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파리(7.8)
#유럽여행 6일차
파리로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은 대체적으로, "제일 기대했는데 제일 실망스러운 도시가 파리였다."와 "파리는 집도 지하철도 다 낡았고 거리가 지저분하고 냄새가 많이 난다."였다. 이런 말들을 여행오기 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큰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는데, 기대치가 많이 낮아진 덕분인지 생각보다 괜찮았다. 지하철도 낡긴 했지만 그래도 얼굴이 찡그려지고 코를 막아야 할 만큼 나쁘진 않았다. 한국과 달리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있지 않아서 지하철이 들어올 때 온 얼굴로 먼지를 뒤집어쓰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숨을 잠깐 참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여행자의 설렘에 비하면 작디작은 오점도 남기지 못했다.
숙소에서 아침을 간단히 챙겨 먹고 지하철을 타고 루브르 박물관으로 갔다. 아침부터 나름 부지런하게 움직였는데도 사람들은 이미 가득 차 있었다. 규모가 크다는 건 알았지만 상상 그 이상으로 컸다. 아니, 거대했다.
관람객들 중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고, 단출하게 와서 조용히 작품을 감상하고 사진 한 장 찍지 않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간혹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외국인들은 사진을 많이 찍지 않는다, 사진을 찍지 않는 게 진정한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다, 라며 사진을 찍지 않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외국인들도, 특히 여행자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일상이 아닌 특별한 순간은 누구나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기 마련이고 그 욕망의 최전선에서 성실히 따르는 데에는 국적이 상관없기 때문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관람을 하다 보니, 한국에서 있었던 한 미술관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한남동 모 전시회에 갔을 때의 일인데, 젊은 관람객 두 명이 해당 전시실에서 제일 유명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고 옆으로 세 팀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 나도 그 작품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 잠깐 기다리면 가까이 다가가서 작품을 들여다보고 정면에서 작품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겠지 싶어 서 있었는데, 5분이 경과됐는데도 두 사람은 여전히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른 작품들을 좀 보고 다시 와야겠다 싶어 이동해서 15분 정도 다른 곳을 둘러보고 다시 돌아왔는데 아까 그 관람객 두 명이 아직까지 찍고 있었다. 자그마치 20분 동안 두 명이 작품을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줄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 그 사람들도 20분 이상씩 찍을 생각이라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이 미술전이 사진 찍고 sns에 올리기 좋은 곳이어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건 과한 것 같았다. 최소한 루브르에서는 20분 이상 기다려야 한 적은 없었다. 평균적으로 30초~1분 정도면 사진을 찍고 나왔다. 그리고 사진 찍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보단 멀찍이 떨어져서, 또 가까이 다가가서 두 눈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진을 찍고 안 찍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타인의 관람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사진을 찍는 매너와 작품과 진심으로 교감하고 그 후에 사진으로 그 순간을 남기는 게 작품과 예술을 대하는 좋은 태도가 아닐까. 두 장소에서의 경험이 교차되며 하나의 결정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예외적으로 <모나리자>의 경우, 전 세계 사람들이 보기 위해 몰려드는 작품이기 때문에 제일 앞자리인 1열까지 가는데 40분 정도 기다려야 했고 2분이 지나면 제일 앞 줄의 사람들을 관리자가 내보내면서 통제를 했다. 직접 본 모나리자는 정말 작았다. 명도도 미술책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낮았다. 이 작은 그림을 보겠다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니 경이롭기도 하고 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사진을 찍으니 사진 속의 모나리자도 조금은 부끄럽지 않을까,라는 귀여운 상상도 해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모나리자의 볼이 살짝 발그레한 것 같기도 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의 관람을 마치고 뛸르히 가든을 가로질러 오랑주리 미술관을 찾았다. '오렌지 온실'이라는 뜻으로, 과거에는 겨울철 루브르 궁전의 오렌지 나무를 보호하는 온실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프랑스의 근대 회화를 주로 전시하는 국립미술관이다. 세잔, 마티스, 모딜리아니, 피카소 등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클로드 모네의 여덟 점의 <수련> 연작이 유명하다. 초등학교 때 필독도서 목록에 있던 미술 관련 책에서 모네의 그림을 보고 오묘한 색감과 흔들리는 듯한 화풍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꼈었는데, 그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있다니 도착하기 전부터 가슴이 뛰었다. 사실 오랑주리 미술관을 방문한 이유도 오직 모네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라고 해도 무방했다.
