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밀라노(7.12)
#유럽여행 10일차 (2)
저녁으로 피자를 배불리 먹었으니 이제는 카페를 갈 시간이었다. 밀라노에 오기 전부터 우리가 갈 카페는 정해져 있었으니, 바로 '밀라노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Starbucks Reserve Roastery Milano)'. 2018년 9월 7일에 문을 연 이탈리아 첫 스타벅스 매장으로, 커피 종주국으로서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높고 상당히 까다로운 편인 이탈리아는 그전까지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스타벅스를 볼 수 없었던 나라였다. 제아무리 스타벅스라 해도 이탈리아에 상륙하기는 쉽지 않았는데 몇 년간의 피나는 노력으로 마침내 밀라노에 1호 매장으로 들어오게 됐다고 한다. 그렇기에 밀라노 스타벅스 매장은 다른 유럽 내 스타벅스보다 상징적인 의미가 큰 곳이고, '리저브 로스터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매장에서 직접 로스팅을 하는 매장으로 전 세계에서 딱 6군데만 있는 로스터리 매장 중 유럽에 있는 유일한 로스터리 매장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매장이기에 밀라노를 찾은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은 꼭 들르게 되고,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 행렬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밀라노 두오모에서 산책하듯 5분 정도 걸어가니 스타벅스가 나왔다. 가운데에 POSTE라고 적혀 있는데 원래는 우체국으로 사용되었던 자리를 새롭게 꾸며서 지금의 스타벅스가 자리 잡게 된 것이라고 한다. 기존에 있었던 현판을 떼지 않고 그대로 살려서, 외관은 역사적인 헤리티지를 고스란히 가져가고 내부는 스타벅스 로스터리의 감성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꾀한 게 제법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구에 도착하자 액션 영화에서나 볼 법한 덩치가 엄청 큰 가드분이 검은색 양복을 입고 서있었다. 처음엔 'VIP라도 온 건가? 지금 들어가면 안 되나..?' 싶어 살짝 겁먹었었는데 가까이 가자 문을 열어주면서 무심한 듯 친절하게 인사를 해주셨다. 얼떨떨한 환대를 받고 들어서니 높은 천장으로 시원한 개방감이 느껴지는 넓은 공간에 우드와 골드, 브론즈, 메탈이 조화롭게 자리 잡은 발랄하면서도 포근한 인테리어의 매장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한 색감이 아기자기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줬는데, 마치 <찰리와 초콜릿 공장>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천장에 설치된 각종 파이프들은 다른 스벅 매장에선 보지 못했던 독특한 구조물이었는데, 중앙에 배치된 거대한 로스팅 기계에서 커피콩이 볶아지면 천장으로 연결된 파이프를 통해 커피머신이 있는 카운터까지 연결되는 재밌는 구조였다.
저녁 늦은 시간에 가서 그런지 베이커리 종류는 많이 없었지만 대신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여유롭게 공간을 둘러볼 수 있었다. 엄마가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오빠와 내가 주문을 하러 갔다. 이미 저녁으로 피자를 먹었기 때문에 음료만 2잔 시킬 생각이었다. 카운터에는 두 명의 직원이 주문을 받고 있고 각 줄에는 3~4명씩 서 있었는데, '주문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네.'라는 생각이 언뜻 들긴 했지만 매장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다 보니 줄은 금방 줄어들었다. 카운터 앞에 와서 메뉴판을 보니 한국에선 볼 수 없었던 메뉴들이 즐비했다. 생각보다 많은 메뉴의 숲에서 정처 없이 눈을 굴리고 있으니 길게 기른 턱수염이 멋들어진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면서 먼저 말을 걸었다.
"Is this your first visit?"(첫 방문이세요?)
"Uh, Yes."(어, 네.)
그러자 직원은 개괄적으로 메뉴 설명을 해주고는 어떤 종류의 음료를 원하냐고 물었다. 커피 한 잔과 커피가 아닌 음료 한 잔을 주문하려 한다고 하자, 그럼 먼저 커피부터 설명해 주겠다고 했다. 콘파냐, 플랫화이트부터 알코올이 들어간 생전 처음 듣는 커피 메뉴까지 턱수염 직원의 상세하고도 친절한 커피메뉴 설명 끝에,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겠다고 하니, 이번엔 어떤 원두를 하겠냐고 물었다. 산미가 있는 걸 원한다고 하니까, 그럼 오늘 볶은 어떤 원두가 있는데 정말 맛있다면서 이걸 마셔보라고 권했다. 오케이, 좋았어. 커피는 정했고. 이제 커피 아닌 걸 고르면 되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은 '음.. 근데 이거 이렇게 오래 얘기해도 되나..?'였다. 최소 2분 이상은 얘기한 것 같아 슬슬 뒷사람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나의 걱정과 달리 턱수염 직원은 아무 문제없다는 듯 차분한 얼굴이었다.
