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재와 에세이드라이브 4기에서 쓰다 / 키워드: 안경
친구는 나에게 좌빨이라 놀리고 나는 친구를 꼴페미라 놀리던 시절이 있었더랬다. 대충 2013년쯤. 그는 내 친구 중에 제일 참신하고 엉뚱하며 야한 얘기를 웃기게 잘하는 애라서 내가 저장해둔 이름이 “더럽지만 귀여운 티티”다. 그런 그가 여성 이슈만 나오면 정색 빨고 화를 내곤 하는 게 의아했다. 왜 저렇게 사사건건 불편한지 알 수가 없었다.
티티는 3개월 만난 남자가 아이브로우 컬러 바꾼 것도 알아채고 콕 집어 예쁘다 칭찬한다며 퉁퉁거렸다. 무심한 것보다 좋은 거 아닌가? 했더니, 처음엔 세심해서 좋았지만 원래 꾸미는 걸 좋아하지 않는 제가 화장을 꼼꼼히 해야할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고 싫댔다. 뭘 신경 써, 그냥 안 하면 되잖아?!
그 남자랑 마지막으로 싸웠던 이유는 명절 때문이었다. 설에는 시가 먼저, 추석에는 처가 먼저 가자고 했다가 남자가 ‘그건 아니지’ 하니까 화가 났다고 씩씩거렸다. 뭐 그의 대응이 좀 구리긴 하지만, 결혼 준비중인 것도 아니었으면서! 미리부터 화내다가 어렵게 시작한 연애를 끝내고 그래. 별 게 다 싸움거리다. 저런 얘기 하면 그 남자 아니라도 많은 남자들이 싫어할 텐데...
그가 했던 말 중 기억에 남는 건 또 있다.
“음모론에 가깝긴 하지만 이런 얘기도 있어. 돌봄이나 가사노동도 사실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잖아? 그런데 그 가치를 계속 깎아내리면서 집집마다 우리 엄마들이 무임금으로 하길 바란 거지 모두가. 아이를 기르는 것도, 24시간 끝나지 않는 집안일도, 치매노인을 보살피는 것도. 이걸 복지의 영역으로 넘겨서 국가가 챙겨주자면 비용이 어마어마하니까!”
‘그래 얘, 그건 음모론 같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리있는 말이라 여기게 되는 구석들이 있었고, 나는 그 생각들을 열심히도 부정했다. 티티의 말이 다 맞다고 생각하면 내가 생활하기 너무 불편해지니까. 프로불편러라는 용어는 티티를 칭하기 위해 생겼다고 생각될 만큼 깐깐한 순간들 앞에 선 당시의 나는 ‘좋게좋게주의자’였기 때문에, 가끔 그와 이야기 나누는 게 거북했다.
내 주변엔 이런 이야길 하는 게 티티 뿐이었다. 극소수. 그래서 그 의견에 동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겁이 났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내가 티티를 거북해하듯 내 친구들도 나를 거북해하지는 않을까. 내 애인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런 두려움은 6년이 지난 지금도 있다. n번방 사건 관련 청원을 단톡방에 보낼 때, 가까운 친구들에게 화제로 던져볼 때, 인스타 스토리에 공유할 때마다 나는 혹시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누군가가 ‘이런 거 관심 없어. 우리한테 얘기한다고 달라지는 게 아닌데 꼭 여기다 얘기해야겠어? 너무 과해.’라고 할까봐 긴장하게 된다. 어디 그뿐이겠나.
티티를 불편해하다하다 실제로 일상이 아주 편치 않아졌다. 괴로웠다. 애인과 침대에 있어 행복해야 할 순간에도 혹시 몰카가 있진 않나 일말의 걱정이 드는 게, ‘넌 다른 여자들이랑 달라’ 같은 말에 기분이 좋지 않고 움찔하게 되는 게, 몸이 아파도 엄마가 매달 시댁에 가서 일하는 게, 연애에 관심 없다는 친구에게 던지는 '얘 게이네’ 농담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게. 티티는 내게 안경이 되어버렸던 셈. 적당히 모른 체할 수 있었던 장면들을 상세하고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된 탓에, 딛는 걸음들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보고 김학의 사건을, 한샘 사건을, 웹하드 카르텔을, n번방 사건을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냐, 티티랑 이런 이야기 대신 농담 따먹기하던 대학 때로, 흐릿하게 눈 먼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NAVER! 젠더감수성이라는 안경을 쓰고 불편해진 만큼, 그럼으로써 지키게 된 것들도 있다. 안경은 눈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니까. 학생들에게 외모로 상처주는 농담을 하지 않게 됐고(장담할 순 없다 간간이 해놓고 인식 못하는 것일 지도), 타인의 평가에 좀 덜 휘둘리며 편안해졌다. 무신경하고 아픈 말들 대신 다정하고 따뜻한 말에 둘러싸여 지내게 됐고, 실제로 절망 속에 있는 누군가를 구해내기도 했고, 세상은 더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전보다 더 강하게 갖게 됐다.
딴 건 다 알겠는데 마지막 문장은 잘 이해가 안 된다고?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대통령이 ‘운영자에 국한하지 말고 n번방 회원 전원에 대해 조사해 근절책 마련하라, 피해자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전에 없던 일이다. 위기는 언제나 힘겹지만 곧 기회이기도 하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은 이런 데서 온다. 최초 보도 후 5개월 여 시간 동안 지나치게 조용했던 세상에서 이 작은 목소리들이 모여 청원 200만을 넘어 대통령에게 닿을 만큼 떠들썩해진 건, 사랑하는 이를 아끼는 마음으로 열심히 불편함을 일으키고 생각을 나누고 의견을 모았던 수많은 티티들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티티는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꼈으며 그렇기에 내게 끊임없이 이슈를 나누고 질문했었다는 걸, 상처내기 위해 들쑤시는 게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해 꼭 끌어안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야 깨닫게 됐다. 이제 나는 또다른 나를 만나기를 기다려본다. 내가 누군가의 티티가 되기를 소망한다. 공유한 기사가 거북해서 나를 안 보게 되더라도, 시간이 한참 지나, 그러니까 나처럼 한 5년쯤 지나고 나서 ‘그때 고운이가 했던 말이 이런 거였구나.’하고 생각하는 순간이 내 소중한 사람에게 찾아오기를.
덧. 나의 안경 티티는 수많은 실망과 절망을 거듭하면서도 영영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이를 찾아내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용기있는 녀성이었다. 산책 데이트를 좋아해 만나면 늘 걸으면서 여자친구가 치마에 힐 신기를 바라던 사람과, 고분고분하게 생겨서 왜 그렇게 자기 할 말 다 하냐던 사람과, 자기 큰 거(?) 믿고 아무 노력(애무라든가) 안 하는 사람을 지나, 결국 저만큼이나 귀엽고 <맨박스>나 <82년생 김지영>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이를 만나 아이를 낳고 열심히 지지고 볶으며 잘 살고 있다.
* 표지에 keneshasneedd의 그림을 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