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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Mar 02. 2023

교과서 표지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런던에서의 하루

영국-런던(7.5)

#유럽여행 3일차 (2)


늦은 점심을 먹으러 피시 앤 칩스를 먹으러 갔다. 그래도 영국에 왔는데 한 번 정도는 먹어줘야 섭섭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영국 현지의 맛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고. 나름 유명한 집을 찾아서 왔는데 피크 시간 때를 피해서 왔더니 식당은 한가했고 음식은 금방 나왔다. 피시 앤 칩스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영국음식이 워낙 맛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우리 셋 다 한 입 먹고는, "음? 생각보다 괜찮은데?"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일부러 기대치를 낮춰서 만족도를 높이는 영국인들의 고도의 전략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또 찾아서 먹고 싶은 맛은 아니었다. 한 번만 맛보면 만족스러운, 딱 그 정도였다. 생선만 두 접시 시키기엔 아쉬워서 생선 하나 치킨 하나를 시켰는데 역시 치킨에 손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다음, 버로우마켓을 갔다. 런던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식품 시장으로, 과일, 꽃, 치즈, 먹거리 등 다양한 품목을 판매하며 현지인에게도 여행객에게도 사랑받는 곳이다. 런던의 터줏대감과도 같은 시장이라고 하길래 우리나라의 광장시장이나 남대문시장과 같은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철골구조와 가게 간판 등 시장 전체 색깔을 초록색으로 통일시켜 내부 분위기가 라임처럼 상큼한 느낌이 들었고 재래시장이지만 환경이 꽤 쾌적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전통시장에서는 떡볶이, 빈대떡, 호떡, 식혜 등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K-먹거리를 파는 경우가 많은데, 버로우마켓에서는 영국에서 유래된 음식보다는 세계 각국의 음식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빠에야, 스위스의 라클렛, 태국의 팟타이, 독일의 소시지빵 등등. 영국만의 독특한 음식을 접해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다양한 세계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고, 한편으론 우리나라의 식음료 문화가 정말 발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같은 재료라도 볶고, 찌고, 삶고, 튀기고 다양한 요리법에 따라 완전히 다른 요리를 만들어내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우리 민족은 과거부터 맛있는 음식에 진심이었다는 걸, 또 내가 그런 민족의 후예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먹어도 먹어도 새로운 음식이 등장하는 것에 그렇게 눈이 휘둥그레지는 이유가 타문화권을 경험하니 훨씬 수월하게 이해가 갔다.


시장 내 호객행위가 거의 없어 찬찬히 구경하면서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를 수 있었는데, 우리는 익힌 알감자 위에 녹인 치즈를 얹어주는 스위스의 라클렛과 먹음직스러워 보였던 수제버거, 생과일주스, 갓 나온 빵 등을 먹었다. 가격이 그렇게 착한 편은 아니었지만 맛은 다들 평균이상이었다. 시장에 오면 항상 얼마 안 먹은 것 같은데 금세 배가 불러지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다. 아마도 음식뿐만 아니라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시장의 에너지를 함께 흡수해서 그렇지 않을까? 여담으로, 런던의 마트나 시장에 가보면 평범한 과일이나 채소인데도 나무바구니나 나무궤짝에 넣어둬서 그런지 시각적으로 훨씬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진열해 두는 방식의 문제인 건지 분위기의 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영국어린이는 채소와 과일을 어릴 때부터 좀 더 좋아하기 쉬울 것 같다는 소소한 상상을 혼자서 해봤다. 


버로우마켓 전경과 먹은 음식들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다시 빨간색 2층버스를 타고 피카딜리서커스(Piccadilly Circus)로 이동했다. 아침에 데이시트로 예매해 놓은 뮤지컬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서 아침의 아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는 아침 8시, 부지런하게 피카딜리서커스로 달려가고 있었다. 팔리지 않은 당일 뮤지컬 표를 파는 데이시트(dayseat)로 뮤지컬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일찍 가지 않으면 표가 다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런던에 오기 전부터 <킹키부츠(Kinky Boots)>와 <라이언킹(The Lion King)>을 보기로 정했던지라 뮤지컬 종류를 고르는 문제로 고민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피카딜리서커스에 도착하자마자 뮤지컬 <킹키부츠> 공연이 올려지는 아델피 극장(Adelphi Theatre)으로 직진했다. 생각보다 데이시트를 사려고 온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지는 않았다. 15명 정도 줄을 서 있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싱글벙글 웃으면서 아무 의심 없이 마지막 사람 뒤에 섰다. 그렇게 순조롭게 극장 안으로 들어갔고 다음 순서가 우리였다. 영어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는데, 예매하기 직전에 오빠가 벽에 붙은 어떤 포스터를 발견하고는 나에게 말했다. 


