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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Dec 21. 2022

누구에게나 최고의 교사도 있다

모든 것에는 명암이 있다고,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최악의 교사도 있지만 반대로 최고의 교사도 있다. 대체로 최악의 교사가 한 번에 쏟아붓는 장대비처럼 기억된다면, 최고의 교사는 언제 젖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젖어들어가는 가랑비처럼 기억된다. 나에게 최고의 교사로 기억되는 분들은 무언가를 내 귀에 대고 "이대로 해야 해!"라고 소리치기보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내가 무언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했고 어떻게든 나를 믿어주었으며 나의 모든 개성이 생겨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 주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거나 적어도 알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10대의 내가 믿고 따랐던 분들에 대해서, 그럴만한 믿음과 확신이 생기게 했던, 내가 만났던 최고의 교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제일 먼저, 나에게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려주신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숙쌤이 있다. 이분을 만난 건 현재까지 내 인생에 있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올백머리에 빨간 안경테의 안경을 쓰고 키는 170센티미터 가까이 되었던 씩씩한 여장부 같은 선생님이셨는데, 대화할 때는 제2의 엄마처럼 느껴질 만큼 푸근하고 따뜻한 반전 매력을 가진 분이셨다.


숙쌤을 떠올릴 때면 내 기억 속에서 제일 먼저 소환되는 장면이 있다. 점심시간에 반별로 줄을 서서 급식실에 들어가면 숙쌤이 다른 선생님들과 인사하는 소리가 들린다.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애들이 그러는데 오늘 급식에 맛있는 게 나온다던데요!"라며 에너지 가득 쩌렁쩌렁하게 인사하는 건 나의 숙쌤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4학년 5반이라는 자부심을 듬뿍 느끼며 어깨를 쫙 펴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마치 어미새를 따라 뒤뚱뒤뚱 따라가던 아기새가 어미새의 기세 당당한 모습을 보고 자기도 뭐라도 된 것처럼 괜히 으스대는 것처럼.


이렇듯 당당하고 쾌활한 나의 숙쌤이 우리 반에 일 년 동안 내준 과업이 있었으니, 바로 '일기 쓰기'였다. 내가 언제부터 글 쓰는 걸 좋아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아마 이때부터이지 않을까 싶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쓰는 게 규칙이었는데 매주 월요일에 확인을 했다. 그때 각 일기마다 제일 밑에 보라색의 동글동글한 꽃모양 도장을 찍어줬었는데 날짜와 함께 '최고예요!'라는 말이 곁들여있었고, 그 옆에는 내가 일기를 꾸준히 쓰는데 크나큰 원동력이 되었던, 숙쌤이 직접 쓴 짧은 코멘트가 있었다. 대부분 내가 느꼈던 상황과 감정에 공감하거나 칭찬과 격려가 담긴 말들이었는데 그 몇 개의 단어로 조합된 한두 문장이 초4 꼬꼬마에겐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월요일 아침에 숙쌤 책상 위에 일기장을 제출할 때마다 이번엔 어떤 코멘트가 달릴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내 열정에 기름을 부었던 건, 학년 말에 1년 동안 받은 보라색 도장을 다 합산해서 많이 모은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는 숙쌤의 약속! 그렇게 나는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한치의 거짓 없이 정말, 진짜로, 매일 썼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썼다. 그냥, 썼다. 이유는 단 세 가지, 보라색 도장과 숙쌤의 코멘트, 그리고 학년 말에 준다는 선물을 받고 싶어서. 


그 당시 나에게 일기 쓰기라는 과업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느냐 하면, 하루는 발목 인대가 늘어나서 병원에 가야 했다. 전날 방과 후에 친구들과 놀다가 발목을 접질렸는데 괜찮아지겠지, 하고 무심하게 있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엄마가 숙쌤께 전화해서 상황을 말씀드리고 정형외과부터 가야겠다고 말했는데, 그날은 일주일에 한 번 일기를 제출하는 월요일이었다. 나는 일기를 제출해야 한다며 엄마를 조르고 졸라 엄마 등에 업혀서 굳이 굳이 학교에 갔다. 그날은 보라색 도장이 탐이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한 주도 빠짐없이 써주는 선생님의 코멘트가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 제출하는 일기에서 이번주는 아무런 코멘트도 받지 못할까 봐 그게 걱정되고 슬펐다.


교실 앞문을 여니 숙쌤이 놀란 얼굴로 뛰어나오셨는데 나와 엄마를 보더니, 더 정확히는 엄마 등에 업혀 일기장을 건네는 나를 보더니,


아이고, 못산다 똥강아지야. 일기는 내일 들고 와도 되는데!!


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리셨다. 엄마도 내 똥고집을 말릴 수가 없었다고 하소연하면서 숙쌤과 깔깔거리며 웃었고, 그 사이에서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엄마 등에 나무늘보처럼 매달려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누군가는 일기를 '검사'하고 교사가 '확인'을 한다는 것에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에게 일기는 일주일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학교에서 또는 학교 외의 공간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선생님과 공유하고 교감하는 일종의 연결통로 같은 거였기 때문에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어쩌면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서로 간에 신뢰가 있었기에 자연스러운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애초에 이건 들키기 위한 일기장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거부감이 크지 않았다. 


