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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Jan 17. 2024

체감 경사 80도의 달콤살벌 피렌체 계단

이탈리아-베니스 -> 이탈리아-피렌체(7.16)

#유럽여행 14일차 (1)


피렌체로 떠나는 날. 오후 1시 17분, 정차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도 매끈하게 생긴 이탈리아의 빨간 기차, 이딸로였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번쩍번쩍한 광을 뽐내며 다가오는 기차를 보며 '와, 이 정도 세차실력이면.. 배워가서 한국에서 하면 대박 나겠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뚤뚤 굴러갔다. 이천의 특산품이 반도체라면 베니스의 특산품은 세차이지 않을까.. 라는 의식의 흐름과 함께..



자리에 앉자마자 곯아떨어져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피렌체에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어떻게 우리 도착지는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 깨서 캐리어존의 가방을 꺼내 내릴 준비를 하러 복도로 나갔다. 다행히 러시아인 커플 한 팀만 있고 아직 붐비지 않았다. 그런데 캐리어 앞에서 러시아인 커플이 화난 표정으로 무어라 자기들끼리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원래는 캐리어를 한 줄로 세워놓는 방식이었는데, 자리가 없었는지 기존에 있던 캐리어 위에 서너 개 정도의 캐리어가 더 쌓여있었다. 본인들의 캐리어가 제일 밑에 있는 모양이었는데, 그때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가 손잡이를 잡더니 밑에 있던 자신의 캐리어를 힘으로(!) 쑥 빼냈다. 테트리스처럼 쌓여있던 캐리어탑은 맨 밑바닥을 지지하던 조각 하나가 빠지자 와르르 무너졌다.


그 바람에 위에 있던 캐리어 2개가 복도로 떨어졌고 나머지 캐리어들도 기우뚱한 자세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가 자기 가방만 챙겨서 바로 가는 게 아니겠는가?! 여자가 신경이 쓰였는지 뒤돌아보면서 남자에게 제자리에 넣고 가야 하지 않냐고 하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말했다.


"Это не наши, просто остави."(우리 거 아니니까, 그냥 놔둬.)


그렇게 두 사람은 널브러져 있는 캐리어를 그대로 두고 자리를 떠났고, 복도에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소중한 캐리어들이 나뒹굴었다. 자기 짐만 가져가고 내 거 아닌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심보의 말로일 테지. 물론 내 것도 아닌 무거운 캐리어를 정리하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여행을 하는 동안 그 또한 무수한 사람들로부터 보이는, 또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았을 것이고 내 캐리어가 저렇게 나뒹굴면 기분이 어떨까 한번 더 생각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언어를 안다는 건 대체로 용이하다. 하지만 이럴 땐 차라리 러시아어를 알아듣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선택적 듣기가 가능하다면 참 좋을 텐데 이상하게 이런 건 참 잘 들린단 말이지..




캐리어존에서의 작은 소동을 뒤로하고 피렌체의 중앙역, 산타마리아노벨라역에 도착했다.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따라 캐리어를 들고 내리니 넓고 포근한 인상의 역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우와, 도 잠시 사람들로 붐비는 역에서 캐리어 끌랴, 소매치기 조심하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됐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었다. 한쪽 구석에 캐리어를 몰아넣고 펭귄들처럼 둥글게 모여 서서 답장을 기다렸다. 그렇게 10분, 15분, 20분... 어라? 답장이 오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만 연락되던 호스트가, 오늘 도착시간도 다 알려줬는데 왜 연락이 안 되는 건지... 처음엔 마냥 신나서 까르르 웃던 우리 얼굴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점점 흙빛으로 변해갔다.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알려준 숙소 앞까지 가보기로 했다.


지도로 좌표를 찍어보니 걸어서 8분 정도 거리였다. 택시를 부르기엔 애매한 거리여서 걸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우린 전혀 몰랐다. 피렌체의 돌바닥이 얼마나 성능 좋은 과속방지턱인지!


캐리어 바퀴를 박살내기로 악명 높은 피렌체 돌바닥을 몰랐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덜덜거리면서 피렌체 돌바닥을 걸어갔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가려니 시간은 배로 걸렸고, 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마치 마트 카트를 아스팔트 도로에서 끌 때 나는 소리와 유사했다. 거짓말 안 하고 그 거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은 다 우리를 돌아봤다. 미안함과 민망함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숨을 골랐다. 이방인을 격하게 환영해 주는 피렌체에 헛웃음이 났다.


겨우 숙소 앞에 도착해서 호스트에게 연락을 했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지.. 호스트는 연락을 받지 않았고 커다란 캐리어 3개와 함께 길가에 우두커니 남겨진 우린 강렬한 피렌체 햇살만큼이나 초조해졌다. 그렇게 또 10분이 경과되고, '사기당했다..!' 라는 강한 확신을 가질 즈음 갑자기 "hello"라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키 크고 잘생긴 이탈리아 남자였는데 멀리서부터 뛰어왔는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우리의 호스트였다! 늦어서 미안하다면서 사과를 하는데 방금 전까지 몰아쳤던 원망과 분노가 눈 녹듯 사라졌다. 갑자기 새 숙소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숙소 사기가 아닌 게 어디야, 싶은 마음에 그저 안도감만 들 뿐이었다. 늦게 왔는데 화는커녕 온화하게 맞아주는 손님들에 호스트도 살짝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호스트도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호스트가 다른 숙소도 운영을 하고 있어서 도착시간이 비슷한 여행객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연락이 늦어진 거였다. 우리의 '친절한 호스트'는 숙소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해주고 바쁜지 또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들어간 중앙현관. 이번엔 돌계단이 우릴 맞이했다. 돌바닥에 이어 돌계단. 피렌체는 '꽃'의 도시가 아니라 '돌'의 도시였다. 근데 4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계단 경사는 어떻게 된 일이지..?


