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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Mar 21. 2023

베르사유 궁전에서 낙오되다

프랑스-파리(7.9)

#유럽여행 7일차 (2)


바게트로 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했다. 파리 외곽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나왔다. 말로만 듣던 베르사유 궁전을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타고 파리 시내를 다닐 때와 달리 RER이라는 새로운 교통수단을 타야 했다. 출근시간대와 맞물려서 그런지 베르사유 궁전을 가는 여행객들과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뤘다. 플랫폼을 찾기까지 헤맬 시간까지 계산해서 일찍 나온 건데 프랑스의 안내표지판이 직관적으로 잘 표시되어 있어서 큰 어려움 없이 플랫폼을 찾을 수 있었다. 


RER-C라인을 타고 가면 됐는데 RER은 2층으로 된 기차였다. 신설이라 그런지 기차 내·외부가 아주 깨끗했다. 런던의 빨간색 2층버스에 이어 2층기차라니! 신기하기도 하고 경치가 좋을 것 같아서 꼭 2층에 타고 싶었다. 기차 내부는 3명씩 6명이 마주 보는 자리로 되어있어서 조금은 낯선 구조였다. 하지만 어디에 앉아야 할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우리가 탔을 때는 이미 만석이라 서서 가야 했기에.


베르사유까지는 40분 정도 걸렸는데 계속 지하로만 다니다가 지상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파리 시내에서 다닐 때는 오래된 고풍스러운 건물들만 계속 봤어서 파리는 낮고 고상한 이미지가 강했는데,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자 전면이 유리로 된 현대식 고층빌딩들과 현대식 아파트들이 운집한 지역이 나와서 의외였다. 하긴 기존에 있던 구도심의 건물들만으론 늘어나는 인구를 다 소화하지 못할 테니 당연한 수순이긴 하겠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구경하다 보니 40분이 금방 지나고 RER의 종점이자 우리가 내려야 할 Versailles Chantiers역에 도착했다. 베르사유 궁전까지는 15분 정도 걸어가야 했는데, 길은 굳이 찾지 않아도 됐다. 이 역에 내린 사람들의 목적지는 모두가 같았기에. 우리는 그저 사람들의 뒤만 따라가면 됐다. 멀리서부터 베르사유 궁전의 모습이 점점 보였는데,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궁전 앞을 아스팔트 도로가 메우고 있었고 그 위를 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광화문 광장 앞을 보는 것 같았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 보이는 이곳의 모습도 꽤나 흥미로웠다. 궁전 앞 넓은 광장에 서자 제일 먼저 루이 14세 동상이 우리를 맞았다.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이 마치 자기 집에 온 걸 환영한다는 도도함을 내뿜는 듯했고 입구에서부터 쨍하게 반짝이는 황금색의 화려한 문이 베르사유 궁전의 시작을 알렸다. 아침에 서둘러 왔는데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긴 줄을 만들고 있었고, 1시간 반 가량을 뱀이 꽈리를 튼 듯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줄을 따라간 끝에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베르사유 궁전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화려함의 극치'였다. 건물 자체가 당시 막강했던 프랑스의 권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듯했다. 이 궁전을 짓는다고 루이 14세는 국고를 많이 탕진했다고 하는데 시간이 흘러 현재는 한해 수백 명이 다녀가는 문화유산을 남겨놓은 셈이 되었으니 역사는 참 아이러니한 것 같다.


베르사유 궁전 내부 모습 및 전경


수많은 천장화와 왕실 사람들의 초상화, 궁전의 증축과정에 대해 설명해 놓은 방들을 지나 드디어 대망의 '거울의 방'으로 입장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정해진 동선대로 앞사람을 따라 방들을 뱅글뱅글 돌다 보니 오게 된 거지만. 여태까지 본 방들도 충분히 화려했는데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완.전. 가능했다. 


‘거울의 방’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정원 측 창문과 마주 보는 벽면에 17개의 대형 거울이 설치된, 호화스러움을 가장해 국가 권력을 보였던 공간이다. 이 당시에는 거울이 보석과 맞먹을 정도로 귀하고 값비싼 것이었기에 당시 기술력으로 만들 수 있는 거울의 크기 중 가장 큰 대형 거울을 달고 프랑스의 국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로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일몰 시간에 이 방을 지나게 해 그 화려함에 압도되도록 유도하는 외교 전략을 펼쳤다고 한다. 엄마의 표현으로 "눈이 팽글팽글 도는 것 같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공간이었으니, 외국 사신들이 얼마나 큰 경외감과 황홀함, 그리고 이런 감정들과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오는 두려움을 느꼈을지 이해가 갔다.


