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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Jul 08. 2023

밀라노는 하루론 부족해

이탈리아-밀라노(7.13)

#유럽여행 11일차 (1)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본 밤의 밀라노 두오모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밀라노에서의 첫날밤이자 마지막 밤이 찾아오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앞서 들렀던 런던과 파리와는 또 다른 이탈리아만의 유쾌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며 기분 좋게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유독 하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니 밀라노 두오모(대성당)였다. 숨이 멎을 듯한 광경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조명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순백의 두오모는 우아함과 청초함을 동시에 간직한 채 유유히 서 있었다.


사람들은 두오모 앞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낮에 햇살을 받아 달아올랐던, 바닥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뜨뜻미지근한 열기 속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밀라노에 하루만 머물다 가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광경이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이 하얀 건물에 대해 생각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외관이었고 강렬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대로 두면 하염없이 떠올릴 것만 같아, 내일을 기약하며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어제 봤던 밀라노 두오모를 볼 생각에 눈이 번쩍 떠지.... 진 않았고 침대에서 좀 더 뒹굴거리다가 지금 안 일어나면 큰일 나겠다, 싶을 때 슬쩍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부지런을 좀 떨어야 했는데, 오전에 두오모와 갤러리아를 들렀다가 점심때쯤 베니스로 떠나는 기차 이딸로(ITALO)를 타야 했기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호스트가 준비해 준 와인은 아쉽지만 숙소에 그대로 놔두고 케리어만 챙겨서 에이전시 사무실에 맡겨두고는 두오모로 향했다.


늘 폰으로 지도를 검색해서 다녔는데, 오늘은 어제와 같은 길로 가면 돼서 따로 지도를 보며 찾지 않아도 됐다. 동네파악이 끝난 후엔 이렇듯 여유가 생겨서 좋다. 선선한 아침공기가 가득한 숙소 근처 거리를 여유롭게 둘러보면서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데, 어제 닫혀 있었던 꽃가게와 빈티지한 카페가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싱그러웠다. 어제 처음 걷고 이제 겨우 두 번째 걷는 거리면서 그새 익숙해졌다고 이 동네 주민인양 괜히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낮의 밀라노 두오모는 어젯밤에 봤던 두오모와는 인상이 달랐다. 은은한 조명을 받고 빛나던 밤의 두오모가 우아하고 고혹적이었다면,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서있는 두오모는 눈이 시릴 정도로 화려했다. 아니, 화려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지극히 호화로움, 그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장엄한 기운이 깃들어있었다. 물론 아름다운 건 낮이나 밤이나 똑같았지만. 거대한 생크림케이크 같다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대성당 전체가 백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빛을 받으면 반짝이면서 빛났는데, 햇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 색감과 질감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어떻게 보면 노란빛에 가까운 매끈한 흰색이었다가 어떻게 보면 회색에 가까운 거칠거칠한 청색으로 보였다. 일반 아파트나 빌딩처럼 평평한 입면의 건물과 달리, 조각과 같은 장식이 들어간 입체감 있는 표면의 건물은 햇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랬다. 순간 클로드 모네가 그린 <루앙 대성당> 연작이 떠올랐다. 빛을 이용해 다채로운 순간들을 선사해 주는 건물 하나가 도시를 몇 겹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한국에서 미리 예매해 온 두오모 티켓은 입장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그때까지 시간이 남아서 두오모 앞 광장에서 사진을 찍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비둘기 반 사람 반인 광장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인생사진을 건져보겠다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엄마와 오빠와 나도 바지런히 포즈를 취하며 적당히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건져 올렸다.


그때 "저, 혹시 한국인이세요?"라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이거 지금 한국어 맞지?? 라는 놀라움과 약간의 경계심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니, 네이비 계열의 잔잔한 꽃무늬 롱원피스를 입은 20대 후반의 여자분이 아마도 우리가 지었을 비슷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엇, 네!" 라고 하자 그제야 만면에 웃음기가 번지면서 혼자서 여행 중인데 사진을 좀 찍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외국에서 혼자 다니면 힘든 점 중 하나가 사진을 찍을 때인데, 그래서 한국인을 볼 때마다 그렇게 반갑다고.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타국에서 만난 한국인은 그냥 이유 없이 그렇게 반가웠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어 주려는데, 갑자기 비둘기를 모는 아저씨가 모이를 뿌리면서 여자분 주위로 비둘기를 모았다. 그러면서 비둘기 모이를 계속 손에 쥐어주려 했는데, 여자분이 안 한다고 거절의 표시를 계속 보였음에도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모이를 손에 쥐는 순간 돈을 요구하기 때문에 거절을 한 건데, 그 사이에 비둘기는 주위로 어림잡아 최소 70~80마리가 모여들었다. 거대한 덩치의 회색 비둘기들이 집단으로 모여들어 정신없이 모이를 쪼아대니까 꽤 위협적이었다. 우리까지 합세해서 "No, don't do that."(하지 마세요)라고 했는데도 끝까지 따라왔다. 한 5분 정도 실랑이를 벌였을까, 그제야 비둘기 아저씨는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 여자분은 이런 상황이 단련이 됐는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포기를 모르는 태도는 때론 불쾌감을 넘어 공포를 느끼게 한다는 걸, 그렇기 때문에 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단호함은 필요하다는 것을 이 경험을 통해 배웠다.


