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베니스(7.15)
#유럽여행 13일차
베니스라는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선 며칠이면 충분할까? 우리는 3일 동안 머무는 걸로 계획을 했는데 다녀보니 사실상 관광지로써의 베니스는 생각보다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다. 이틀째였던 어제 하루동안 무라노섬&부라노섬&본섬까지 베니스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을 다 둘러보고 나니 솔직히 말해, 급격하게 열의가 식었다. 사실 리알토 다리도 마음만 먹으면 어제 다 볼 수 있었는데 이곳이라도 남겨두지 않으면 베니스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하는데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일부러 남겨놓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쉽사리 베니스를 떠날 수도 없었다. 베니스에 머무르는 3일 동안의 숙소도, 다음에 이동할 도시인 피렌체에서의 숙소와 기차표도 미리 다 예약을 해놨기 때문에. 환불을 하고 다시 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구할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면, 어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일 오전까진 베니스에 머물러야 했다. 그렇다고 기껏 집을 떠나 여행을 왔는데 숙소에만 있기엔 아쉬웠다. 그래서 4시까지 숙소에서 쉬다가 오후쯤 준비해서 본섬에 들어갔다. 참 웃기게도 무언가를 다 봤다고 생각하니까,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베니스가 시시해졌다. 그렇게 오고 싶어했으면서. 궁금해했으면서.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난 베니스에 대해 쥐뿔도 몰랐다. 길을 잃기 전까진.
오후의 베니스 거리는 한적했다. 어제 처음 왔으면서 그새 적응됐다고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넓은 길 말고 둘러서 가는 좁은 길로 가면서 구석구석 골목길의 숨겨진 풍경들을 찾아냈다. 어릴 적 어항에 구피를 위해 만들어준 물속 도시가 실사판으로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가는 곳마다 새로운 색감과 형태의 전경이 펼쳐졌고 보석을 찾은 사냥꾼처럼 폰의 셔터 단추를 눌러댔다.
하지만 이런 재미도 잠시, 향수병이 난 건지 오만해진 건지 체력이 바닥난 건지 알 수 없는 돌덩이 같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거리를 걸으면 걸을수록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강렬해질 뿐 지나가는 사람들의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미소도, 아름다운 건물의 잔영이 넘실대는 잔잔한 운하도 점점 무채색으로 느껴졌다. 여행을 다니면서 이처럼 지루하고 걸음이 처지는 건 또 처음이었다.
그래도 걸음은 부지런히 옮겨져 어느새 리알토 다리에 이르렀다. 오래전부터 리알토 다리 주변은 상권의 중심지였는데, 리알토 시장이 성행하자 넘쳐나는 상품들과 대운하를 건너려는 사람들의 수요를 배가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다리 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오랜 시간에 거쳐 부유식 교량에서 목조 교량으로 변천을 거듭하다가 지금의 석조 아치교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 한다.
리알토 다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대운하와 다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배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물멍 불멍 때리듯이 풍경멍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윤슬은 반짝이고 곤돌라는 흔들리고 다리 위는 미어터지고.. 하하. 다리중앙 자리는 인기가 많아서 금방 비켜줘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마치 명화 속에 들어온 행인 1이 된 느낌이었다.
리알토 다리에서 내려와 거리를 걸었다. 가면무도회로 유명한 도시답게 거리 곳곳에 독특한 가면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는데 다채로운 모양과 색깔만큼이나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몇 천 원부터 몇 십만 원, 비싸면 몇 백만 원까지도 있었다. 특히, 장인이 수제로 만든 한 가게는 엄격하게 촬영을 금지했는데 제일 저렴한 가면이 십만 원대였고, 제일 비싼 가면이 몇 천만 원 대였다. 흠, 아마 가게 안쪽엔 억 단위의 가면도 있지 않을까..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물론 품질과 독창성이 여태까지 본 그 어떤 가면에 견주어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수긍이 가는 가격이었다. 그만큼 베니스라는 도시가 가면에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반면, 베니스는 젤리와 가면은 비싼데 의류는 정말 저렴했다. 베네통 옷이 2만 원, H&M이 8천 원..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싶을 정도로 세일가가 파격적이었다. 그것도 몇 개 남은 옷을 미끼상품으로 두는 게 아니라 정상가로도 살 것 같은 괜찮은 옷들이 70~80%의 할인가로 세일중이었다. 여러모로 쇼핑하기 참 흥이 나는 동네였다.
쇼핑거리를 지나 걷다 보니 어제 왔었던 산마르코 광장까지 오게 됐다. 여전히 아름다웠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로웠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모두 엽서의 한 장면이었다. 다행히 처졌던 기분도 조금씩 회복되는 것 같았다. 잠깐동안 눈앞에 펼쳐진 순간을 마음에 담고 수상버스를 타고 광장 건너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 있는 곳으로 건너갔다. 무제한 교통카드를 그 값만큼 이용하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고 지나다닐 때마다 저편이 궁금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달콤한 케이크에 곧 흘러내릴 듯 생크림이 듬뿍 얹힌 모양의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설명에 걸맞게 사람의 이목을 끄는 먹음직스러운 외관이었다.
인기 있는 코스는 아닌지 성당 앞 선착장에 우리만 내렸다. 하지만 거기가 진짜 숨겨진 베니스였다. 해질녘의 베니스는 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러웠다. 골목 사이를 지나다니는 조그만 배, 운하 위를 연결하는 작은 다리들, 노랗고 빨갛고 파란 집들.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달콤한 향기가 느껴지는 낭만적인 골목들이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리워진 공간을 타박타박 걸어 찾아올 모험심을 가진 여행자들을 위해.
점점 날이 저물어가면서 물가의 오렌지색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광장에서 성당쪽으로 건너와서부터는 지도를 보지 않았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주택가와 갤러리가 모여 앉아 있는 골목길은 고요했고 따뜻한 주황색 불빛 아래에서 와인 한 잔, 맥주 한 잔씩 마시면서 소담소담 얘기 나누는 사람들, 조용히 사진기에 풍경을 담는 사람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순간이 영원이 되었으면 좋겠을 장면들이 펼쳐졌다.
낮에 시시하다며 투덜댔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나의 섣부른 판단을 사과하고 싶어질 만큼 베니스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도시였고 떠나기 싫어질 만큼 베니스의 밤은 아름다웠다. 길을 잃고 비로소 길을 찾은 느낌이랄까. 누군가 베니스를 간다고 하면 해질녘부터 시작해 밤까지 이어지는 그 순간을 느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지도를 보며 애써 길을 찾으려 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걷다가 나만의,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경험을 꼭 해보기를.
이 풍광을 보려고 길을 잃었던 것 같다. 나에게 베니스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고 앞으로도 바뀔 일은 없을 것 같다. 길을 잃었을 때 비로소 베니스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고, 잃음의 끝에 이름 모를 다리 위에서 보게 된 노을은 눈이 부시게 황홀했다.
돌아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꼭 다시 오고 싶다.' 여행을 하면서 과거의 사람과 여행길에서 만나는 현재의 사람에 대한 생각은 많이 했는데, 미래에 만나게 될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건 처음이었다. 괜히 베니스를 사랑과 낭만의 도시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없던 사랑도 빚어낼 수 있을 힘을 가진, 여태까지의 도시들과는 또 다른 새로움을 심어주는 도시였다. 이렇게 낭만적인 길잃음이라니. 몇 번이고 다시 잃고 싶었다. 마지막에 정들어버린 베니스, 다음엔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