자고로 계단이라면 아래층에서 위층이 보여야 하는데, 천장은 낮고 계단은 좁고 경사가 매우 가팔라서 아래층에서 보는데 위층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이거 넘어지기라도 하면 정말 천국의 계단 될 수 있겠는데..? 나영석 pd 예능에서 미션에 실패하면 화면이 암전 되며 '끝'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대로 여행 '끝' 되는 건가..? 아니, 부비 트랩이야 뭐야..? 가만. 우리의 '친절한 호스트'씨가 바빠서 간 게 아니라 캐리어 들어주기 싫어서 도망간 거였나?!! 합리적 의심이 들면서 잘생긴 이탈리아 남자가 급작스레 원망스러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어쩌랴, 집은 가야지.. 그렇게 또다시 돌덩이 같은 캐리어를 낑낑거리면서 체감 경사 80도의 달콤살벌한 계단을 등반했다. 무려 5층 같은 4층 꼭대기까지.. 하하..



옥상달빛은 덤덤하게 노래했더랬지. "힘든 일은 왜 한 번에 일어날까..." 정말 말도 못 하게 힘들게 올라오니 이젠 현관문이 말썽이었다. 열쇠를 넣고 돌리는데 계속 헛도는 느낌이 들었다. 15분 정도 씨름했을까, 열쇠도 돌고 우리도 돌겠고. 반포기 상태로 호스트에게 연락을 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찰나, 끼익, 하고 옆집에서 누군가 나왔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80대 정도 된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께서 나오셨는데 동양인 세 명은 예상을 못하셨는지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탈리아어로 뭐라 말씀하시는데 안타깝게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영어로 문이 안 열린다고 설명하니까 이번엔 할아버지가 난감한 기색이다. 음, 그러니까 우린 이태리어를 전혀 못하고 할아버지께선 영어를 전혀 못하신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열쇠를 가리키곤 문에 갖다 대면서 안 열린다는 시늉을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연기를 넣어가며 마임을 선보였다. 약간의 버벅거림은 있었지만 다행히 찰떡같이 알아들으셨다.


할아버지께서 열쇠를 꽂고 슥슥 몇 번 돌리니까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우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니까 할아버지께서 신이 나셨는지 문을 잠그고 다시 여는 방법을 이태리어 설명을 곁들여가며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유럽 열쇠는 한국과 달리 적당한 감으로 넣어서 열쇠를 두 바퀴 이상 끝까지 돌려야 했다. 오빠의 실습까지 다 끝내고 나서야 할아버지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시면서 본인 집으로 들어가셨다. 잠깐 머물다 가는 거지만 옆집에 좋은 이웃이 산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마침내 모든 미션이 끝났다. 돌바닥에 돌계단에 열쇠까지. 피렌체, 거 참, 숙소 한 번 가기 힘드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우드앤화이트로 밝고 클래식한 분위기의 집이 우리를 맞았다. 미디어에서 많이 보았던 딱 이탈리아 가정집 같은 모습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미디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묘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나와 Buon giorno! 하고 인사해 줄 것만 같았다.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모든 물건들이 꼭 있어야 할 위치에 실용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테라스는 없었지만 창밖으로 피렌체 특유의 붉은 지붕과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하는 골목이 내려다보였다. 정말 피렌체에 왔구나,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호스트는 없었다. 이분은 천사인가 요정인가.


무엇보다 놀랐던 건, 호스트가 꽉꽉 채워놓은 과일과 간식들이었다. 식탁 위에 과일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는데 무슨 정물화처럼 다소곳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처음엔 모형인 줄 알았다. 과일 종류도 청포도, 바나나, 키위, 사과, 서양배 등 다채로운 구성이었다. 


냉장고 안은 더 놀라웠다. 음료수 서너 종류와 생수, 우유, 요거트, 심지어 버터까지! 조리대 위에는 식빵, 크로와상, 머핀, 씨리얼에 발라먹을 쨈과 꿀이 종류별로 있었다. 화룡점정은 레드와인이었다. 역시 이탈리아 아니랄까 봐! (이 와인은 나중에 닭요리할 때 아주 요긴하게 썼다.) 아마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같은 4층에, 무자비한 돌계단을 3박 4일 동안 오르락내리락해야 할 손님을 위해 준비한 작은 정성이 아니었을까.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유럽여행을 통틀어 피렌체 호스트만큼 세심한 호스트는 없었다. 돌계단에서 신임을 잃을 뻔했지만 우리의 '친절한 호스트'는 진실로 좋은 사람이었다.


숙소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충분히 다디단 피렌체 숙소와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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