밀라노 두오모 내부 모습


입장시간이 되어 성당 내부에 들어가자 생각보다 어둡고 서늘했다. 떠들썩한 밖과 달리 안은 옆사람의 숨소리가 들릴만큼 고요했는데, 벽 하나 차이로 이렇게 조용해지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기둥과 천장, 벽면은 나무, 돌, 금속 등 다양한 재료로 세밀하게 조각해 놓은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는데, 사람 얼굴 하나 표정 하나 몸짓 하나 그 어느 것도 같은 게 없었다. 이런 정교한 조각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까, 그 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조각가 옆에 앉아 하루종일 관찰만 해도 재밌을 것 같았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각자의 소망을 빌기 위해 이 공간을 찾았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웠다.


성당 내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테라스로 향했다. 유럽여행을 하다 보면 오래된 성당을 많이 가게 되는데, 오래되었다는 건 현대문명과 동떨어져있다는 걸 뜻하고 그건 전망대로 올라가는 리프트 따위는 없다는 걸 내포한다. 믿을 건 두 다리밖에 없는데 튼튼하든 후들거리든 어떻게 해서든 올라가야 한다. 좁고 가파른 계단과 복도를 일방통행으로 올라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상당히 힘들고 심리적으로도 압박이 된다. 그래서 보통 계단 입구에 안전요원이 서서 건강여부를 물어보고 확인이 된 다음 올려 보낸다. 그런데 밀라노 두오모에는 테라스까지 올라가는 리프트가 있었다. 여태까지 갔던 오래된 성당들에는 리프트 없이 몇 백개씩 되는 계단을 직접 올라가야 해서 당연히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모든 건축물에 이런 리프트가 있다면 여러 이유로 계단을 올라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리프트에 몸을 실었다.


(사진이 담지 못하는) 밀라노 두오모 테라스 풍경


테라스에서 본 풍경은 살면서 처음 본 생경한 장면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을 놀라게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양적으로 압도적이거나 질적으로 압도적이거나. 둘 중 하나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밀라노 두오모는 그 어려운 걸 둘 다 해냈다. 이걸 정말 사람이 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의 고도로 정교한 조각이 하나둘도 아니고 끝도 없이 도열해 있었다. 또 한 번 겸허해지는 순간이었다.


두오모 관람을 마치고 나와 옆에 있는 갤러리아로 들어갔다. 명품샵, 카페테리아, 레스토랑 등이 밀집해 있는 공간으로, 햇빛이 삭- 비쳐 들어오며 금빛으로 물든 갤러리아 내부는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무 데나 서서 막 찍어도 다 A급 화보가 될 것 같은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을 지녔는데 바닥 장식도, 벽에 붙은 창문 문양도, 천장화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만든 게 없었다.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다는 게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우스갯소리가 아니구나, 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내부와 프라다 본점에서 구매한 엄마의 지갑


그래도 패션의 도시 밀라노에 왔으니 프라다 본점에서 엄마 지갑을 구매했다. 카드슬롯이 꽃송이가 피어나듯 곡선으로 고아하게 둥글어져 있고 그 위에 그라데이션으로 채색된 색감이 아름다웠다. 이번에 나온 신상이라는 말과 밀라노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한정판이라는 말도 이목을 끌었지만, 그보다도 명품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혹하게 만드는 디자인의 힘이 있었다. 미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본능적인 거라 어찌할 수 없는 것일까. (이후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는 발에 채듯 널려있는 명품매장들을 편의점 드나들듯이 하게 되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돌이켜보면 그 첫 시작이 이 프라다 매장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역시 밀라노는 하루만 머물다 떠나긴 너무 아쉬운 도시였다. 오후에 베니스로 떠나는 기차와 숙소만 예약되어 있지 않았다면 즉흥적으로 며칠 더 머물렀을 텐데, 취소위약금은 이렇게나 매력적인 도시보다 더 위대했다. 밀라노는 거쳐가는 도시라고 생각해 애초에 기대자체가 없었어서 더 특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누가 밀라노는 하루면 충분하다고 했던가? 스포르체스코성도 못 가봤고 카놀리와 티라미수로 유명하다는 디저트 카페도 못 가봤고, 스칼라 극장도 브레라 미술관도 못 가봤는데.. 하지만 이렇게 아쉬워만 하기보단, 파리에서 만났던 가이드님 말처럼 아쉬움을 여운으로 치환하며 다음에 다시 밀라노로 돌아와야 할 이유를 남겨두고 가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음엔 밀라노에서만 최소한 일주일은 머물면서 여유롭게 둘러보는 걸로. 또 그땐 더욱 성숙한 어른이 되어있을 테니 쇼핑할 돈도 넉넉히 품고 오는 걸로. 하하.


잠깐이었지만 런던과 파리와는 다른, 어쩐지 더 따가워진 햇살과 거리도 옷도 사람도 다채로운 색감으로 뒤덮인 이탈리아를 살짝 맛보기로 본 듯한 느낌이었다. 이탈리아, 시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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