"잠깐만, 저건 킹키부츠가 아닌데?"


아뿔싸. 블로그에 나온 내용만 보고 해당 극장을 찾아갔는데 아델피 극장(Adelphi Theatre)에서 하는 뮤지컬이 <킹키부츠(Kinky Boots)>에서 <웨이트리스(Waitress)>로 바뀐 것이었다!! 엄마와 오빠에게 너무 미안했다. 내가 꼼꼼하게 확인하지 못한 바람에 원래 보기로 했던 뮤지컬이 아닌 듣도 보도 못한(당시 내 기준..) 다른 뮤지컬을 보게 될 판이었기 때문이다. 티켓부스에 있는 직원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킹키부츠가 아니냐고 물어보니까 어이없는 표정으로 "No Kinky Boots, it's Waitress."라며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가리켰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무슨 공연인지 확인도 안 하고 티켓을 사려고 했다니... 심지어 극장 위에 대문짝 하게 "WAITRESS" 글자가 박힌 포스터가 걸려있었는데, 그것도 보지 않고 무작정 줄을 섰던 것이다. 뒤에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에 직원은 우리에게 티켓을 구매할 것인지 물었다. 기다렸던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지금 다른 극장을 찾아가도 티켓판매가 다 끝났을 것 같아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이 뮤지컬을 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뮤지컬을 걱정 한가득 가지고 봤는데 어라?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무대구성도 알록달록 예쁘고, 동선도 재미있게 흘러가고, 플롯도 탄탄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수준급이었다. 나에게 좋은 작품이란, 각 인물의 입장차이가 다 이해가 되면서 하나의 정답이 없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작품인데 등장인물들이 처한 각각의 상황에서 생각할 거리도 충분했고, 뮤지컬 넘버도 공연이 다 끝나고 나서도 계속 흥얼거릴 정도로 잔향이 짙었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었는데 이렇게 발굴되는 작품에 더 큰 애정이 가게 되는 법. 한국에 돌아가서도 계속 생각날 좋은 작품을 만난 것 같아 반가웠다. 엄마와 오빠도 나름 재미있게 본 것 같아서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졌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갑자기 보게 된 작품이라 사전에 어떤 작품인지 기본적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던 데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봤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유머코드와 장면이 있어 다른 관객들이 웃을 때 같이 웃지 못한 부분이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장의 열기를 함께 느끼고 뮤지컬 넘버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과 흥겨운 어깨춤을 같이 춘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뮤지컬을 다 보고, 이제는 좀 익숙해진 빨간색 2층 버스를 타고 상쾌하게 저녁의 공기를 가르며 타워브리지로 이동했다. 빨간색 2층버스와 마찬가지로 초등학생 때부터 영어교과서 앞표지를 장식했던 다리였어서 그런지 상당히 친숙한 느낌이었다. 강가를 따라 긴 산책로가 형성되어 있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다리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기도 피크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산책로 옆으로 펼쳐진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고 돌층계에 걸터앉아 맥주 한 병씩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외식 물가가 비싸서 피크닉 문화가 발달된 건지 펍 앞에 서서, 또는 강가를 걸으며 가볍게 한 잔씩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게 익숙한 건지, 영국에서는 건물 밖 지붕 없는 하늘 아래에서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유독 많이 보였다. 시원스레 펼쳐진 강물 옆에서 사람들을 더 자유롭고 더 편안해 보였다.


3일 정도 지내면서 알게 된 영국은, 정제된 듯한 깔끔함이 매력인 국가였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말랑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딱딱하지도 않은, 딱 미디엄 웰던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거리도, 건축물도, 사람도. 무언가를 판단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일 수 있겠지만, 때론 직감이나 순간적인 인상이 더 정확하기도 한 법이니까 그냥 내 느낌을 믿어버리기로 했다.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런던의 여름밤은 깊어갔고 마지막으로 빨간색 2층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가로등 오렌지빛으로 은은하게 반짝였다.


오늘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딱 '교과서' 같았던 하루였다. 빨간색 2층 버스도, 타워브리지도, 피시 앤 칩스도 모두 있었던 영어교과서 표지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그런 하루 말이다. 예상치 못한 뮤지컬과 버로우마켓에서의 세계 음식은 덤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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