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파리 -> 이탈리아-밀라노(7.12)
#유럽여행 10일차 (1)
아침이 밝았다. 드디어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네 군데의 도시를 가볼 예정이었는데, 첫 번째 행선지는 밀라노였다. 어릴 때 이탈리아에 관한 책을 읽고 유럽에서 제일 가보고 싶은 나라하면 항상 "장화모양의 이탈리아"라고 말했었는데, 그 이탈리아를 드디어 가보게 된 것이다!! 런던과 파리도 충분히 좋았지만 오랜 로망으로 자리 잡았던 나라에 가보게 된다니 마음이 더 크게 두근거렸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해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셀프체크인과 셀프백드랍으로 짐을 부치고, 스벅에서 차 한 잔 마시며 기다리다 보니 금세 탑승시간이 됐다. 1시간 30분 남짓의 비행시간. 유럽에 살면 이웃나라에 건너가는 건 옆 동네 놀러 가는 것만큼이나 심리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가깝겠구나, 말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가보니 더 실감이 났다. 에어프랑스를 타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파리에서 밀라노로 넘어갔고, 이윽고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도착했다.
이번 밀라노 숙소도 파리에서와 같이 에어비앤비로 예약했다. 밀라노는 파리처럼 무인보관함에서 투숙객이 직접 열쇠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니라, 열쇠 반납을 24시간 맡아주는 에이전시 사무실이 따로 있어서 편했다. 숙소는 오빠가 전담, 교통편은 내가 전담했기 때문에 숙소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도착하기 전까지 알지 못했는데 아무렴 괜찮았다. 일이 술술 풀리는 게 이미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숙소에 도착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겉에서 봤을 때는 길가에 있는 오래된 집 같아 보였는데 안에는 완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되어있었다.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 나라의 가정집을 경험해보고 싶어서기도 한데 여긴 생활감이 묻어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델하우스에 더 가까웠다. 호텔식 베딩 스타일에 식탁엔 그릇과 와인잔이 세팅되어 있었고, 조명도 간접등과 스탠드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예상했던 가정집 스타일이 아니어서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좋았다. 오빠도 사진으로 본 거랑 많이 다르다며, "훨씬 좋은데?"라고 했고, 엄마는 이미 침대로 다이브 하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숙소를 하루만 머물고 가야 한다는 게 두고두고 아쉬웠을 뿐.
역시 미식의 나라답게 웰컴드링크로 식탁에 와인이 한 병 놓여있었다. 그 후로도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머물렀던 숙소에서는 와인 한 병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걸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짐을 풀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시내에서 간단히 저녁만 먹고 오기로 하고 숙소 근처에 있는 지하철을 탔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시선을 확 끄는 사람이 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한 남자였는데 찢어진 청바지에 검은색 데님자켓, 티셔츠에 슬쩍 걸친 브라운렌즈의 보잉선글라스, 그리고 화룡점정은 허리에서 보일 듯 말 듯 영롱하게 반짝이는 구찌 GG벨트.(이 당시만 해도 국내에 명품붐이 불기 전이었기 때문에, 또 명품에 관심 없던 평범한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명품을 직접 본 적이 많지 않았다.) 거기다 멋스럽게 기른 수염과 곱슬거리는 머리스타일까지. 화보에서만 보던 그런 사람이 실제로 눈앞에 앉아있는데, 더욱 놀라운 건 50대 중년 남자라는 것이었다.
와, 패션의 도시 밀라노라더니 시민들의 패션센스가 제대로 상향평준화되어 있었다. 도시 곳곳이 패션쇼장이었고 지하철이 화보촬영장, 거리가 런웨이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스타일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색 조합에 대한 감각을 키운다고 하던데, 진짜였다. 자신을 가꾸고 미적감각을 예리하게 다듬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구글지도에서 평이 좋다고 찾은 두오모 근처의 피자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이탈리아에 왔으니 첫 끼는 피자로 먹어줘야지! 하면서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인기가 많은 식당이라 시간을 잘못 맞춰가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던데 다행히 저녁시간대를 피해와서 바로 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메뉴판을 보니 영어 설명은 없고 이탈리아어만 잔뜩 쓰여있었다. 뭘 시켜야 하나 싶어 다른 사람들은 뭘 먹나 주위를 둘러봤는데 아니 글쎄, 남녀노소 모두가 1인 1피자를 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이리 둘러봐도 저리 둘러봐도 모두 자기 얼굴의 3배 이상되는 커다란 피자를 하나씩 앞에 두고 두 손으로, 혹은 포크와 나이프로 열심히 썰어서 먹고 있었다.
한국에선 보통 피자 하나를 4명에서 2조각씩 나눠 먹는데 아무리 그래도 1인 1피자는 무리일 것 같아서, 메뉴판 제일 위에 있는 대표메뉴 마르게리따(Margherita)와 부팔라(Bufala) 피자를 하나씩 시키고 사이드메뉴로 샐러드를 하나 시키기로 했다. 주문을 하려고 하는데 "Excuse me"라고 불러보고 손을 들어보기도 했는데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히 본 것 같은데... 심지어 직원 한 명과 눈이 마주쳐서 웃어 보이며 손을 살짝 들었는데 뒤돌아서서 갔다. 응? 지금 나랑 눈 마주쳤는데? 왜 주문 안 받고 그냥 가는 거야?? 나 손님인데???!
처음엔 동양인에 대한 차별인가 싶어 기분이 살짝 나빠지려는데 조금 있으니까 직원이 와서 영어로 주문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탈리아에는 생각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주문을 하려 하면 직원이 "Wait"라고 하면서 그냥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본인이 영어를 못해서인데, 그러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기다리면 영어가 가능한 직원이 알아서 온다고 한다.
거대한 피자를 한 판씩 먹는 사람들을 보고 다들 대식가인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주문한 피자가 나온 걸 보고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피자는 씬피자여서 반죽이 얇기 때문에 한 사람이 한 판을 다 먹어도 양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피자 도우 가장자리는 먹지 않았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피자 안부분만 쏙 빼먹고 도우 가장자리는 온전한 원형을 유지한 채 남겨놓은 접시, 조각조각 떨어져있는 도우가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접시 등 도우를 빼고 다양한 방법으로 피자를 즐긴 흔적이 남아있었다.
대학교 선배 중에 피자 도우 가장자리를 ‘손잡이’라고 부르면서 손잡이를 도대체 왜 먹냐, 고 했던 언니가 있었는데 순간 그 언니가 생각났다. 배가 불러서 안 먹는 경우는 봤어도 도우 가장자리를 대놓고 '손잡이'로 명명하는 사람은 처음 봤었기에 신기했었다. 그 언니는 전생에 이탈리아인이었을지도!(피자 가장자리에 대한 논란은 예전부터 많았지만 적어도 내 주변에서 '손잡이'라고 하는 사람은 대학생이 되기 전까진 보지 못했다.)
이탈리아 피자는 화덕에 구워 담백하면서 재료본연의 맛이 잘 느껴지는 피자였다. 생토마토향과 치즈의 고소함이 끝없이 어우러지는데 많은 재료 없이도 풍미를 극대화시키는 게 이탈리아만의 기술인 것 같았다. 신선함이 가장 큰 매력인 듯했는데, 역시 피자의 종주국다운 맛이었다. 도우 자체도 쫄깃하고 고소해서 별다른 디핑소스 없이도 충분히 맛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다 도우 가장자리를 남겼지만 우리는 '손잡이'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밀라노에서 피자 도우 가장자리는 '손잡이'지만, 우리까지 꼭 따라야 하는 법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