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파리(7.9)
#유럽여행 7일차 (1)
아침 6시 30분.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이상하게 너무 가까이에서 들린다 싶었는데 세로로 된 긴 침실 창문을 여니 바로 앞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 쉴 새 없이 울고 있었다. 파리의 새는 늘씬한 몸통에 어두운 빛깔의 깃털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당히 날렵해 보였다. 수정 같은 눈을 반짝이며 쉴 새 없이 고개를 좌우로 돌렸는데 그 순간, 새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제 일어났냐, 인간아. 거참 깨우기 힘드네."라는 표정으로 거만하게 나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에 괜히 기가 죽었다. "뭐, 이 새야. 6시 반도 나한텐 이르거든. 난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 거야!"라고 새침하게 받아쳐줬어야 하는데... 쩝, 그러지 못했다. 본인 임무를 마쳤는지 새는 나를 깨우고는 그만 포로롱 날아갔다. 이 집주인은 일찍 일어났나? 괜히 코를 슥슥 만지며 새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해는 반쯤 떠서 서서히 밝아오는 중이었다. 그렇게 파리에서의 하루가 또 시작됐다.
파리는 런던보다 일교차가 더 크게 났다. 낮엔 덥지만 아침저녁으론 쌀쌀하다 느낄 만큼 기온이 뚝 떨어졌다. 오래 있으면 늦가을처럼 쌀쌀하기까지 해서 오히려 얇은 카디건이 필요해지는 그런 날씨였다. 심지어 우리가 있던 숙소는 앞 건물에 가려져 그늘이 생기는 위치였기 때문에 에어컨이 없어도 집 전체가 서늘했다. 여행 오기 전 파리는 여전히 에어컨이 없는 집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떻게 에어컨 없이 살 수 있지? 가능한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직접 살아보니 충분히 가능했다.
일찍 일어난 김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려고 물을 끓이면서 집을 쓱 둘러봤다. 이제 이 집에 머문 지도 3일 차이기 때문에 슬슬 가구배치도 눈에 익고 작은 오브제 위치도 기억할 정도로 익숙해지고 있었다. 에어비앤비에는 실제 현지인이 자신의 집이나 방을 임대하기도 하지만,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실내를 꾸며놓고 실거주 없이 오로지 공간대여의 목적으로 올라와있는 집들도 많다. 하지만 내가 경험하고 싶었던 건 예쁘게 꾸며진 모델하우스가 아니라, 서사와 온기가 있는 프랑스 사람의 '진짜' 집이었다. 그래서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가정집을 바랐었는데 이 집이 바로 그랬다. 팬트리에 뒤죽박죽 쌓아놓은 잡동사니 물건들을 급하게 천으로 가려놓은 것도, 아이 방에 초등학교 교과서와 만화책이 순서 없이 뒤죽박죽 꽂혀있는 것도 다 마음에 들었다. 생활감이 많이 묻어있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야기를 상상해 볼 여지가 넉넉해서.
내가 머문 파리 집은 15평 남짓으로 협소한 대신 동선이 실용적이었다. 화장실은 세면실과 샤워실, 변기실이 따로 분리되어 있어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쓰기에 좋았고, 샤워실 옆에 작은 팬트리를 두고 그 안에 세탁기를 배치해서 하루종일 입었던 꿉꿉한 옷을 바로 빨래하기에도 최적이었다. 부엌은 한 사람이 겨우 서있을 수 있을만한 공간에 11자로 조리대와 싱크대, 인덕션이 자리해 있었는데 재료를 썰고 뒤로 180도만 돌면 인덕션 위에 있는 프라이팬에 바로 넣을 수 있었다. 360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부엌이 혼자서 음식을 후다닥 만들어내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거실에는 직접조명인 천장등이 없는 대신 곳곳에 스탠드와 벽에 달린 전구 등 간접조명이 많았다. 어둡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막상 켜고 보니 충분히 밝았다. 책을 읽기에는 조금 어두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대화하고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조명이 은은해서 포근한 느낌을 줬다. 벽에는 다양한 화풍의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조화롭지 않은 듯 싶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게 하나씩 수집하다 보니 집주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이런 컬렉션이 된 것 같았다. 아이방도 심플했다. 책상과 침대, 옷장, 작은 협탁, 장난감 넣어놓는 통 하나가 다였다. 책꽂이에는 불어로 된 만화 <원피스>가 꽂혀있었고, 여행을 많이 다니는지 벽에는 세계지도가, 책상 위에는 세계 각국에서 가져온 작은 기념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집만 봐도 이 공간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활패턴으로 사는 사람인지 상상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집의 호스트는 깔끔하고 실용적인 걸 중시하고 머스터드, 레드 등의 밝은 색감으로 포인트를 주는 걸 좋아하는 개성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이도 양육자를 닮아 깔끔하고 똘똘할 것 같았고. 내가 머무는 공간은 나를 닮는다던데 누군가 내가 사는 공간을 본다면 어떤 인상을 받을지 궁금했다. 차 한 잔을 마실 시간 동안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집을 통한 만남은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이날은 베르사유 궁전을 가는 날이라 다른 날보다 좀 더 일찍 숙소에서 나왔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집 앞의 동네 빵집이 있는 골목에 들어서자 어김없이 갓 나온 빵냄새가 거리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빵집 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주황색 불빛이 갓 구워져 나온 빵들을 비추고 있었고 가지각색의 바게트들도 제자리에 착착 쌓이고 있었다.
