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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Sep 27. 2023

이십 년 후, 난 오늘의 이 베니스 피자집을 추천할까?

이탈리아-베니스(7.14)

#유럽여행 12일차


베니스 본섬 들어가는 날.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교통권을 구매하는 일이었다. 수상버스(바포레토), 버스, 트램 등 베니스 내 교통수단을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베니스 패스 2일 교통권이 필요했는데, 역이나 정류소를 찾아갈 필요 없이 거리 곳곳에 자판기처럼 설치되어 있는 ACTV 기계에서 구매할 수 있었다. 기계는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작동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오래된 세월감이 묻어 있다는 것이었다. 태초에 흰색이었을 기계는 누런색으로 변색되어 있었고 스크린은 얼룩덜룩한 얼룩이 군데군데 퍼져있었다. 흡사 2000년대 초반 공중전화를 연상케 하는 인상이었는데 다행히 조금 버벅대긴 했지만 작동도 정상적으로 되고 터치도 잘 인식했다. 카드를 넣고 요구사항에 맞춰 스크린의 버튼을 몇 번 누르자 기계는 순순히 교통권을 뱉어냈다.


베니스에 있는 이틀 동안 우리의 발이 되어준 소중하고 비싼(...!) 교통권


숙소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달려 베니스 본섬 입구에 도착했다. 특유의 물냄새와 약간은 올라간 습도를 느끼며 발걸음을 내딛는데 눈앞에 다리가 하나 나타났다. 코스티투치오네 다리(Ponte della Constituzione)로, 유리와 강철로 된 현대적인 디자인이지만 오래된 주황빛의 물의 도시와도 제법 잘 어울렸다. 육지베니스에서 버스를 타고 왔다면 반드시 건너게 되는 다리라 '베니스의 관문'이라고도 불리는데, 다리 밑으로 배가 지나다녀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경사가 꽤 가파르고 계단이 많았다.


다리를 삼분의 일쯤 건넜을 때, 저 앞에 땀을 뻘뻘 흘리며 전력을 다해 자전거를 끌고 가는 외국인 남자가 보였다. 자전거로 장기간 여행을 하는지 뒤쪽 선반에 자전거를 집어삼킬 기세의 큰 짐 세 개를 싣고 가는데 너무 힘들어 보여서 도움의 제스처를 취하고 뒤에서 밀어줬다. 그런데 오르막길을 어느 정도 오르고 나니 남자는 괜찮다면서 우리를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당신들이 이제 내 자전거에서 손을 뗐으면 좋겠다'는 그런 눈빛으로. 순간 당황스러우면서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우린 이상한 사람 아닌데.. 같은 여행자 입장에서 도와주고 싶은 것뿐인데... 하지만 저 사람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심할만한 상황이기도 했을 것이다. 갑자기 웬 동양인 세 명이 붙어서 도와준다고 하니까 소매치기는 아닌지, 도와주고는 돈을 요구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을 것이다. 특히 혼자니까 더 많은 경계심이 탑재되었을 테고. 나 또한 여행을 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주려는 누군가에게 이런 눈빛을 보낸 적이 있었겠지, 싶으면서 이 여행자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또 여행을 할 때 적당한 경계심은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니까. 상대방이 원치 않는 도움은 내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했다고 해도 불편함과 두려움을 유발하는 위협이 될 수 있다. 이 당연한 진실을 우린 종종 잊는다.


그래서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것까지만 도와주고 우린 손을 뗐다. 그리곤 각자의 길을 갔다. 알싸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잠깐동안 허공을 휘돌았다. 그래도 소중한 가치를 일깨울 수 있었던, 짧지만 강렬한 일화였기에 마냥 울적하지만은 않았다. 다행히 이런 헛헛한 마음은 베니스의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면서 차차 털어내졌다.




