기대어왔다.
일주일 내내 내일로 여행하는 동안 초성게임만 해도 재밌다. 분당 1회 시발을 반복하며 추위와 싸우고 마늘도넛 하나씩 노나 먹은 맛을 간직한다. 사운드오브뮤직이나 취화선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을 그 명소에서 흉내내며 자지러지게 웃던 순간이 몸에 사진처럼 새겨져 있다. 각자의 글을 낭독하고 들어주다가, 질질 짜다가, 다시 똥꼬에 털나게 웃는 시간도 소중했다.
우리가 함께 정답고 꼴사나웠던 순간들이 앞으로도 영영 기약 없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히 갖고 싶은 바로 그 '예정된 기쁨'이다. 그 마음을 비슷한 무게로 우리가 같이 고파한다는 확신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돈 드는 건 아니지만 그걸 가진 나는 테슬라를 소유한 놈이든 화성에 먼저 갈 놈이든 부러워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솔이가 내 친구인 한, 나는 누가 뭘 가졌건 크게 시샘할 필요가 없다.
갖고 싶지 우릐소릐? 느그 집엔 솔이 없제?
* 표지에 packrat Anne의 그림을 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