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파리(7.9)
#유럽여행 7일차 (4)
베르사유 궁전과 오르세 미술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파리 도심 한복판에 있는 에투알 개선문이었다. 에투알이란 별이란 뜻으로, 위에서 보면 개선문을 중심으로 도로가 별처럼 방사형으로 갈래갈래 뻗어나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개선문 건너편에서 개선문쪽으로 건너가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횡단보도가 보이지 않았다. 지상에는 회전교차로에서 차들이 멈추지 않고 다니고 있었고 몇몇 여행객들은 차가 쌩쌩 다니는 도로 위를 무단횡단해서 가려고 하다가 운전자와 실랑이가 벌어지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종종 목격됐다.
그렇게 길을 찾지 못해 잠시 방황하고 있는데, 그때 우리 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하철역 입구처럼 생긴 계단 밑으로 내려가고 있는 게 보였다. 눈치껏 따라가 보니 지하통로 같은 곳이 나왔는데 알고 보니 개선문은 지상이 아니라 지하를 통해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프랑스가 저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건너가게 하지는 않을 텐데, 싶었다.
무사히 입장권 발권을 마치고 개선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우리를 반긴 건 달팽이를 닮은 나선형의 계단이었다. 개선문 안에는 엘리베이터 따위는 없었다. 284개의 계단을 두 다리로 뚜벅뚜벅 오르고 내려야 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이미 베르사유 궁전과 오르세 미술관을 둘러보느라 2만보는 가뿐하게 넘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두 발에서 불이 활활 나고 있었다.
그래도 올라가야 했다. 여기까지 와서 개선문 전망대를 안 올라간다고? 아니, 그럴 순 없었다. 엄마와 오빠, 그리고 나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은 후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은,
'와... 하루가 왜 이렇게 길지? 집에 가고 싶다.'
괜히 파리 개선문 입장 준비물은 티켓, 그리고 체력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개선문 전망대는 보통 늦은 오후나 저녁즈음에 방문하기 때문에 다른 일정을 다 소화하고 가는 곳이라 그리 높은 난이도의 계단이 아닌데도 체력적으로 힘에 부쳤다. 역시 여행 선배들의 조언은 허투루 버릴 게 없었다. 나선형으로 된 계단은 가팔랐다. 또 폭이 좁아 뒤쳐지면 뒷사람에게 민폐가 될 수 있어 정신없이 오르다 보니 전망대에 금방 도착했다. 정상에 서자 기가 막힌 풍경이 펼쳐졌다. 샹젤리제 거리와 파리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오른쪽부터 에펠탑, 몽파르나스 타워, 몽마르트르 언덕 등 우리가 다녀왔던 파리의 랜드마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밑을 내려다보니 차들이 개선문을 둘러싸고 뱅글뱅글 돌고 있는데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전쟁에서 승리해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를 타고 빙글빙글 도는 세리머니처럼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개선문 정상에 발자국을 남긴 우리의 성공을 축하해 주는 것인가, 하하. 본래 개선문의 의미와도 썩 잘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개선문에서 내려와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마카롱 전문점 '라뒤레(Laduree)'에 들어갔다. 천장에서는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밑 진열장 안에는 색색깔의 마카롱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직원들은 모두 검은 정장차림이었는데 마치 명품샵에서 직원들이 장갑을 끼고 명품을 대하듯이 마카롱을 다뤘다. 그 덕에 마카롱이 더 돋보였는데, 음식은 그 자체의 맛과 모양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 음식을 만나게 되는 과정, 이런 디테일한 부분에서 차이가 생겨나는 것 같았다. 가게 안팎은 테이크아웃을 해가려는 손님들로 줄이 끊이지 않았지만 노련한 직원들은 끝까지 미소를 잊지 않고 친절하고 정확하게 흔들림 없이 주문을 받아냈다.
그렇게 정중함 속에서 건네받은 6개의 마카롱을 받아 들고 샹젤리제 거리로 나왔다. 두 개의 꼬끄 사이에 필링을 가득 넣는 뚱카롱이 유행이었던 한국과 달리 프랑스 본연의 마카롱은 얇고 가벼웠다. 느끼하지 않은 크림과 바삭하면서 쫀득한 꼬끄가 어우러지는 느낌이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물론 마카롱 자체의 맛이 좋은 건 사실이었지만, 엄마의 평은 정확했다. 대리석이 깔린 바닥과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검은 정장을 맞춰 입고 사랑스러운 발음의 불어를 쓰는 직원들, 이 모든 게 어우러져 만들어진 복합적인 맛이 강한 마카롱이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의 말에 동의했다. 라뒤레는 단순히 프랑스 마카롱의 원조로서 마카롱을 파는 제과점이 아니라 프랑스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마카롱이라는 디저트에 덧입혀 판매하는 브랜드였다.