코스티투치오네 다리를 건너 본섬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수상버스를 타고 무라노섬으로 향했다. 본섬과 20분 거리에 있었는데, 유리공예로 유명한 만큼 섬 전체가 유리에 관련된 것들로 구성된 느낌이었다. 샹들리에부터 온갖 모양과 크기의 장식품, 유리잔, 캔들용기, 아기자기한 목걸이까지 모든 게 형형색색의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산책하기 좋은 거리들을 따라 공예품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마을 한 바퀴를 도는데 무리가 없었다.


무라노섬 거리 풍경과 유리장인들이 만든 독특한 유리수공예품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오묘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또렷하다기보단 희미하게 웅웅대는 것에 가까운 음률이었는데 묘하게 사람을 끄는 신비로움이 있었다. 소리를 따라가보니 청년 두 명이 수많은 유리잔을 앞에 두고 글래스 하프*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그늘에서 잠시 쉬어가며 연주를 감상하는데, 동화 같은 마을 분위기와 어우러져 비눗방울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환영이 느껴지는 듯했다. 연주가 끝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치며 준비된 통에 동전을 넣었다. 연주자와 관객들, 불과 몇 분 전까지 몰랐던 사람들은 같은 순간을 함께한 사람들로 묶여있었고 말하진 않았지만 편안한 미소 속에 같은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피어올라져 있었다.


*글래스 하프(Glass harp) : 서로 다른 음높이로 조율한 여러 개의 유리잔 테두리를 젖은 손가락으로 문지르거나 튕기거나 쳐서 연주하는 악기.


무라노섬 글래스 하프(Glass harp) 버스킹. 어떤 곡인지 알고 싶다면 43초부터 보시길!


무라노섬을 뒤로하고 다시 수상버스를 타고 약 30분 거리에 있는 부라노섬으로 향했다. 색색깔의 페인트로 칠해진 알록달록한 집들이 독특한 풍경을 자아냈다. 없는 색 빼고 다 있다는 그 섬. 마을 전체가 아기자기한 테마파크 같았는데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는 생활구역이니 조용히 구경해 달라는 표지판이 곳곳에 꽂혀 있었다. 그 덕분인지 꽤 많은 수의 관광객들이 섬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그 수에 비해선 그리 시끌벅적하진 않았다.


알록달록한 집들이 인상적인 부라노섬


레이스가 유명한 섬답게 레이스로 직조한 스카프, 원피스, 손수건, 커튼 등이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패션과 인테리어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그냥 지나쳐가려 하는데 엄마가 한 옷가게 안으로 쏙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자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운 옷들이 한아름 눈에 들어왔는데, 가정집을 개조해서 집 한쪽을 가게로 만들고 천 뒤의 뚫린 벽으로 들어가면 집으로 바로 이어지는 특이한 구조였다. 할머니 사장님은 한편에 놓인 의자에 앉아 연신 손을 놀리며 레이스를 짜고 있었고 옷에 대해 물어보면 사이즈가 맞는지 확인하고 마음에 들면 가져가라, 는 식의 세상 쿨한 분이셨다. 치수도 따로 없고, 똑같은 디자인도 없고, 말 그대로 세상에 딱 한 벌밖에 없는 옷들이었는데, 그래서 더 이야기가 있는 작품처럼 느껴지는 옷이었다.


하나 사고는 싶은데 옷 보는 눈이 없어 어떤 옷도 고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는데, 엄마가 쓱 스캔을 하더니 연한 베이지색의 레이스 원피스를 골라냈다. 할머니도 나를 힐끔 보시더니 나한테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눈썹을 들썩여 보이셨다. 그래도 안 입어보고 사긴 좀 그래서 입어봤는데 엄마가 보더니 딱이라면서 바로 구매했다. 사실 내가 “음.. 괜찮긴 한데, 다른 데도 좀 보고 와야 하지 않나?” 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이미 내 손에 옷이 들려져 있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일 테지만..


