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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Jan 08. 2023

풀밭을 해변으로 만드는 런던사람들

영국_런던(2019.7.6)

#유럽여행 4일차


영국 런던은 흐리고 항상 비가 오는 도시로 유명한데, 신기하게도 우리가 갔을 땐 비가 거의 안 왔다. 런던에 머무는 5일 동안 비가 온 적은, <라이언킹> 뮤지컬을 보고 나왔을 때 잠깐 비가 내린 거랑 파리로 떠나는 마지막 날 유로스타를 타러 갈 때 이슬비가 내린 것 밖에 없었다. 이 두 번의 비를 빼고는 아주 화창한 날씨가 여행하는 내내 우리를 내려다봤다. 날씨운이 참 좋았는데 그래서 영국에 대한 이미지도 지금까지 좋은 것 같다. 유럽여행을 다녀온 주변 친구들에게 어느 도시가 좋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여행하는 내내 비가 와서 런던은 별로였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데, 나는 지금도 누가 다시 여행 가고 싶은 국가가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주저 없이 '영국(런던)'일 정도니까.


어떻게 보면 좋은 날씨의 런던만 보고 와서, 진정 제대로 된 런던은 못 본 것일 수도 있고 반쪽짜리 런던만 봤을 수도 있다. 언젠가 런던의 남은 반쪽을 보게 되면 그때도 좋아할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겠다. 그래도 이미 좋은 추억들로 인해 내 마음은 기울어져 버렸기 때문에 남은 반쪽을 보게 되더라도 큰 동요는 없지 않을까. 늘 기울어져 버린 마음은 바로 세우기 쉽지 않은 법이니 말이다.


런던에 도착한 지 4일째 되는 이날은, 아침에 라이온킹 전용극장인 라이시엄 극장(Lyceum Theatre)에 가서 데이시트(dayseat)를 구매해야 했다. '데이시트(dayseat)'란 당일에 판매하는 티켓을 말한다. 매일 남는 티켓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자리가 남아있는지 모를뿐더러 당일 아침 티켓박스가 열리고 나서야 티켓을 현장구매로 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의 티켓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오픈 시간 전에 줄을 서는 것이고, 그러다가 남은 티켓이 다 팔리면 바로 티켓박스 문을 닫는다. 한마디로 그날은 공연을 못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티켓박스가 열리는 몇 시간 전에도 일찍 가서 줄을 서는 게 암묵적인 규칙처럼 되어있고, 경쟁률이 치열할 때는 3시간 전부터도 줄이 생긴다고 한다.


라이온킹 공연이 있는 라이시엄 극장은 아침 10시에 티켓박스가 열리는데 아침에 준비하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져서 8시 반이 되어서야 숙소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부랴부랴 지하철을 타고 채링크로스 역(Charing Cross)에 내려서 라이시엄 극장(Lyceum Theatre)까지 걸어가는데 혹시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어떡하지, 걱정을 하며 뛰듯이 걸어갔다. 극장 앞에 다다르니 9시 10분 정도였고 이미 30명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 남아있는 티켓 재고에 따라 구매가능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에 오늘 티켓 구매가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걱정을 하며 서 있는데, 그 와중에 줄을 서있는 사람들을 보니 4분의 3은 한국인이었다. 역시 한국사람들의 부지런함은 해외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의외다, 싶을 정도로 한국인들이 잘 안 보였었는데 런던에 여행 온 한국인은 여기 다 모여 있었네, 싶을 정도로 많이 볼 수 있어서 한국을 떠나온 지 4일밖에 안 됐지만 괜히 반가웠다.



근처 마트에서 사 온 샌드위치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먹으면서 기다리니까 어느새 우리 차례가 왔다. 다행히 우리 순서까지 와서 저녁 7시 반 공연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는데, 중간에 티켓 판매가 종료될까 봐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여야 했다. 티켓 판매원에게 남은 자리 중에서 제일 좋은 자리로 부탁한다며, 엄마의 첫 런던 여행을 좋은 기억으로 만들어주고 싶다고 나름 준비해온 멘트로 어필(?)했는데, 판매원은 안타깝게도 세 자리가 붙은 자리는 없다며 그래도 2층의 나름 보기 좋은 자리라며 각각 떨어져 있는 세 자리를 추천해 줬다. 물론 남은 자리 중에 선택해야 하는 것이고 저렴한 가격에 티켓을 구매하는 거니까 조금 아쉬웠지만 만족해야 했다. 