길고 길었던 하루의 마지막 일정은, 파리 센강을 따라 파리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바토무슈 유람선을 타는 거였다. 타러 가기 전에 1시간 반 정도 시간이 남아서 에펠탑 근처 잔디밭에 앉아 피크닉을 했는데 주위에 이미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우리도 그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에펠탑 뒤 배경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파란색이었다가 에메랄드색이었다가 보라색이었다가 주황색이었다가 빨간색이었다가... 하늘은 기꺼이 도화지가 되어 자신을 내어주었고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고 바라봤다. 배경색에 따라 에펠탑의 색도 노란색이었다가 빨간색이었다가 검은색이었다가 은색이었다가 계속 달라져서 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달라지는 풍경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인데 잔잔하고 고요하게 흘러갔던 이 순간만큼은 기억 속에서 바래지지 않을 것 같았다.
드디어 우리의 마지막 일정인 바토무슈 유람선에 탑승했다. 야외자리에 앉았는데 저녁이 되자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센강을 따라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곧이어 유람선이 출발하고 파리의 해질녘 풍경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보니 센강 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파리의 또 다른 모습이었는데 한 가지 눈길을 끄는 점은, 맥주를 마시는 사람 못지않게 샴페인과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천 돗자리를 무심한 듯 펴고 그 위에 간단한 치즈와 크래커를 펼치고 둥그런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 마셨다. 보통 강변에서 가볍게 마시는 음료라 하면 캔맥주를 떠올리게 되는데 와인이라니. 그것도 병으로 된 와인과 잔까지 직접 챙겨 와서 말이다. 한강과는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라 재미있었고, 프랑스 사람들이 새삼 섬세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빠져있던 찰나, 강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유람선을 타고 가는 우리를 보더니 손을 흔들어줬다. 유람선에 탄 사람들도 손을 흔들며 제각각의 언어로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자연스럽게 다정한 민족이라는 인상까지 추가됐다.
센강을 따라서 꽤 많은 수의 수상 건물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건물은 선상파티가 열리는 곳이었다. 영화에서만 봤던 드레스와 턱시도를 근사하게 차려입은 파티도 있었고, 가볍게 캐주얼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모인 파티도 있었다. 손에 샴페인잔 하나씩을 들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가 없었다. 물 위에 나란히 떠 있는 다섯 개의 건물에서 서로 다른 컨셉과 장식으로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신기했다. 파리 센강변을 걸으면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풍경이 센강의 중앙에서 보니 보였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화려한 파티장의 장식과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놀랍도록 살아있는 사람들의 '표정',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낮에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나서의 표정일 텐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 웃게 하는 걸 넘어서서 희열감이 느껴지게 하는, 정말 펄럭펄럭 살아 숨 쉬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은,
지금 우리의 표정도 저럴까? 살아있는 표정일까, 여행자의 표정은 어떤 표정일까?
유람선에는 대부분 연인, 가족단위로 사람들이 탔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 여행자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낮에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하루의 끝, 마지막 일정이 이 센강 유람선일 테니 어쩌면 많이들 지쳐있는 게 당연했다. 물론 표정 속에 설렘도 있긴 했지만 얼굴을 뒤덮은 고단함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약했다. 그중에는 싸웠는지 말 한마디 없이 냉랭한 분위기의 가족도 있었고 다리를 주무르며 멍 때리는 연인도 있었다. 초반에 난간에 기대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다가 에너지를 다 썼는지 조용히 서로에게 기대 있는 연인도 있었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방방 뛰다가 이내 잠든 꼬마 승객도 있었다. 한편에선 자리에 조용히 앉아 턱을 괴고 파리의 깊어가는 밤을 말없이 응시하는 노부부도 있었다.
그들은 일상을 살고 있었고 유람선 위의 사람들은 여행을 하고 있었다. 왜인지 희비가 교차하는 광경이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각자의 사정은 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여행을 한다는 건 일상의 공간을 떠나 새로움 속에 나를 온전히 던져보는 행위다. 그런데 그 새로움은 늘 설레고 기대되고 흥분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론 불편하고 때론 척박하고 또 때론 위험하기도 한 게 새로움이다. 그렇기에 여행을 하다 보면 지치기도 하고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지금 여행자들의 표정이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일상의 편안함도, 여행의 새로움도 모두 가치 있는 순간들이다. 그러니까 일상을 살아갈 때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고, 여행을 떠나 있을 때는 일상을 그리워하겠지. 센강 위의 선상파티 사람들을 보며 깨달았다. 어느 한쪽이 반드시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을. 일상과 여행은 다른 것 같지만 닮았다는 것을.
바토무슈 유람선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까만 밤하늘에 수놓아진 금빛의 에펠탑이었다. 지친 사람들의 눈에서 빛나고 있던 에펠탑. 괜찮다. 여행은 길을 잃어도 여행이니까. 지치면 쉬어가면 되는 게 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