그런데 섬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니 오후 4시도 안 됐는데 이미 섬의 모든 가게 문이 다 닫혀있었다. 생각 좀 해보겠다며 여유를 부렸으면 사고 싶어도 못 살 뻔했다. 엄마는 '거 봐~' 하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고, 난 엄마의 빠른 판단력에 박수를 보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을 땐 순발력 있게, 보일 때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늘 나를 기다려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아, 물론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이 레이스 원피스는 지금까지도 잘 입고 있다. 이태리 장인이 한땀한땀 만든 옷이라는 스토리 한 스푼을 얹어서 말이다.



수상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려 다시 본섬으로 돌아왔다. 걷는 거리마다, 보이는 풍경마다 말도 못 하게 너무 아름다웠고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펼쳐졌다. 여러 영화의 배경이 되었기에 거대한 세트장 같기도 했는데, 저기 저 보트를 타고 가는 남자는 어디 CIA의 요원이고 그 옆의 여자는 총알을 장전중인가..  첩보 작전 중인가 싶고.. 액션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싶고..


산마르코 광장과 대성당의 낮과 밤


걷다 보니 찾아서 온 것도 아닌데 베니스의 중심부인 산마르코 광장과 대성당, 그리고 두칼레 궁전에 도착했다. 시원스레 펼쳐진 직사각형의 광장이 수많은 관광객들을 품었고, 야외 광장 테라스에선 악사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손님들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켜놓고 연주를 감상했다. 해가 저물고 낮의 열기가 식어갈 때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며 낮과는 또 다른 화려한 밤의 베니스가 사람들을 맞았다.



차도가 없이 인도만 있고 물길에서 수상버스와 곤돌라를 타고 다니는 물의 도시, 베니스.

도시 구조 자체가 타 도시들과 매우 다른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엔 매우 낯설었지만 반나절 정도가 지나자 이내 적응됐다. 걷기에 최적인 도시, 골목을 돌 때마다 아치형의 작은 다리들이 놓여있고 차를 피할 걱정이 없는 도시, 사람이 도시에 들어가기보단 이 도시가 점점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신비한 도시, 라는 게 내가 베니스에 대해 받은 일련의 인상이었다.


베니스는 꼭 봐야 하는 명소가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찾아다니기보단 사람들 틈에 섞여서 걷다 보면 어? 이게 여기 있네? 싶고 또 어느새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며 내 옆에 가까워져 있는, 그런 곳이었다. 두칼레 궁전도 산마르크 광장도 탄식의 다리도, 하물며 리알토 다리까지 다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마치 물의 흐름을 따라 곤돌라가 흔들흔들 나아가는 것처럼 그저 사람들의 흐름에 맡기면 되는 도시, 베니스는 그런 도시였다.



지나가는 가랑비를 맞으며 좁은 골목골목을 찾아들어가 먹었던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스프리츠 와인. 작은 가게 안, 바 자리와 테이블 자리 모두 사람들이 꽉 차 있어서 북적북적한 분위기 속에서 먹었는데 무슨 소규모 모임에 초대받은 것 같아 이 또한 운치 있게 느껴졌다. 아침부터 뜨거운 여름 햇살을 맞으며 베니스 거리를 걸어 다니며 쌓인 노곤함이 소담하게 담아낸 주방장의 솜씨에 다 녹아내리는 듯한 아늑한 시간이었다.


유럽에 대해 들었던 말들 중에 그런 말이 있다. 젊었을 때 부모가 유럽여행에서 먹은 피잣집을 이십 년이 흐른 후 유럽여행을 떠나려는 자녀에게 추천해 줄 수 있다고. 왜? 유럽은 몇 년 후, 몇십 년 후에 와도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니까. 십 년 전에 와서 봤던 건축물이 그대로 서 있고 이십 년 전에 와서 먹었던 그 피자가게가 그대로 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는 현대사회에서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한 도시라니,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진 인간의 욕망에 부합하는 참으로 이상적인 도시이지 않을까. 모든 것엔 장단점이 있겠지만 프랜차이즈와 빠른 트렌드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에겐 좀 더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이십 년 후, 난 누군가에게 오늘의 이 베니스 피자집을 추천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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