일몰 시간이 되면, 정원 측 창문을 통해 햇빛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와 맞은 편의 거울에 반사된 후, 천장에 샹들리에에 다시 한번 반사되는 광경이 펼쳐진다고 한다. 다음에는 해가 지는 일몰 시간에 와서 자연의 빛이 만들어내는 광경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태양왕 루이 14세의 트릭을 온전히 느껴보고 싶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화려한 '거울의 방'




약 3시간 동안의 관람이 끝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나온 우리는, 점심 먹을 식당을 찾을 힘도 없었기에 가까운 맥도날드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나른해지는 오후, 햄버거와 샐러드와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거하게 점심을 먹고 나서 파리로 돌아가는 길. 배도 부르겠다, 날씨도 좋겠다, 걸음은 느려지고 기분은 저 멀리 우주까지 날아가는 듯했다. 


슬슬 걸어와 Versailles Chantiers역에 도착해서 교통카드인 나비고를 찍고 들어갔는데 저 멀리 플랫폼에 RER이 서 있었다. 어라? 이렇게 타이밍이 좋다고? 얼른 뛰어갔다. 배차간격이 15분이라 은근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 플랫폼에 기차가 떡하니 서 있으니 환한 미소가 지어질 만도 했다.


그런데 오빠가 타자마자 갑자기 삐- 소리가 나더니 문이 탁- 닫혔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당황해서 서로 벙찐 얼굴로 얇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쳐다봤다. 문이 한 번 더 열리는 행운을 간절히 바랐지만... 행운의 여신은 끝내 우리에게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다급하게 서로 다음 역에서 보자며, "아침에 우리 얘기했던 거 기억하지?", 라며 싸인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RER은 오빠와 함께 야속하게 떠나버렸다.


다행히 우리 가족 사이에는 여행 중 혹시나 떨어지게 됐을 때를 대비해 약속을 정해놓은 게 있었다. 지하철이든 버스든 대중교통은 어차피 노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먼저 탄 사람이 무조건 다음 목적지에 내려서 다음 차편을 기다리는 거였다. 그럼 뒤에 있는 사람이 그 차편을 타고 올 거니까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가니까 마침 오늘 아침에 다시 한번 이 약속을 가볍게 상기했었는데 이렇게 바로 실전연습을 하게 될 줄이야... 허를 찌르는 공격은 항상 긴장이 풀릴 때 들어온다. 우리가 지금 딱 그랬다. 적당한 긴장감이 필요한 순간이란 걸 이런 식으로 알려주는 건가..


RER이 떠나고 난 텅 빈 역은 신기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있는 이어폰을 낀 것처럼 방금 전까지 재잘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기차 문이 닫히고 출발하자마자 암전 되듯 사라졌다. 


내가 좀 더 걱정이 됐던 이유는, 유심칩을 꽂은 핸드폰이 오빠 거밖에 없어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 엄마와 나는 각자 휴대폰에 유심을 다 꽂자고 했었는데 오빠가 폰 하나만 하면 된다고 해서 결국 유심을 하나밖에 구매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여행하면서 제일 불편했던 점 중에 하나인데, 길을 찾는 일과 식당을 찾는 일, 다른 검색을 동시에 할 수 없어서 오빠가 다 해야 했다. 지켜보는 우리도 미안하고 오빠는 오빠대로 모든 일을 다 해야 했으니 힘들었을 것이다. 전체 경비로 보면 정말 얼마 안 되는 돈인데 제일 작은 부분에 투자를 하지 않아서 제일 큰 불편을 야기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이때 유심을 한 개만 산 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가족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래도 이 여행을 통해 덕분에 지금은 꼭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여 투자할 줄 알게 되었으니, 좋은 태도를 하나 배운 셈이라서 즐거운 추억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걱정도 잠깐, 햇살은 내리쬐고 사람은 없고 한적한 역은 멍 때리기에 딱 좋았다. 오빠와 다시 만나기까지 약 20분. 혼자 남았다면 긴장이 좀 됐었겠지만 엄마와 함께 있었기에 걱정이 전혀 되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사소한 것에도 신기해하고 죽이 잘 맞는 편이라, 자판기 안에 있는 이름 모를 프랑스 과자들도 구경하고 유모차를 타고 부모님과 나들이 왔다가 돌아가는 애기들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뚝 떨어진 기분에 괜히 일탈하는 아이가 된 것처럼 들떴다. 곧 있으니 사람들이 하나 둘 역 안으로 들어왔고 이내 가득 찼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원수로 본다면 오빠가 낙오된 것이고, 스마트폰의 유무로 본다면 엄마와 내가 낙오된 것인데 이 순간, 과연 누가 낙오된 걸까? 한편으론, 근데 이게 그렇게 중요할까? 어쩌면 낙오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낙오된 동안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시간을 보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낙오되었지만 아무도 낙오되지 않은 것이 된다. 그저 각자의 시간을 보낸 게 될 뿐이다. 나중에 다음 역에서 만났더니 오빠는 그동안 못했던 사진 정리를 플랫폼 의자에 앉아서 하고 있었다며 어깨를 으쓱하며 엄마와 내가 타고 있던 기차에 올랐다.


엄마와 내가 낙오된 건지, 아니면 오빠가 낙오된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다음 역에서 다시 만났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Versailles Chantiers역에서 엄마와 낙오(?) 되었을 때. 햇살이 드는 평화로운 오후의 베르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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