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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Dec 07. 2022

누구에게나 최악의 교사는 있다 1

그 최악의 교사를 9년 후, 교장실에서 조우하다

<일러두기>

본 글은 1편과 2편으로 나눠지며, 이 글은 그중 1편입니다.




대학교 4학년 때,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집단에서든 처음 방문한 손님은 제일 먼저 그 집단의 장(將)을 만나게 된다. 그 법칙에 어긋남 없이, 나를 포함해 실습을 나온 4명의 교생들은 첫날 학교에 출근하자마자 교장선생님을 만나 뵈러 교장실로 갔는데, 교장선생님이 갑자기 외부행사가 생겨서 다음날 보는 것으로 일정이 미뤄졌다.


실습 첫날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둘째 날이 되었다. 출근하자마자 1교시가 시작되기도 전에 교감선생님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지금 교장실을 가야 한다며 우리들을 인솔했다. 그런데 급히 서둘러 간 교장실은 텅 비어있었다. 교감선생님은 멋쩍게 웃으며 교장선생님이 조금 늦으신다며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덩달아 바빠졌던 마음을 행정실 직원분이 타 준 차 한 잔을 홀짝이면서 한숨 돌리고 나니, 그제야 교장실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하게 줄 맞춰서 선반에 올려져 있는 난 화분 몇 개,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배치되어있는 육중한 원목 책상, 드라마에서 나오는 회사 중역 방에 있을 법한 낮고 짙은 가죽의 1인용 소파들. 전형적인 장(將)의 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중학생일 때는 교장실을 들어와 봤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 기억들을 더듬어보니 졸업앨범에 들어갈 사진을 찍는다고 컨셉사진을 찍으러 왔을 때가 마지막으로 교장실에 들어왔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외에는 심부름한다고 잠깐 왔었는데 내 기억 속 교장실은 늘 비어져있었다. 3년 동안 중학교를 다닐 때는 한두 번 올까 말까 했던 곳을 2주 교생실습을 나온 동안은 연달아서 이렇게 두 번씩이나 오게 되다니, 느낌이 참 묘했다. 한편으론 왜 교장실은 항상 낯선 곳이어야 할까? 좀 더 친근해질 수는 없는 걸까? 이런 엉뚱한 생각도 퉁탕거렸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던 찰나, 교장선생님이 들어왔다. 곱게 화장한 얼굴에 투피스를 입고 검은 단발머리를 한 그 교사는,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나의 모교의 교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교문 앞에 "000 교장선생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라는 내용의 거대한 현수막이 대문짝하게 붙여져 있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게 최악이었던 교사를 9년 후, 교장실에서 조우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10대 시절, 누구에게나 최악의 교사는 있지 않은가. 나에게도 최악의 교사는 있다. 누구보다도 학교를 좋아하고 대부분의 교사들과 원만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던 나에게도. 초등학생 때 방학만 되면 빨리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서 개학하기를 기다렸던 아이였던 것과는 별개로.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으니까, 그 처음부터 시작해보겠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초등학교 7학년이라고도 불리는 나이 때의 아이들은 처음으로 선생님이 없는 교실을 신기해하며, 또 각 과목마다 다른 선생님이 들어와 수업을 하는 시스템을 혼란스러움과 경이로움의 눈으로 쳐다보며 각자의 방식대로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6교시까지가 시간표라는 세상의 끝인 줄 알았는데 7교시라는 새로운 세상이 추가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보는 과목명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도 모두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중에서 시간표에 쓰여 있는 '정보'라는 두 글자. 초등학교 때는 없었던 과목명의 등장에 아이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컴퓨터 수업일 거란 다수의견, 세상에 있는 정보들을 분류하고 추리하는 수업을 통해 논리력을 높이는 수업일 거란 소수의견,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정보를 잘 처리할 수 있도록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단련을 하는 수업일 거라는, 뇌호흡 학원을 다니고 있던 친구의 더 소수의견 등 별의별 추측들이 난무했다.


그렇게 정보 수업 시간이 되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어느새 15분이 지났다. 선생님이 수업 있는 걸 까먹었나, 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면서 슬슬 교무실에 가봐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즈음, 교실 앞문이 열렸다. 문 앞엔 검은 머리 사이로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있는 깡마른 여자어른이 서있었다. 나이대는 50대 중후반 정도 되었을까. 이대로 수업을 안 하고 자유시간인가 싶어 기대하고 있었던 아이들의 얼굴엔 순식간에 실망감이 번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여자어른은 약간 화가 난 듯 보였다.


"1-6반, 지금 정보 시간 아니야?"

"맞는데요?"

"근데 왜 교실에 있어?"

"...그럼 어디에 있어야 하는데요?"

"(어이없다는 듯) 정보실에 와야지."


일순간 정적.


내가 물었다.

"정보실이 어디 있는데요?"

"어디 있는지 몰라?"

"어... 네."

그러자 이 여자어른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르면 반장이 교무실에 와서 물었어야지.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알려줘야 해?



