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런던->프랑스-파리(7.7)
#유럽여행 5일차 (2)
유로스타를 타자마자 거의 바로 기절해서 잤다. 한국에서도 주위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머리만 댔다 하면 5분도 안돼 쿨쿨 자서 가족들이 넌 어디 갔다 놓아도 잠을 잘 자서 복이다, 라고 했었는데 그 복을 여기 유럽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는 중이었다. 자다가 뜨문뜨문 깨서 창밖을 봤는데, 대평원 위에 목장이 넓게 펼쳐져있고 2층집들이 뚝뚝 떨어져 있는 영화에서만 보던 광경이 펼쳐졌다. 말 그대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이 있는 형국이었는데, 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저런 데서 살면 하루하루가 평화롭겠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느긋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파리북역에 도착했다. 영국은 물가가 워낙 높아서 숙소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 한인 민박을 택했었는데, 파리는 그보다는 사정이 좀 나아서 에어비엔비로 숙소를 잡았다. 파리에 사는 현지인의 집이었는데 에어비엔비 이용은 처음이라 긴장이 되기도 했고 파리지앵의 집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설렘이 일기도 하면서 기대감이 퐁퐁 샘솟았다. 우리가 머물 집의 호스트는 여름휴가를 맞아 다른 국가에서 휴양을 즐기고 있고, 그동안 파리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본인 집을 제공하며 부가수익을 창출하는 것 같았다.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도시에 살고 있다면 이렇게 휴가를 가 있는 동안 집을 렌트해 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았다.
파리북역에서 에펠탑 근처까지 지하철을 타고 오는 동안은 마냥 신났는데, 숙소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됐다. 런던에서는 한인 민박이라 숙소 근방까지만 찾아가면 한국인 관리인이 문을 열어주고 방 안내와 소소한 여행팁까지 알려줬었지만, 파리에서는 숙소 찾기부터 최종 체크인까지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한국인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부담이었다. 그래도 이 또한 즐거운 과정이 될 거라 생각하며 즐기자고 마음을 토닥였다. 혼자였으면 또 달랐을 텐데 세 명에서 뭔들 못하겠냐며 우리는 서로 용기를 북돋았다. 또 몸은 피곤했지만 발음이 사랑스러운 언어를 쓰는 새로운 국가, 남녀노소 바게트를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는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묘하게 사람을 흥분시켰다.
곧이어 숙소와 가장 가까운 La Motte - Picquet Grenelle 역에 도착했고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우리가 머물 에어비엔비 숙소는, 무인으로 운영되는 열쇠보관소에 가서 호스트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해 열쇠를 찾은 다음, 숙소를 찾아가 직접 체크인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열쇠를 제일 먼저 찾아야 했는데 역을 기준으로 숙소는 북쪽에, 무인 열쇠보관함은 남쪽에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다 같이 가기엔 거리가 있어서 한 명이 역 안에서 캐리어를 지키고 있으면 두 명이 열쇠를 찾아오기로 했다.
처음엔 엄마가 지하철에서 캐리어를 지키고 오빠와 내가 열쇠를 찾으러 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파리가 어떤 도시인지도 아직 잘 모르고 소매치기도 많다고 하니 동양인에 여자인 엄마가 혼자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도 체격이 건장한 남자인 오빠가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결국 오빠가 지하철역 안에서 캐리어를 지키고, 나와 엄마가 열쇠를 찾으러 나갔다.
