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에는 여전히 존경받아 마땅한 스승들이 존재한다.
<일러두기>
본 글은 1편과 2편으로 나눠지며, 이 글은 그중 2편입니다.
<1편> 누구에게나 최악의 교사는 있다 1 (brunch.co.kr)
내가 친구에게서 빌린 학원의 예상문제와 정보 과목 기말고사 시험지를 내밀며 보여주자 정보 교사는 보지도 않고 자기도 확인했다면서 본론을 말하라고 했다. 학원의 예상문제 중 3문제가 시험문제로 거의 똑같이 나왔는데 이건 사전에 문제가 유출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전교생 중에 5명이 이 학원을 다니고 있다는데 다 풀어봤다고 했고, 그럼 이 시험은 공정한 게 아니었다고.
그러자 정보 교사는 처음엔 회피를 했다. 자신이 직접 시험문제를 만들었는데 예상문제가 똑같은 게 있었는 걸 어떡하냐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예상문제를 다 확인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 않느냐면서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그래서 내가, 백번 양보해서 우연의 일치로 한 문제 정도는 그럴 수 있다 쳐도, 3문제가 이렇게 똑같이 나오는 건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했다. 심지어 한 문제는 <보기>에 사진이 있었는데 그 사진까지 똑같이 나오는 건 확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서로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우리반 부반장이 "저..." 하면서 대화를 비집고 들어왔다. 구원투수가 드디어 등판하는 구나, 기대를 담아 부반장을 쳐다봤다.
전 학원 갈 시간이 다 돼서 가봐야 할 거 같은데요...
마음이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학원 갈 시간이 다 됐다는데... 가봐야지...
그렇게 부반장이 떠난 다음엔 회유로 넘어갔다. 성적 처리된 거 보니까 넌 2개밖에 안 틀렸던데 그러면 최상위권이라고(OMR 채점이라 그 사이에 시험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굳이 이렇게 이의 제기를 할 이유가 없지 않냐고 그랬다. 공부도 잘하는 애가 왜 일을 어렵게 만드냐고. 이 말이 난 더 화가 났다. 너만 시험 잘 보면 끝이라는 그 논리가.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어떻든 상관없다는 그 태도가. 시험문제의 공정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 교사는 자꾸 논점을 흐리며 어떻게든 이 일을 덮으려 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갑론을박이 계속 이어졌는데, 교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나와 정보교사의 말소리만이 나른한 오후의 공기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책상 칸막이 너머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지만 학생과 교사가 격돌하는, 보기 드문 흥미로운 현장으로 모든 교사들이 귀를 쫑긋하며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1시간이 넘어가는 동안 아무도 중재하거나 관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정보교사의 최후의 공격은 협박이었다.
"너, 계속 이러면 다시 시험 쳐야 할 텐데, 그럼 시험이 더 어려워질 거야. 이번에 시험 잘 봤는데 성적 떨어져도 괜찮겠어?"
아, 이젠 하다 하다 협박을 하는구나, 싶었다. 근데 협박을 할 거면 제대로 논리적으로 좀 하던지. 다시 시험 치면 나만 못 치나? 전교생이 다 같이 못 치겠지. 그럼 전체 평균만 낮아질 뿐 결과야 지금이랑 비슷하겠지. 비정하지만, 하위권이 갑자기 다 상위권이 되고 상위권이 다 하위권이 될 가능성은, 우리 엄마가 평생 잔소리를 안 할 가능성보다 낮을 것이기 때문에. 중학교 1학년은, 대한민국의 내신이 상대평가로 돌아간다는 것 정도는(2010년대 초였다) 다 알 나이였다.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면서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 그럼 저는 오히려 좋은데요. 이번 시험에서 2개 틀렸는데 시험 다시 치면 100점 맞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요. 전 좋아요.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1시간 넘게 대화를 했고, 대화를 끝냈고, 집까지 걸어왔고, 저녁을 먹었고, "오늘 시험은 어땠어?"라고 웃으면서 물어보는 엄마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했고, 다음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다시 학교를 갔고. 그 다음날 아침에도, 또 그 다음날 아침에도.
학교 내부 회의를 거쳐 이 일은 크게 키우지 않고 마무리하는 걸로 결정이 난 것 같았다. 대신 기말고사 이후 첫 정보 수업시간에 정보 교사는 1학년 전체 교실에 찰떡파이를 돌리고 사과 비슷한 걸 했다. 물론 한숨을 푹푹 쉬면서 사과인지 본인의 넋두리인지 모를 그런 말들을 뱉어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하나도 기억에 남는 말은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날 그 교사의 진심은 정보실에 없었다는 것이다.