간혹 학교에 제출하는 일기장과 진짜 속마음을 적는 일기장을 따로 두는 친구도 있었는데, 그 방식도 존중하지만 난 그러진 않았다. 비밀 일기장을 따로 둘 정도로 비밀스러운 구석이 많지도 않았고 하루하루가 명확하고 단순했던 시절이었기에. 숙쌤도 학기 초에 일기 쓰기 과제 약속을 하면서, 본인만 알고 싶은 비밀스러운 내용이나 적고 싶지 않은 내용은 일기장에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애초에 매일 써야 하는 게 아니라 일주일에 세 번만 쓰는 걸로 했던 것이다. 쓰고 싶지 않은 날은 안 쓰면 되니까!


그렇게 세 가지의 완벽한 삼박자 동기부여로, 나는 발목 인대보다 일기 쓰기를, 더운 여름 나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학교까지 가야 했던 엄마의 수고로움보다 일기 쓰기를, 매일 저녁 30분씩 책상 뒤에 앉아서 꼼짝 앉고 연필을 들고 있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하고 일기 쓰기를 택했고 이 행위를 1년 동안 감행할 수 있었다. 덕분에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습관을, 글을 통해 생각을 키우고 확장할 수 있는 힘을, 무엇보다 글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귀찮아하는 태도를 가지지 않게 되었다. 어릴 때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글을 보여주는 것에 부끄러움을 많이 느끼던 아이였는데, 일기를 쓰면서 내 생각을 내면에만 꽁꽁 싸매두는 게 아니라 밖으로 표현하는 걸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누군가 내 글을 읽는 걸 즐겁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소통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올리며 나를 알아가고 타인과 소통하고 있으니, 글을 쓸 때마다 숙쌤 생각이 절로 나고 숙쌤에게 감사한 마음뿐이다.


아, 이때 썼던 일기장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데 여전히 내 보물 1호의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론,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송쌤이 있다. 내가 송쌤을 좋아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 맥락이 얽혀있는데, 일단 송쌤은 정직했다. 무더운 여름날, 수업을 하다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어떤 개념을 설명하다가였을 거다. 당시 우리 반은 8명씩 세 분단으로 자리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송쌤은 우리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를 나올 때 즈음이면 세 분단 중 첫 번째 분단은 정규직, 두 번째 분단은 비정규직, 세 번째 분단은 백수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특정 학생을 지칭한 게 아니라 비율을 뜻한 거였다. 이보다 더 정직할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송쌤의 뷰는 정직했고 애써 에둘러서 표현하려 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스물의 문턱에 있었던 그때의 우리에겐 다 잘 될 거라는 과자 상자 겉면에 적힌 허무맹랑하게 달콤한 말보단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소신 있는 진실이 더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송쌤은 다정했다. 수능을 앞두고, 너희는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수능이라는 시험이 인생에서 제일 높은 산처럼 느껴지겠지만 어른이 되고 시간이 좀 더 지나서 이때를 돌아보면, 수능이 인생에서 제일 쉬운 시험이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최소한 수능은 "정답"이 있으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정답이 없다. 선택과 그에 대한 책임과 대응만이 있을 뿐. 이 얼마나 다정한가. 12년 동안 푹신푹신한 에어백이 여기저기 설치되어있었던 학교를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는 제자들에게 할 수 있는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이. 그러면서도 곧 있을 수능에 대한 제자들의 중압감에 희망 한 스푼을 실려 보내는 그 담백한 격려가.


마지막으로 송쌤은 세심했다. 416 세월호 참사, 광복절, 한글날 등 우리가 역사적으로 기억해야 할 날이 다가오면 한 차시 수업시간 전체 혹은 절반의 시간을 할애해 그날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관련 영상을 보여주고 코멘트를 해주셨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왜 이 날을 기억하고 한 번쯤은 멈춰 서서 생각해보아야 하는지. 물론 고3이어도 예외 없다는 말과 함께. 밸런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를 챙기는 것도 좋지만 이 날들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송쌤은 역사교사가 아니었다.


항상 무채색의 옷을 입는 시크하고 멋진 쌤. 앞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에 학생들을 귀찮아하면서, 돌아서서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던 쌤. 전형적인 내유외강의 그 쌤이 바로 나의 송쌤이었다. 누군가는 팩폭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송쌤이 미래에 대한 본인의 뷰를 말해줄 때마다 현실적이어서 좋았다. 나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고 그려볼 수 있었기에. 또 환하게 웃진 않지만 수업 때마다 미묘하게 달라지던 송쌤의 입꼬리, 그 몇 미리의 움직임으로 오늘의 기분을 알아맞힐 수 있을 만큼 송쌤을 존경했다. 고3에 만나 비록 1년이라는 짧은 시간밖에 볼 수 없었지만 여전히 고등학교를 돌아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생님이다.


정직하고 다정하고 세심한 이 사람은 그냥 송쌤이 아니라 '나의' 송쌤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생님들 중 두 분만 글로 써보았다. 이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 나오는 대사처럼 마음이 '폴짝폴짝' 뛰는 것 같았다. 이 외에도 나에게 좋은 교사로 남아있는 분들은 많다. 그때의 따듯했던 기억들은 내 마음속에 훈김을 불어넣어 주며 언제까지나 살아 숨 쉴 것이다. 언젠가 “누구에게나 최고의 교사 있다”라는 제목을 달고 글 한편을 멋지게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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