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밀라노 -> 이탈리아-베니스(7.13)
#유럽여행 11일차 (2)
오전에 밀라노 두오모 투어를 마치고 베니스로 이동하기 위해 밀라노 중앙역으로 향했다. 천장이 높은 기차역 내부는 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웅웅 울려댔고, 알록달록한 캐리어들은 매끈한 대리석 바닥을 따라 슝슝 지나갔다. 전광판 앞은 플랫폼을 확인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로비는 떠나는 사람과 도착하는 사람이 바쁘게 뒤섞이면서 역 특유의 독특하고도 고유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의 SRT와 비슷한 이탈리아 기차 '이딸로(ITALO)'를 예매해 놨는데 시간이 남아 역내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기다렸다. 한국에서 먹는 간식 정도를 생각하고 시켰는데 빵 사이에 들어간 내용물이 얼마나 두툼하던지, 3명에서 2개를 먹는데도 다 먹지 못했다. 심지어 빵조차 부드러운 식빵이 아니라 통곡물로 만든 거친 식감의 밀도가 높은 식빵이었기에 포만감이 더욱 극대화됐다. 유럽사람들에게 빵은 주식이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게 되었다.
남은 샌드위치를 잘 밀봉해서 가방에 넣고 출발시간에 맞춰 플랫폼으로 갔다. 고풍스러운 미술관을 연상하게 하는 밀라노 중앙역을 보고는 털털거리는 오래된 기차가 오려나 했는데, 웬걸? 번쩍번쩍 광이 나는 빨간색의 늘씬하게 생긴 기차가 플랫폼 안으로 들어섰다. 이탈리아와 첨단기술이라.. 뭔가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지만 베니스까지 쾌적하게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기차에 오르면서 느낀 설렘도 잠시, 타자마자 캐리어 자리 쟁탈전이 소리소문 없이 벌어졌다. 복도와 객실 앞뒤에 캐리어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비교적 작은 캐리어를 든 사람은 만만한 자리를 고르기 쉽지만 25인치 이상 캐리어를 든 사람은 놔둘 수 있는 자리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빠른 자리 스캔이 필요했다. 캐리어와 함께 출발하는 기차 객실 한복판에 오도카니 남겨지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길 원한다면... 하지만 캐리어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은 이미 80% 정도가 차있었고, 그나마도 복도공간은 좌석에 앉았을 때 캐리어가 보이지 않아 분실의 위험이 있었다. 치열한 눈치싸움 끝에 우린 그냥 좌석칸의 선반 위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약 11일 동안 열심히 끌고 다닌 캐리어들은 런던과 파리, 밀라노를 거쳐오며 뚱뚱해질 대로 뚱뚱해진 상태였다. 30kg에 육박하는 캐리어를 선반 위에 올리려고 세 명이 낑낑댔다. 설상가상 서양인들의 키에 맞춰 설계되어서 그런지 한국 기차보다 선반이 훨씬 더 높은 것 같았다. 겨우 캐리어 3개를 제자리에 위치시키고 한숨을 돌릴 때, 저 멀리 한국인 여자 두 명이 보였다. 20대 초반,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는데 둘이서 여행을 온 것 같았다. 조금 전 우리의 모습처럼 25인치 정도 되는 캐리어를 선반 위에 올리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반 근처는커녕 드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도와줘야 하나 싶은 그때, 지나가던 체격 좋은 금발의 남자가 '도와줄까요?' 라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장난감 상자 들듯 가뿐하게 캐리어를 들어 선반 위에 얹고는 쿨하게 떠났다. 오... 내 말랑한 팔뚝이 조금 수줍어지는 순간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절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들도 물 흘러가듯 해결될 때가 많다. 도움을 받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다 방법이 생긴다. 사람 사는 동네가 다른 듯 보여도 다 비슷비슷하다. 그러니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런 여행의 순간들이 일상에 스며들어 좀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으로 여행의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기차의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금발의 남자에게 마음속으로 '땡큐!'를 같이 외치면서 자리에 앉았다.
서서히 이딸로가 선로를 따라 움직이더니, 자고 있는 동안 저 홀로 한참을 달려 베니스 메스트레역에 도착했다. 13시 30분에 밀라노에서 출발해 베니스에 도착하니 15시 40분 정도가 되었는데, 에이전시 사무실에 들러 예약해 놓은 에어비앤비 숙소 키를 받고 숙소에 도착하니 어영부영 17시가 다 되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저녁 야경이라도 보기 위해 베니스 본섬에 들어갈 건지, 아니면 본섬은 내일 들어가고 오늘은 숙소에서 쉴 건지.
