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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Mar 16. 2020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태재와 에세이 드라이브 4기에서 쓰다 / 키워드: 간판

       

 “순 한글이면 좋겠어. 아냐, 스페인어도 괜찮을 거 같아.”  

   

 우리 단체의 이름을 정하는 중이었다. ‘초등교사들끼리 모여 젠더감수성 길러주는 교육 잘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모임’에 예쁘고 의미있는 이름을 지어보려고 일주일 넘게 헛다리를 짚었다. 트레바리, 이브, 트래블코드, 헤이조이스, 아웃스탠딩, 빌라선샤인... 직관적이고 의미도 잘 담아낸, 너~무 잘 지은 단체 이름들이 주변에 차고 넘쳤다. 후보에 이름을 하나씩 올릴 때마다 ‘우리도 이름 잘~ 지었다는 소리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자랐다. 그러니 무엇도 성에 차지 않았다. 아니, 허황된 욕망이 진짜 해야 할 결정을 방해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오래도록 질질 끌고 있으니 친구 윤은 이렇게 조언하기도 했다.

“이름이 예쁜 건 중요하지만 이름에 의미가 담겨 있을 필요는 없어요. 네이버 존나 아무 뜻도 아니잖아요. 애플, 구글도 봐요."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욕심이 났다. 입에 착 감기게, 세련되게, 맥시멈 네 글자, 바로 url도 만들 수 있는. 갈수록 조건만 늘어났다.   

  

 그렇게 탐욕을 부리니, 머릿속에서 산뜻하게 좋은 생각이 날 리가 있나. 뭐가 좋은 이름인지, 왜 좋은지, 잘 들리는지, 잘 전해지는지 판단하지 못하고 이름들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결국 이 욕심쟁이는 아무것도 성공시키지 못했고, 똘똘한 멤버 진이 의견을 냈다.

 “아웃박스 어때? Outside of the box의 줄임말이야. ‘고정관념을 깨다!’ 로고에는 열려있는 박스를 넣는 거지.”

 우리는 모두 기립박수를 쳤다. 마음에 쏙 들었다. 블로그나 sns에도, 신문기사를 낼 때도 이 간판을 널리널리 알리려고 열심히 홍보했다. 우리가, 이런 단체가 여기 있다고 어필하고 싶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럴 듯한 간판이 아니었다. 소문난 맛집에 가서 식사할 때 느끼는 은근한 실망감이 누구에게나 있을 터다. 그리고 실망한 집은 아무리 이름과 인테리어가 쌔끈해도, 아무리 인스타 #갬성맛집이어도 다시 가진 않게 되지 않나.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름값을 하는 게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아웃박스 간판 달고 두 해를 일해오면서 배우고 있다.     


 사람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 넘쳐 흐르는 이름들의 세계에서 잘못하면 손가락질 받고, 실수하면 외면당하고, 소홀하면 잊힌다. 가끔 우리 이름을 향한 욕설에 멤버 개인들이 상처받을 때면 푹푹 속이 상하지만, 역시 가장 두려운 건 잊히는 일이다. 이름값 못한다는 피드백을 받을 때면 이대로 제껴지다 잊혀질까 두렵다. 어렵사리 정한 우리 이름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서 분발하게 된다. 그러니까, 간판을 내걸 때에는 간판이 얼마나 예쁘고 반듯하게 걸렸나가 아니라 이 간판에 책임질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어떤 책임을 지고 있냐고 묻는다면, 요즘 애쓰고 있는 건 우리에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주었던 상대와 관계회복을 해내는 일이다.  인생의 진리는 존버라 했고, 다행히 지구력엔 자신 있다. 우연한 듯 (하지만 치밀하게 후후) 다시 한 번 작업을 함께 하고, 최선을 다해 일을 완수한다. ‘내가 아웃박스를 오해하고 있었구나.’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재평가를 받을 때 가장 기쁘다. 물론 재평가를 받을 기회 자체가 많지 않다. 한 번뿐일 기회에 후회하지 않으려고 메일 한 번 주고받을 때에도, 작은 프로젝트를 할 때도 공을 들인다.


 이젠 이름 잘 지었다, 너희가 지향하는 바가 멋지다 보다 이런 피드백을 듣고 싶다.

 “저 팀 실속있어. 자료가 쓸 만해. 덕분에 ~가 바뀌었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목표가 간지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해내는 일들이 유효한 단체로, 이름값은 하는 애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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