“프랑스에선 아이에게 이가 나면 바로 바게트 한 조각을 물렸고 아이가 자라면 첫 심부름으로 빵 가게에서 바게트를 사 오게 시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프랑스인들의 바게트 사랑은 남다르다. 통계적으로도 프랑스에서 해마다 팔리는 바게트가 60억 개가 넘는다고 한다. 바게트 제빵에는 밀가루와 물, 소금, 효모 4가지 재료만 쓰이지만, 어떤 효모를 만들어 쓰는지 또 어떻게 구워내는지 등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고도 한다.
그런 바게트를 프랑스까지 왔는데 안 먹어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파리에 있는 동안 총 베이커리 3군데에서 바게트를 먹어보았는데 신기하게도 맛이 다 달랐다. 어떤 건 바삭하면서 쫀득했고, 어떤 건 부드러우면서 고소했으며, 또 어떤 건 촉촉하면서 말랑했다.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함이 그라데이션처럼 짙어지면서 오묘하게 맛이 달라지는 게 4가지 재료만으로 이런 맛을 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유명한 베이커리도 가보고 집 앞 동네 빵집도 가봤는데, 결론은 제아무리 유명한 베이커리집 바게트라도 갓 나온 빵을 이길 순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 동네빵집을 들어가게 된 건 파리에 도착한 둘째 날이었다. 지하철로 향하던 길에 거리 가득 풍기는 고소한 버터 냄새에 이끌려 빵집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나무 색의 인테리어와 주황색 불빛으로 가득 찬 가게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디저트 종류가 들어있는 유리 진열장 안은 군데군데 비어있는 자리가 많았지만, 빵 종류는 어느 정도 나와 있었다. 뺑오쇼콜라, 브리오슈, 크로와상, 갈레트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빵들이 영롱한 자태를 뽐내며 진열되어 있었다.
가게 안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빵을 진열하고 포장하느라 분주했다. 우리가 들어서자, 잔잔한 꽃무늬 앞치마를 한 할머니는 눈이 동그레 지면서 뒤로 두 발짝 정도 물러섰고 깔끔한 연미복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맨 할아버지도 조금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행객들의 숙소가 밀집한 지역은 아니었어서 그런지 동양인의 등장은 뜻밖인 것 같았다. 아침부터 달달한 빵을 먹기엔 부담스럽기도 하고 목적지까지 갈 길이 멀어서 우리는 바게트 하나만 사기로 했다.
"One bagutte, please." (바게트 하나만 주세요.)
최대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검지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빠른 불어로 뭔가를 물어봤다. 우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보이자, 할아버지는 각 바구니에 담긴 바게트를 가리키며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줬다. 유심히 살펴보니 각 바구니에 조금씩 다른 모양을 한 바게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떤 건 좀 짧고, 어떤 건 끝이 뭉특하고, 어떤 건 모양이 새겨져 있고... 언뜻 봤을 땐 다 같은 바게트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바구니마다 다 다른 이름표 태그가 붙어있었다. 엥, 이게 다 다른 바게트라고?? 프랑스 바게트 종류에 무려 11가지 이상이 있다는 걸 몰랐던 우리에게는 신세계였다. 바게트 신세계.
불어를 몰라서 그나마 알아볼 수 있었던 게 영어와 비슷한 '클래식 바게트(baguette classique)'와 '트라디시옹 바게트(baguette tradition)' 2개 정도였다. 클래식 바게트는 트라디시옹 바게트보다 좀 더 가늘면서 길고 하얬다. 반면, 트라디시옹 바게트는 좀 더 짧고 밀도가 높으면서 먹음직스럽게 그을린 표면을 가지고 있었다. 긴 고민 없이 트라디시옹 바게트로 정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실제로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바게트도 트라디시옹 바게트(baguette tradition)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부수럭거리는 긴 종이 빵봉투에 통통한 트라디시옹 바게트를 넣어줬다. 값을 치르고 빵집을 나서려고 하자 할아버지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A bientôt!" (또 봅시다!)라고 했고, 두 발짝 뒤에 선 할머니도 "Au revoir."(안녕히 가세요.) 라며 수줍게 덧붙였다. 물론 이 동네 빵집의 바게트는 내가 여태껏 살면서 먹어본 바게트 중 단연 최고였다. 세 명이 번갈아가며 신나게 베어 물다 보니 금세 바닥이 났고, 아쉽지만 내일 아침을 기약해야 했다.
그 이후로, 파리에 있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이 동네 빵집에서 갓 나온 바게트를 하나 사서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돌아가면서 한입씩 베어 먹었다. 고소하고 향긋한 바게트의 향미가 입안에 가득 퍼지면 잠자고 있던 세포들이 깨어나는 느낌이었고 적당한 포만감을 선사해 아침으로 제격이었다. 이날도 착착 쌓인 바게트 중 트라디시옹 하나를 구매했다. 할아버지는 정답게 우리를 맞이했고,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가 들어오면 낯을 가렸지만 바게트를 사고 나갈 때는 "Au revoir."(안녕히 가세요.)라고 수줍게 웃으면서 손을 살짝 흔들어줬다.
옆구리에 길쭉한 바게트를 하나 끼고 쏟아지는 햇살 속에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면, 그렇게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프랑스에 오면 아무튼, 바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