그런데 분명히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알려준 주소로 왔는데 해당 주소의 가게는 문이 닫혀있고 인근엔 유리문으로 된 아파트 출입구와 야외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이 있을 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지도상으론 여기가 맞는데 열쇠보관함은 없고, 날은 금방 어두워질 것 같고… 정말 멘붕 직전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은, ‘설마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사기를 친 건가?’ 그 짧은 찰나에 오늘 저녁 숙소를 다른 곳으로 어떻게 구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혹시나 싶어 가게 문을 계속 두드려봤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약 20분 정도 헤매고 있던 그때, 유리문으로 된 아파트 출입구가 열리고 캐주얼한 복장의 한 할아버지가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나왔다. 서로 눈이 마주친 할아버지는 우리 눈에서 간절함이 읽혔던 건지 불어로 뭐라고 말을 걸었다. 불어를 전혀 모르지만 대충 “도움이 필요하세요?”라는 뜻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폰을 보여주며 호스트가 보내준 열쇠보관소 주소를 찾고 있다고 영어로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불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할아버지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주소는 영어로 쓰여있었고 할아버지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이럴 땐 이제 경험적으로 알게 된 만국공통어가 나올 차례였다. 엄마는 무성영화의 주인공처럼 입은 다물고 유리문에 대고 열쇠를 돌리는 시늉을 했고 나도 얼른 옆에서 거들었다. 처음엔 눈만 껌뻑이며 쳐다보던 할아버지가 아하! 알았다는 표정과 함께 별안간 옆에 있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종업원에게 우리를 가리키며 무언가를 설명하는가 싶더니 종업원은 이내 아! 하는 표정과 함께 웃으면서 우리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니, 무슨 에어비엔비 숙소 열쇠가 레스토랑 안에 있어? 의사소통이 잘못됐나?’ 싶었지만 우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단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는데 종업원이 우리에게 “Airbnb, right?”(에어비앤비, 맞죠?)라고 했다. 엄마와 나는 모래밭에서 바늘이라도 찾은 듯 얼싸안았고 할아버지께 “merci!!”(감사합니다!!)라고 연신 외쳤다. 프랑스 할아버지는 쿨하게 손을 한 번 들어 보이시더니 강아지를 산책하러 당신의 길을 떠나셨다.
그렇게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엄마와 살았다, 이제 열쇠 찾을 수 있겠다며 종업원의 뒤를 따라갔는데, 종업원은 가게 안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좁은 나선형 계단 앞에 멈춰 서더니 이 밑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습한 공기와 어두컴컴한 지하 공간은 슬쩍 보기에도 매우 위험해 보였다. 나의 본능이 의욕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이 안에 갱단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다시 한번 여기가 맞는지 확인하니 종업원은 여기가 맞다고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자기 일을 하러 떠났다. 어정쩡하게 남겨진 엄마와 나는 잠깐 고민했지만 지금은 대낮이고, 레스토랑에 사람도 꽤 있고, 여차하면 소리를 지르자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공간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공간이 매우 협소했다. 안쪽에서 파란 불빛이 새어 나오길래 뭔가 싶어 다가가보니 작은 정사각형 박스가 다닥다닥 붙은 열쇠보관함이 벽에 붙어있었다. 파란 불빛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액정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호스트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하니까 한 박스의 문이 툭- 열렸고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열쇠가 다소곳하게 들어있었다. 열쇠는 대문을 여는 것과 현관문을 여는 것, 2개였다.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 재질의 열쇠 감촉이 손에 전해지자 그제야 실감이 나면서 긴장이 확 풀렸다.(아마도 이 근방에서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레스토랑과 계약해 이런 식으로 열쇠보관함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열쇠를 찾고 엄마랑 신나서 막 뛰어갔다. 정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리를 휘날리면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예쁘게 미친 사람(?)들처럼 뛰어갔다.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런던과는 또 다른 느낌의 파리 건물이 그제야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오빠도 그 자리에 아무 일 없이 잘 있었고 우리 셋은 캐리어를 끌고 숙소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파리에서 집 찾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겨우 열쇠를 찾고 나니 이제는 집을 찾는 게 문제였다. 파리의 집들은 구조가 희한했는데, 1층에 가게들이 쭉 있으면 2층부터 사람이 사는 주거 공간이고 가게 사이에 뜬금없이 큰 문이 하나씩 있었다. 그게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인 셈인데, 한 가게 건너 하나씩 있고 모양과 색깔이 거의 비슷해서 어떤 문이 우리 숙소 대문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대문을 찾는다고 10분 정도 헤매다가 안 되겠다 싶어 지나가던 두 청년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다행히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대문 위치도 찾아주고 우리가 열쇠로 여는데 익숙지가 않아서 낑낑거리니까 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와서 직접 문도 열어줬다.
