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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Feb 21. 2023

자기 짐은 스스로 챙기는 유럽아이들

영국-런던->프랑스-파리(7.7)

#유럽여행 5일차 (1)

 

이날은 영국 런던에서 프랑스 파리로 유로스타를 타고 넘어가는 날이었다. 오후 2시 22분 유로스타 예약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오전 시간이 여유로웠다. 그래서 1분 1초가 아쉬운 여행자였던 우리는 아침 조식을 먹고 숙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을 다녀오기로 했다. 며칠 동안 꽤 지나다녔다고 그새 눈에 익은 러셀 스퀘어(Russell Square)를 지나 백 년 이상은 족히 되어 보이는 가로수와 외벽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금세 박물관에 도착했다. 

 

길 모퉁이를 도니 영국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처음 본 인상은 일단 규모가 압도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전처럼 가늘고 긴 기둥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고, 육중한 무게감과 위엄이 느껴지는 건축물이었다. 또 다른 의미로 우리를 압도한 건, 건물 앞의 넓은 공간에 뱀이 똬리를 틀 듯 꼬불꼬불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언뜻 봐도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었고, 여유롭게 아침공기를 즐기며 룰루랄라 걸어온 우리는 아연실색하며 얼른 그 줄에 동참했다. 입장하는데만 1시간 반 가까이 걸렸는데 저 앞에서 큰 배낭을 메고 온 여행객이 가방 안에 든 물건 하나하나를 꺼내 보여주고 있었다. 짐검사가 엄격한가 보다 싶어 긴장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작은 가방은 간단한 확인 정도만 했다. 무사히 검사를 마치고 건물 내부에 들어가니 투명한 돔으로 된 천장이 우리를 반겼다. 햇살이 화사하게 들어와 건물 내부를 환히 밝히는데 가히 감탄할 만한 풍경이었다.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의 외관과 내부 모습

 

1759년 개관한 영국박물관은 원래는 작은 크기의 박물관이었지만, 영국이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영국 본토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전리품 및 약탈품을 수용하기 위해 현재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게 됐다고 한다. 여느 관광객들처럼 이곳에서 제일 유명하고 인기 있는 이집트관과 그리스관을 먼저 관람했는데, 처음엔 엄청난 양의 전시품들에 경이로운 마음이 들었지만 로제타스톤, 람세스 2세 흉상, 파르테논 신전에서 떼어온 부조와 유물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전시된 모습과 머리가 훼손된 수많은 조각상들을 보면서 괴기하다는 느낌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커졌다. 뭐든 본래 자리에 있을 때 가장 빛나는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냉엄한 역사적 현실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각국의 여러 유물들보다 오히려 더 인상적이었던 건, 아시아관 내에 있던 한국관이었다. 청자와 백자, 지게, 병풍 등 전통적인 작품들부터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는 설명글이 적혀있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규모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많이 작았다는 것. 그래도 수많은 국가들 사이에 한국관이 늠름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웠다.



3시간 정도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서 영국브랜드아이스크림 ‘매그넘’을 샀다. 국내에서도 판매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원조인 영국에 오면 꼭 먹어보고 싶었던 간식 중에 하나였다. 한 개에 3,400원(2019년 기준) 정도였는데, 현지라 좀 더 저렴할 줄 알았지만 영국이 물가가 비싸다 보니 국내에서 판매되는 가격과 큰 차이는 없었다. 엄마도 나도 마음 같아선 각자 하나씩 3개를 사고 싶었는데 총무였던 오빠가 예산에 무리(?)가 간다며 하나만 사자고 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어떤 돌발상황이 생길 줄 모르니까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자는 취지에서. 고작 아이스크림 두 개가 우리 재정에 얼마나 큰 타격을 줄까 싶긴 했지만 재정기획을 맡은 오빠 말에 따라주기로 했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던가. 오빠는 야금야금 전법으로 매그넘 반 이상을 먹었고 나와 엄마는 그런 오빠를 째려봤다. 오빠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기는 많이 안 먹는다면서 한 개만 사라고 해놓고는 본인이 반 이상 먹어버리는…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을 때도 그랬고 스키장에서 츄러스를 먹을 때도 그랬다. 나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절반이 넘게 없어진 팝콘과 츄러스를 들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억울해서 울면 부모님이 급하게 하나를 더 사와 나를 달랬는데 그럴 때마다 오빠는 저만치 떨어져서 딴 척을 피우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에 여행하는 동안 돈 관리한다고 고생하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 매그넘 맛은 어땠냐고? 물론 아주 훌륭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 하나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추억 얘기를 하다 보니 금방 숙소에 도착했다. 박물관을 끝으로 이제 진짜 영국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이 났다. 처음 런던 도착했을 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킹스크로스역에서 캐리어를 끌고 우왕좌왕했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떠날 때가 됐다니… 5일 동안 런던에 잘 적응해서 이제 지도를 보지 않고도 웬만한 골목은 다닐 수 있을 만큼 지리를 익혔는데 또 새로운 도시를 향해 떠나야 한다는 게 어쩐지 시원섭섭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행자에게 만남과 이별은 숙명이라 했던가. 런던과의 이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다음을 기약하며 슬기롭게 다음 행선지를 향해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5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들었던 영국 한인 민박을 떠나 우리는 유로스타를 타기 위해 세인트판크라스역으로 향했다. 다행히 숙소가 세인트판크라스역 바로 앞에 있어서 도보로 3분 거리였다.