 

여담이지만 2층에서 본 라이온킹은 정말정말 조그마했다. 전날에 다른 공연을 1층 앞자리에서 봤는데, 그 공연의 시야와 비교가 돼서 더 그렇게 느껴진 것 같았다. 인형탈과 무대장치가 그렇게 정교하다던데 그런 세밀한 부분들은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그리고 낮에 너무 많이 돌아다닌 여파로 공연 중간에 두세 번 졸았다. 양 옆에 외국인이 앉아있었는데 조금 민망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잠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장기 여행객의 비애인 것 같다. 자리에 앉기만 하면 그렇게 잠이 쏟아질 수가 없다. 그 후로 기차나 버스나 비행기나 어떤 교통수단을 타든지 간에 착석과 동시에 5분 내로 바로 곯아떨어졌다. 끝나고 나니 엄마와 오빠도 졸았다면서 공연 내용이 기억이 잘 안 난다며 각자 기억나는 장면을 퍼즐 맞추듯이 이어 붙였다. 신기하게도 조는 중간중간 본 장면이 다 달랐다. 우리 셋은 그렇게 낄낄거리며 추적추적 비가 오기 시작하는 런던의 축축한 공기 속을 뚫고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라이온킹 하면 졸았던 기억과 엄마와 오빠와 기억의 조각을 맞추며 낄낄거렸던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시간이 흘러 돌아봤을 때 이 또한 대견한 추억이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오전에 라이온킹 티켓 구매에 성공하고 남은 시간 동안은 천천히 런던 시내의 켄싱턴 가든과 하이드 파크 등 여러 공원들을 둘러보고 노팅힐을 다녀오기로 했다. 


하이드파크에 들어서는데 방금 전까지 바쁘게 걸어 다니던 사람들과 쉼 없이 돌아가는 런던 전경과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졌다.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시원스레 흩어지는 분수의 물줄기들, 그리고 그런 풍경 뒤로 수영복을 입고 공원 풀밭에 누워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 여기저기 드러누워서 햇살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낮잠을 자는데, 참 생경한 풍경이었다. 언젠가 영화에서 본 것처럼 얼굴에 펼쳐진 책을 얹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바닷가도 아니고 공원에서. 휴양지도 아닌 도심 한복판에서. 일상적인 공간을 휴양지로 만드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해가 나온 날씨는 런던 사람들에게 소중한지 한 줌의 햇빛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기도 했다.


공원 한쪽에서는 이렇게 일광욕을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피크닉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큰 천 돗자리를 한 장 훅- 펴더니 각자 가지고 온 샌드위치, 빵, 과일, 음료 등을 꺼내서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성대하게 무언가를 준비하지 않아도 각자 가져온 소박한 음식과 이야기만으로도 그 사람들은 이미 꽉 찬 행복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버킹엄 궁전 앞의 공원에서는 울창한 나무들이 이룬 숲 아래에서 소풍 나온 유치원 아이들이 큰 돗자리를 펴고 옹기종기 모여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큰 나무들이 빽빽한 그늘을 만들어냈고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들어오는 햇빛은 황금빛으로 빛났으며, 그 아래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도시락을 다 먹은 아이들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놀았고 그 표정은 하나같이 반짝였다.


천천히 살아가는 런던 사람들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여유가 있어 보였다. 콘크리트 더미가 아닌 자연에 나와 어디든 드러눕고 햇살을 느끼고 바람을 쐬는 사람들의 모습이 빛나보였다. 물론 내가 그 사람들의 삶을 다 알지는 못한다. 오늘의 이 '풀밭을 해변으로 만드는 런던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의 삶 중 극히 일부분일 수 있다. 숨 막히게 빡빡한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딱 한 번 햇살이 나온 날에 맞춰 숨이라도 쉬려고 나온 거였을 수도 있고, 하필 그 모습을 하필 그 시간에 하필 그 길을 지나가던 내가 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유는, 이런 풍경은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오랫동안 향유해온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그냥 지나가려던 공원이었는데 여유롭게 누워있는 사람들과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자니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웠다. 혹시 몰라 한국에서 가져간 2인용 작은 돗자리가 있어서 근처에서 과일과 음료를 사 와 1시간 정도 쉬어가기로 했다. 3명이 좁은 돗자리에 쪼롬히 앉아 사과를 와삭와삭 베어 먹는데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돗자리가 좁아서 한 명씩 번갈아가며 누웠는데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과 햇살, 솔솔 부는 바람과 간간이 들려오는 영국인들의 악센트는 마음을 안정시켰고 왠지 모를 유대감마저 불러일으켰다. 자연은 이 모습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위로를 햇살과 바람과 하늘과 대지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건네는 것 같았다.


결국 다음 목적지로 가보자는 행동대장 엄마의 호통에 가까운 청유형 문장을 듣고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원에 몇 시간이고 머물 수 있을 것 같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음 목적지 노팅힐로 뚜벅뚜벅 이동했다. 다음엔 2인용 플라스틱 돗자리가 아니라 8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만한 양탄자 같은 거대한 천 돗자리를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이런 여유,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들이 나에게, 우리에게 조금 더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런던 공원에서의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마음이 급해질 때면, 이 날의 런던 공원에서의 햇살과 바람, 풀밭을 해변으로 만들며 누워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괜찮다고,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주문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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