오랑주리 미술관 내에 있는 모네 전시실과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모네가 작품을 오랑주리 미술관에 기증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첫째, 모든 이들에게 공개할 것. 둘째, 장식이 없는 하얀 공간에 전시하고, 자연 채광이 있는 전시실에 전시할 것. 모네의 요구는 정확하게 타당했다. 커다란 타원형으로 설계된 깨끗하고 환한 공간은 모네의 작품을 감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자신의 작품이 어떤 공간에 있을 때 가장 빛을 발할지까지 생각한 모네의 섬세함에 또 하나의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약 5시간 동안 루브르박물관과 오랑주리미술관을 차례로 몰아치듯 관람하고 나니 급격하게 허기가 몰려왔다. 미리 찾아놓았던 에스까르고와 스테이크가 유명한 맛집으로 이동해 자리가 있는지 물어봤는데, 이미 예약이 꽉 차서 바테이블밖에 자리가 없다고 했다. 일부러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기 전 일찍 도착해서 물어본 건데도 그렇다고 해서 놀라긴 했지만, 몹시 배고픈 상태였던 우린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거기라도 좋다고 했다.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고, 바테이블 자리로 안내를 받았는데 곧이어 사람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더니 정말 그 많던 자리들이 꽉 찼다. 솔직히 처음엔 동양인이라고 일부러 안 좋은 자리를 주나 싶었는데 정말 예약이 다 되어있는 자리였구나, 싶어서 의심했던 게 미안했다. 한편으론 파리 현지인들이 예약을 많이 한 걸 보고 제대로 된 맛집을 찾아왔구나 싶어 기대가 됐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먼저, 애피타이저로 에스까르고가 나왔다. 달팽이를 재료로 한 요리로, 맛만 보려고 6개짜리 한 세트만 시켰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맛보자마자 한 세트 더 시켰다. 맛만 볼 그런 요리가 아니었다. 달팽이를 식자재로 쓴 요리는 처음 먹어봐서 선입견이 있었는데 골뱅이보다 훨씬 고소하고 부드러웠으며 바질페스토 소스는 감칠맛이 나서 조합이 아주 좋았다. 재료 특유의 향과 향신료 냄새에 민감한 내가 먹기에도 전혀 부담이 없었다. 에스까르고가 너무 강렬해서 그런지 스테이크는 오히려 평범한 맛이었다. 아쉬운 점은, 스테이크 맛집이라길래 T본 스테이크 두 접시와 안심스테이크 하나를 시켰더니 모든 메뉴가 소고기라서 먹다 보니 물렸다. 오리콩테나 어니언스프 같이 다른 프랑스 요리를 섞어서 시켰더라면 더 다양하게 맛볼 수 있었을 텐데 전략을 잘못 세웠다. 다음엔 좀 더 슬기롭게 주문을 할 수 있을 거라며 우리 스스로를 다독이며, 고기는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밤 9시경.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7월 초 파리의 일몰시간은 9시 30분경으로, 1년 중 해가 제일 길 때다. 7월 한 달 동안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방문한 모든 국가의 일몰시간이 8시 30분 이후였는데, 일몰시간이 늦으면 여행자 입장에선 활동시간이 늘어나 많은 곳을 다닐 수 있어 좋지만 때론 해가 빨리 져서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은데 해가 지지를 않으니까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원망스러운 마음도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눈 녹듯이 사라졌다.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며 일몰을 보면서 하루를 마감하기에 안성맞춤인 몽마르트르 언덕도 그랬다.
약간의 경사가 있는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고 몽마르트르 언덕에 도착하니 파리시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야트막한 언덕인데도 파리 시내의 건물들이 높지 않아서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자연이 빚어낸 총천연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사크레 쾨르 대성당과 또 하루가 저물어가는 파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 도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고 또 떠나갈 이방인일 뿐이면서 마치 파리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처럼, 저 구석진 골목골목에 깃든 사연을 다 알고 있는 노파처럼. 그런데 사크레 쾨르 대성당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건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몰시간 때를 맞춰 찾아온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 다양한 머리카락 색과 언어, 체취, 향기, 옷차림이 물들인 계단은 마치 콘크리트 사이로 피어난 꽃들의 연회장 같았다.
신기했던 건, 해질녘이 되자 다들 계단에 앉아서 풍경을 감상했는데 특별히 질서를 관리하는 관리자가 없었는데도 질서유지가 잘 됐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가 만들어지고 서로를 배려하며 상당히 부드럽게 흐름이 이어졌다. 태어난 곳도, 사는 곳도, 나이도, 직업도 모두 다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어떠한 사고도 없이 뭔가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된다는 게 내겐 때때로 엄청난 일처럼 느껴진다. 가슴 깊은 곳을 울컥하게 만드는 벅찬 무언가, 그 실체는 알 수 없지만 형언할 수 없는 행운처럼 느껴지는 그 무언가가 있다. 이 무언가를 상당히 기다려왔다는 예감을 느끼며, 우리도 슬슬 계단 중간쯤에 앉아서 일몰을 관람할 준비를 했다. 물론 몽마르트르 언덕에 소매치기가 출몰한다는 얘기를 워낙 많이 들었기 때문에 가방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몽마르트르 언덕의 자유로운 예술가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계단에 앉아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 앞으로 쓱, 나와 가방에서 준비해 온 물품들을 꺼내며 조용히 자신의 공연을 준비했다. 하늘빛이 점점 붉어지며 황혼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그의 공연은 시작됐다. 마술사처럼 온통 검은색 옷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한 호리호리한 예술가가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무대에 선 사람을 응시했다. 예술가가 자신을 둘러싼 양초에 불을 붙이는 게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는데, 이 예술가의 핵심주제는 '불꽃'이었다. 두 개의 긴 장대 양끝에 불꽃을 피우고 음악에 맞춰 묘기를 부렸다. 손으로 장대를 돌리고, 등과 가슴 위로 튕기고, 불꽃이 튀는 장대를 높이 던졌다가 뛰고 구르며 받아냈다. 그다음으론 불꽃을 피운 쌍절곤, 창 등을 신묘하게 휘두르며 놀라운 광경을 보여줬다. 이 공연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실력을 갈고닦았을까, 불꽃에 집중하는 예술가의 눈에서 그간의 노력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파리 시내를 풍경으로 불꽃이 튀는 모습은 근사했고,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만의 색채를 담은 무대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빛나보였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고 해는 자취를 감췄다. 마침내 사방이 검게 물들었을 때, 검은 옷을 입고 있던 예술가조차 사라지고 그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불꽃만이 남아있었다.
공연 시작 전, "no picture, no video"라고 써놓은 입간판을 예술가가 세워놓았기 때문에 이 순간을 기록해 놓은 그 무엇도 없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에게, 엄마에게, 그리고 오빠에게 몽마르트르 언덕은 점점 붉고 검게 물들어가던 하늘이 불꽃으로 수놓아지던 불꽃놀이의 한 장면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