아. 몰랐다. 어제 있었던 체육시간에는 체육교사가 교실로 와서 체육관으로 인솔해갔기에... 오늘 1교시에 있었던 음악시간에도 음악교사가 교실로 와서 음악실로 다같이 올라갔기에... 그래도 앞선 대화를 통해 두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첫째는, 이 여자어른이 한 학기 동안 싫든 좋든 함께 수업해야 할 정보교사라는 것. 둘째는, 특별실이 따로 있는 것으로 보아 '정보'가 '컴퓨터'를 뜻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것. 교무실이 2층에 있는지 3층에 있는지도 헷갈리는 입학 2일차에, 반장이란 사람이었던 나는 미리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 가서 누군지도 모를 정보 교사를 찾아 빌어먹을 정보실이 어디 있는지 '정보'를 획득했어야 했다. 분명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난 초등학생이었는데... 나라는 사람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중학생 취급을 당하니 조금 서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중학생의 삶, 쉽지 않겠구나. 하, 인생...'


그렇게 시작부터 삐걱댔던 우리 1-6반은 수업에서도 삐걱댔다. 물론 이건 1학년 전체가 마찬가지였지만. 정보 수업에서 한 학기 동안 우리에게 던져진 과업은 프로그래밍 언어 중 하나인 'C언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사(Ctrl+C) 붙여 넣기(Ctrl+V)는커녕 한글타자가 50타도 나오지 않는 학생들이 절반 이상이었던 상황에서 갑자기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려니 과부하도 이런 과부하가 없었다. 정보교사는 정보교사대로 답답해했고,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 못해 짜증내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운영하는 방과 후 컴퓨터교실을 다녔던 나는 어느 정도 컴퓨터에 대한 지식과 친밀감은 있는 상태였고, C언어는 처음 접했지만 그럭저럭 따라갈 만은 했다. 그 때문에 정보 도우미로 뽑혀 정작 내가 실습할 시간보다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는 친구들을 도와주느라 더 분주하게 돌아다녀야 했지만.


어쨌든 시간은 흘러갔고 기말고사는 다가왔다. 정보 과목의 중간고사는 수행평가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20문제가 나오는 이 기말고사가 내신평가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험이었다. 학생들은 뭘 배운 게 있어야 시험을 치든 말든 하지, 라며 시험 치기 직전까지 구시렁거렸지만 어쨌든 정보 과목 기말고사 시험은 지나갔다. 바로 그때였다. 종료령이 울리고 답안지를 걷어간 후, 시험지를 파일에 꽂아 가방에 넣고 있는데 교실 한쪽에 아이들 6~7명이 모이더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답을 맞혀보나 싶어서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계속 아이들이 불어나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책상 위에 학원에서 준 예상문제와 방금 친 정보과목 시험지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그 둘을 비교해보고 있었다. 알고 보니 기말고사 20문제 중에 학원의 예상문제에서 3문제가 거의 똑같이 나온 것이었다. 정확히는, 한 문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나왔고, 두 문제는 객관식 선택지 순서만 바뀌어서 나왔다. 그 학원을 다니고 있던 학생은 전교생 중에 5명 정도 되었고, 모두 시험 치기 전에 학원에서 이 예상문제를 받았고 풀어봤다고 했다. 


마침 정보 과목이 그날 시험 중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담임선생님이 종례를 하러 교실에 오셨고, 아이들은 이 사실을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담임선생님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우리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교무실에 가서 다른 반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알아보셨고 1학년 담임선생님들끼리 긴급회의를 하셨다. 담임선생님은 다시 교실에 와서 문제사항은 확인했으니 정보 과목 선생님께 기말고사 문제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러 갈 사람은 종례 후에 교실에 남으라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교실 분위기가 확 변했다. 직접 이의제기를 하러 갈 사람이라고 하니까 아이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이라도 단체로 교무실로 몰려갈 것 같이 흥분했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교 후에 학원을 바로 가야 한다며 하나둘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반장, 부반장이 반 대표로 가는 거 어떻겠냐며 분위기를 몰아갔다. 이럴 때를 위해 반장, 부반장을 뽑은 것이 아니겠냐며. 뭐, 속으로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원래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타격은 없었다. 다만 마음이 조금 쓸쓸해졌을 뿐. 부반장은 처음엔 학원 핑계를 대며 머뭇거렸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안 가면 안 될 분위기가 되자 가겠다며 마지못해 말했다.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못... 아니 정말 믿음직스러운 부반장과 나는 담임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갔다. 가기 전에 우리 반의 자칭 타칭 소식통(?) 친구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 결과, 다른 반들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많이 분노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의협심이 넘치는 한 학생은 이 사건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하려는 담임선생님과 싸우고 있다고도 했다. 오케이. 여론이 끓고 있으니 다른 반에서도 이의제기를 하러 상당수가 오겠군. 혹여 예상과 다르더라도, 최소한 각반 반장 부반장들은 올 테니 우리의 이의제기에 충분히 힘은 실릴 수 있겠다 싶었다.


엥. 근데 이게 웬걸? 교무실에 가니 나와 부반장밖에 없었다. 각 반 담임선생님들께 물어보니 이의제기를 하러 오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아니, 싸우고 있다며...? 분노하고 있다며...? 그래도 혹시나 싶어 10분 정도를 더 기다렸는데, 끝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 순간 배신당한 것도 아니지만 배신당한 듯한 저릿한 감정의 무언가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역시 여론을 믿어선 안됐다... 


그렇게 비릿한 절망감을 느끼며 담임선생님을 따라 정보 교사의 자리로 이동했다. 교무실 제일 안쪽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 자리였다. 


"저, 선생님."


담임선생님의 부름에 정보 교사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아까 말씀드렸던, 시험문제에 이의 제기하러 온 학생들입니다."

"아, 네네."


정오의 햇살에 빛나는 그의 눈은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 글은 2편에서 계속됩니다.>


                                     누구에게나 최악의 교사는 있다 2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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