논커피(non-coffee) 메뉴를 보자, 커피만큼이나 다양한 메뉴들이 메뉴판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우리가 또 한 번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을 하자, 우리의 지니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다시 한번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엔 커피를 고를 때보다 좀 더 다양한 선택지를 상세하게 물어왔다. 달콤한 걸 좋아하는지, 꽃향이 나는 걸 좋아하는지, 과일베이스를 좋아하는지 초콜릿 베이스를 좋아하는지, 탄산은 있는 걸 원하는지 없는 걸 원하는지, 우유가 들어간 걸 원하는지 안 들어간 걸 원하는지 등등. 메뉴를 가리키고 "What's this?"라고 물으면, 턱수염 직원은 만드는 방법과 들어가는 재료, 맛, 알레르기 여부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나를 물으면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이어지는 설명에 '세상에 이렇게나 친절한 직원이 있다고??' 하는 놀라움과 함께, 메뉴를 주문하면서 직원과 이야기하는 게 이렇게 재밌게 느껴지는 건 또 처음이었다. 보물 찾기를 하듯 음료를 찾아가는 과정이 게임 속 퀘스트 같기도 했는데 이 게임(?)에 진지하게 임하는 이탈리아 턱수염 직원의 순수한 열정이 고마워서 우리도 더 열심히 우리가 원하는 음료를 찾았다.
수많은 음료들의 호명 끝에, 낮에 더웠어서 청량한 걸 마시고 싶다니까 그럼 시즌한정메뉴로 나온 '시트러스 쉐이크'를 추천한다고 했다. 칵테일 쉐이커로 만들기 때문에 독특한 질감에 시트러스의 상큼한 향이 어우러져 깔끔하고 부드러우면서, 무엇보다 시즌한정메뉴이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오직 밀라노 스타벅스에서, 그것도 지금만 맛볼 수 있는 음료라는 점을 강조했다. 탄산도 있어 청량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딱 '그' 음료일 거라면서. 보통 추천을 받으면 그 가게에서 제일 비싼 걸 권하거나 제일 잘 팔리는 메뉴를 권해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이탈리아 턱수염 직원은 손님의 취향, 현재 손님의 기분과 상태에 맞는 맞춤형 음료를 추천해 주고 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진심이 진심으로 감동이었다.
주문을 하고 깨달았는데 이 턱수염 직원과 거의 5분 넘게 이야기를 했다. 신기하게도 우려했던 것과 달리 그동안 뒷사람으로부터 눈총을 전혀 받지 않았다. 우리가 관광객인 게 티가 나서 더 친절하게 응대해 주고 이해해 준 건가 싶어 자리로 돌아와 주문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원하는 메뉴만 바로 주문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1~2분 정도는 메뉴에 대해 물어보며 직원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우리 뒤에 있었던 사람들도 눈치를 주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카페에서 주문을 하면 최대한 빠르게 하고 나와주는 게 예의이고 주문시간이 보통 30초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데, 유럽은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물어보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친근하게 대화하는 게 자연스러운 문화이자 개인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도 손님과의 대화를 불쾌해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갖춰야 할 능력 중의 하나라고 인식하는 것 같았고. 낮에 손님이 몰리는 시간대에 오면 이런 여유는 찾아보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카페에서 주문할 때면 늘 조급하고 긴장하던 나로서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엄마가 마신 아메리카노는 좀 더 신선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맛은 한국에서 먹는 맛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시트러스 쉐이크는 이름대로 칵테일처럼 쉐이커에 흔들어서 음료를 만들었는데, 색감부터 그라데이션으로 참 예뻤다. 기대를 안고 한 모금 마셨는데, 와 목넘김이 정말 부드러워서 삼킬 새도 없이 스르르 넘어갔다. 쉐이커에 흔들면 이렇게 다 부드러워지는 걸까?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음료를 다 흔들어 마시고 싶다는 충동이 일 정도였다. 향도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에 가까워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시트러스 쉐이크는 너무 맛있어서 한 잔을 더 시켰다. 지금 안 먹으면 언제 다시 이 맛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시켰는데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 이때 이후로 이 맛을 한 번도 다시 보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와 한동안 이 시트러스 쉐이크가 생각나서 시트러스 향이 나는 비슷한 음료들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삶은 짧고 기회는 계속해서 내 앞을 스쳐지나가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때그때 다 해봐야한다는 우리 엄마의 명언이 제대로 들어맞은 대목이었다.
우리를 담당해 줬던 바리스타님, 곱슬한 머리에 턱수염이 있는 멋진 이탈리아 남자분이셨는데 서비스 태도도 음료제조도 완벽했던 분이었다. 마치 세계 최고의 카페에서 일하는 세계 최고의 바리스타라는 자부심을 풍기는 듯한 그 당당한 태도가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다음에 다시 가면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더 음료 추천을 받고 싶다. 이번엔 좀 더 느긋하고 여유롭게.
이분이 아직 근무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밀라노 스타벅스에서는 턱수염 직원을 찾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