몇 번이고 감사인사를 하고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앞동과 뒷동이 나눠져 있었고 중간에 작은 중정이 있었다. 호스트가 알려준 주소에는 앞동과 뒷동에 대한 언급은 없고 그냥 몇 층인지와 호실만 적혀있어서 일단 앞동을 가보기로 했다. 복도에 빨간색 레드카펫 같은 융단이 깔려있고 계단 난간도 고급스러운 조각이 된 매끄럽고 윤이 나는 나무여서 여기가 맞나? 싶긴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호실을 찾아 열쇠를 꽂았는데 이상하게 돌아가지가 않았다. 몇 분 정도 그러고 있었는데 갑자기 안에서 문이 열렸다!! 너무 놀라서 쳐다봤는데, 안에서 나온 중년의 남자도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대가족이 다 모였는지 현관에 신발이 수북했고 집 안에서는 시끌시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뜻 보기에도 평수가 매우 넓은 집 같았다. 상대가 불어로 뭐라고 말했는데 알아들을 턱이 없었던 우리는 주소를 보여줬고 중년의 남자는 뒷동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뒤이어 흰머리의 고상한 할머니 한 분도 나오셨는데 우리가 떠날 때까지 너무 따뜻한 미소로 봐주셨다. 불어로 무언가를 말씀하셨는데 아마 무사히 여행을 잘 마치길 바란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뒷동으로 오니 엘리베이터도 없고 바닥에 카펫은 더더욱 없었다. 계단 난간은 철이었다. 그래, 우리가 이렇게 좋은 숙소를 예약하진 않았을 거야... 하하. 그래도 같은 대문 쓰는 사이에 이렇게 확실하게 구분이 되어있는 게 조금 이질감이 들긴 했다. 다행히 2층이어서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는 데 큰 무리는 없었고, 10분 가까이 열쇠와 사투를 벌인 결과 겨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셋 다 녹초가 되어서 침대에,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그렇게 잠시 숨을 돌리고 나니 그제야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숙소 근처 가장 가까운 마트를 검색해 바로 출발했다. 숙소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까르푸가 있었다.
부지런히 마트를 향해 걸어가는데 무심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세상에나, 말로만 듣던 그 철골구조물이 나타났다. 너무 갑작스러운 만남에 잠깐 꿈을 꾸는 건가 싶었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앞으로 뛰어갔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 위에서 사람들은 돗자리를 펴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고 우리도 얼떨결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들 사이에서 해질녘의 에펠탑을 바라봤다. 그 이후로 파리에 머무는 동안 여러 각도, 여러 시간대에 에펠탑을 많이 봤지만 이때를 능가하는 감정은 느끼지 못한 것 같다. 울컥함, 애상적, 피곤함, 기쁨, 슬픔, 허기짐, 벅차오름 등등. 그 모든 감정들이 밀물처럼 한꺼번에 밀려오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 순간 에펠탑은 오늘의 수고로움을 다 보상해 주는 듯이 정말 예뻤다. 한참 동안 사진을 찍고 눈에 담다가 마트로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장 봐온 것들로 스테이크를 굽고 샐러드, 과일을 준비하니 그럴듯한 저녁식사가 차려졌다. 서로의 기진맥진한 얼굴을 보니까 그래도 무사히 파리에 도착하긴 했구나, 싶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오빠에게 열쇠를 찾기까지 있었던 스펙터클한 모험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그렇게 한참을 떠들었다. 할아버지, 두 청년, 앞집의 아저씨와 할머니까지. 돌아보니 하루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마음이 난로를 켠 것 마냥 따듯해졌다. 열쇠를 찾고 숙소에 들어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꽤 만족스러운 파리입성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