캐리어를 끌고 나오니 비가 살짝 흩뿌렸다. 아침에 일어나 흐린 하늘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비 오는 런던을 느껴볼 수 있는 건가, 라는 약간의 기대를 가졌었는데 정말 그 기대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괜히 영국 하면 ‘비 오는 도시, 레인코트, 우산’ 이런 단어들이 연상이 되면서 비 오는 거리를 걷는 로망을 가지게 되지 않는가. 신난 우리 셋은 ‘런던의 비’조차 추억하고 싶어서 캐리어를 세우고 환하게 웃으며 내리는 빗속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비를 맞는 상쾌한 기분도 잠깐,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인도를 덜덜거리며 역까지 가려니 평소에 도보로 3분 걸리던 길이 10분은 족히 걸렸고 심지어 빗방울이 점점 더 거세져서 역 앞까지 와서는 거의 피신하다시피 역 안으로 뛰어들어가야 했다. 로망은 로망일 뿐 역시 여행자에게 비는 그리 유쾌한 존재는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동시에 런던 여행을 하는 5일 동안 쾌청한 하늘 아래서 걸어 다닐 수 있었음에 절절한 감사함을 느꼈다. 


세인트판크라스역에 들어서니 유로스타 승강장으로 가는 길이 곳곳에 안내가 잘 되어 있어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유로스타는 국경을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공항에서처럼 짐검사와 여권 확인 등 수속을 밟아야 했다. 그래서 두 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여유 있게 도착했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입·출국심사는 30분 만에 끝났다. 


심사 중 인상적이었던 건, 처음은 영국, 그다음은 프랑스 순으로 입·출국심사를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영국 출국심사 직원이 “Hello”라고 인사를 하고 여권심사를 하면 그다음으로 프랑스 입국심사 직원이 “bonjour”라는 인사와 함께 여권심사를 했다. 덕분에 파리북역에 도착해서는 따로 수속 없이 바로 나가면 되어서 편리했는데, 정말 생경한 경험이었다. (그 와중에 이 프랑스 입국심사 직원은 런던에 거주하는 걸까, 아니면 파리에서 매일 통근을 하는 걸까 궁금했다.) 한국은 반도국이지만 북한과 맞대고 있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가는 건 사실상 섬나라와 다를 바가 없다. 국경을 비행기나 배가 아닌 육상교통수단으로 건널 수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늘 궁금했다. 차를 타고, 또는 걸어서 국경을 지나는 경험을 어릴 때부터 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국경, 더 나아가 타국에 대한 이해나 태도, 느낌이 다르게 형성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자가 좀 더 타국에 대해 가깝고 말랑말랑하게 느끼지 않을까. 직접 해보니 마음이 조금 말랑말랑 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대기장소로 가니 좌석이 꽤 많은데도 승객이 워낙 많아서 빈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다. 1시간 반 정도 기다려야 했는데 다행히 워낙 회전율이 높아서 빈자리는 금방 나왔다.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리며 주위를 둘러봤는데, 유독 가족단위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4-5살 정도의 미취학 아이들이 많았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가만히 있는 걸 못 참고 돌아다니거나 끊임없이 부모에게 무슨 말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휴식을 취하며 멈춰 있는 어른들 사이에서 요리조리 움직이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레 눈이 갔는데,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면서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번잡스럽기보단 새삼스레 예뻐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띄는 게 있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본인 가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는 가방이나 캐리어처럼 바퀴가 달려 끄는 작은 가방이었는데 그 안에는 대기하면서 가지고 놀 인형이나 담요, 간식 등이 들어있었다. 탑승 전까지 필요한 걸 하나씩 꺼내서 쓰다가 탑승시간이 가까워오면 부모가 아이의 가방에 넣어 주긴 했지만 어떤 물건이 들어가는지 아이에게 인지시키면서 함께 가방을 다시 채웠다. 어릴 때부터 자기 물건은 자기가 챙기는 습관을 들여주는 외국부모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행을 할 때 큰 가방에 가족물품을 다 같이 넣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이에게 따로 가방을 들게 하는 건 오히려 짐이 되다고 생각해서 별로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에게도 너무 무겁지 않은 선에서 본인이 쓸 물품을 스스로 챙길 수 있게 하면 책임감과 주체성을 키워주는데 좋을 것 같았다. 아이들도 당연한 듯이 본인 가방을 씩씩하게 매고 부모님 뒤를 따라갔다.


알록달록한 캐릭터가 그려진 가방을 메고, 또는 끌고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던 런던에서의 마지막 풍경, 그 모습을 한가득 눈에 담고 있으려니 이윽고 우리가 탈 유로스타의 플랫폼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두고 가는 물건은 없는지 다시 한번 우리가 앉았던 자리를 확인하고 미식과 패션의 도시, 프랑스 파리로 산뜻하게 발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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