내게 <중1 정보 과목 기말고사 사건>으로 기억되는 강렬하고도 저릿한 이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아, 왜 이 사람이 최악의 교사냐고? 물론 학교를 다니면서 이 사람보다 더 별로인 교사도 많았다. 수업 중에 욕설을 감탄사처럼 내뱉는 교사도 있었고, 학생의 정당한 컴플레인을 받고도 그 학생 앞에서 학부모를 욕하는 교사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이 내게 최악의 교사인 이유는, 자신의 잘못이 밝혀졌을 때 인정은커녕 상대를 협박하는 모습이 너무 멋없어 보여서. 그래서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최소한 이런 모습은 아니길 바라서.
시험문제 내는 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3문제 정도는 참고서에서 '참고'했다고 하자. 밝혀지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갈 일이었을 테고 본인 입장에서는 똥 밟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그 당시 정보교사는 교무부장이었는데, 교감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그 때문에 진급 평가에서 조그만 실수라도 생길까 봐 매우 날 선 상태였다는 게 학교에서 널리 퍼져있었던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몇십 년 교직생활을 통해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학생을 협박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교사가 학생에게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다. 사실 내가 바랐던 건, 잘못의 인정과 진심 어린 사과, 이 두 가지가 다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는 건 없었다. 그 사람의 커리어를 망치려 한 것도 아니었고 교육청에 신고? 안타깝지만 그 당시 중학생의 머리로는 거기까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공교육 선생님들의 신뢰성을 이 교사가 깎아내리고 있는 상황이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선생님들이 얼마나 수업 준비를 열심히 하는지, 학생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그 마음들이, 그 노력들이 다 보이는데 이런 교사 한 명으로 인해 그런 모든 것들이 평가절하되고 손가락질받게 된다는 게 화가 났다. 너무너무너무 슬펐다. 이 일로 얻은 게 하나 있다면, 중학교 1학년, 14살이었던 나는 이때 처음으로 어른들이 말하는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
9년이 지나 중학교에서 다시 마주했다. 그 정보 교사는 교장이 되어, 나는 사범대 졸업을 앞둔 교육실습생이 되어. 결국 교장이 됐구나, 싶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보다 인상은 훨씬 좋아 보였다. 교장은 나를 잊은 건지, 마스크를 써서 못 알아보는 건지, 아니면 안 알아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별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나 또한 굳이 과거를 들출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조신하게 있었다.
이 정보 교사, 아니 이 교장은 그때의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머릿속에서 이미 다 잊힌 과거일 수도 있다. 다만 교장까지 오는 교직생활 중에 다시는 저때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길, 학생들에게 똑같은 상처를 주지 않았길, 그때와는 조금 다르게 살아갔었길, 간절히 바랐다. 내가 교생실습을 한 그 이듬해, 교장이 된 정보 교사는 정년퇴직을 하고 학교를 떠났다.
물론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막말, 욕설, 폭행, 인신공격, 성적 조롱 등 교사의 교육권 및 인권을 침해하는 학생의 행위는 어떠한 변명도 필요 없이 학생의 잘못이다.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어김없이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다만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반면교사 하고자 함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나도 모르는 사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을 수 있으니까.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그러니 부디 이 글로 인해 상처받는 선생님들이 없으셨으면 좋겠다. 나 또한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많고 여전히 존경하며, 교생실습을 하며 학교에는 그래도 멋진 선생님들이 보석처럼 계시다는 걸 보고 안심했으니까. 공교육에는 여전히 존경받아 마땅한 스승들이 존재한다.
아, 한 가지 분명한 건, 그의 눈은 더 이상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에필로그>
이 사건이 있고 나서 며칠 뒤, 학부모 모임에 다녀온 엄마가 내게 이런 소식을 전해줬다. 정보교사가 내 자랑을 하고 다닌다고. 알고 보니, 이번 정보 기말고사가 너무 어려워서 평균이 50점이 나왔는데 학부모들이 어떻게 평균이 이렇게 낮게 나올 수 있냐며, 시험 난이도 조절이 잘못된 거 아니냐고 이의 제기를 했다고 한다. 그때 정보교사가 내 이름을 거론하면서, 이 시험에서 2개 틀린 학생도 있다며 본인은 잘 가르쳤고 시험 난이도도 적절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결국 나를 본인의 방패막으로 쓴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 사람과 나는 참, 아이러니한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