여기서 잠깐, 베니스 구역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베니스는 흔히들 베니스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본섬 지역과 본섬 밖 육지 구역, 일명 '육지베니스'라 불리는 메스트레 지역으로 나뉜다. 본섬은 운하와 곤돌라가 있는 관광지역이고, 메스트레는 현대적인 건물이 있으면서 교통이 편리하고 물가가 싸서 여행자들이 주로 숙소로 이용을 많이 하는 곳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비용으로 여행하길 원하고 단기체류를 하는 여행자들은 메스트레에 숙소를 두고 낮엔 메스트레와 본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가서 본섬을 구경하고, 밤엔 메스트레로 와서 자는 게 일반적인 형태였다. 물론 본섬에도 숙소가 있지만 유구한 도시의 역사에 비례해 건물이 오래된 곳이 많아 최고급 호텔을 제외하면 시설이 열악한 곳이 많고 돌바닥과 계단이 많아서 캐리어를 들고 이동하기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다. 가격도 메스트레에 비하면 2~3배 정도 비싸다. 대신 숙소에서 나오면 바로 본섬 여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늦은 밤과 이른 아침, 현지인들만 볼 수 있는 베니스의 풍경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결국 취향과 선호의 문제이기 때문에 베니스에서 숙소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을 하면 된다. 우리는 합리성을 중요시하는 소비자이자 3일 후에 피렌체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메스트레 지역에 숙소를 잡았다. 그렇기 때문에 물의 도시 베니스의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본섬에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들어가야 했고,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하루하루가 돈으로 환산되는 여행자 입장에선 흘러가는 1분 1초의 시간이 아쉬운 처지라, 처음엔 1~2시간밖에 본섬구경을 하지 못하더라도 가려고 했었는데 이제 여행의 삼분의 일 지점을 넘고 있는 시점이라 다들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지쳐올 때였다. 앞으로 삼분의 이의 여행기간이 더 남아있었기 때문에 체력안배와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고, 여태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에 무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내일과 모레는 싫어도 베니스에서 꼼짝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기에. 이런 일련의 이유들로 우리는 이쯤에서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쉬는 쪽으로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확 놓여서 그런지 몸이 나른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숙소 안에만 있긴 또 아쉬워서 우린 '육지베니스'라 불리는 메스트레 지역을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마침 숙소 바로 앞에 큰 마트가 있어서 저녁거리도 살 겸 구경도 할 겸 슬렁슬렁 산책을 나갔다.
마트에 들어가자 싱싱한 과일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평소 쇼핑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같은 식재료라도 모양과 빛깔, 향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신세계였다. 파스타의 고장답게 80m 정도 되는 거대한 진열대 하나가 전부 면 종류로 가득 차 있었다. 건면과 생면의 구분에서부터 길쭉, 넓적, 조개껍질, 리본, 나비, 번데기, 공룡, 고래, 사자, 토끼, 연필 등 온갖 모양과 초록, 노랑, 검정, 주황, 빨강, 보라 등 색색깔의 파스타가 30개가 넘는 브랜드를 달고 질서정연하게 나열되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백미, 현미, 흑미, 홍미, 찹쌀, 멥쌀 등의 쌀 종류를 보고 놀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려나?
신나게 쇼핑을 하고 계산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폭우가 내렸다. 천둥까지 치면서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마냥 매섭게 비가 쏟아졌다. 비 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었는데 당황스러웠다. 다른 사람들도 황당하기는 매한가지였는지, 마트 입구에서 우산이 없는 여행자들과 현지인들이 뒤섞여 서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숙소를 못 가서 입 벌리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처지라니.. 그 와중에 어린아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물웅덩이를 발로 첨벙첨벙 밟으며 신나게 뛰어놀았다. 아이들은 국적불문하고 참 해맑았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땐 나도 비 맞으면서 놀았던 것 같은데 이젠 비와 눈이 오면 걱정부터 하게 되는 걸 보면, 어른이 다 됐나 보다. 하하.
다행히 비는 20분가량 퍼붓더니 숙소까진 살짝 뛰어가면 될 정도로 잔잔히 왔다. 오늘의 저녁메뉴는 스테이크와 샐러드. 숙소에 도착해서 고기를 구우려는데, 팩을 뜯자 이탈리아 소고기의 낯선 빛깔과 향기가 오감을 통해 훅 들어왔다. 한우보다 좀 더 빨갛고, 비계가 적고, 마블링은 거의 없고, 고기 특유의 비린향도 처음 맡아보는 향이었다. 셋 다 부엌에 서서 처음 발견한 괴생물을 관찰하는 과학자마냥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색감도 비교하면서 한참을 오.. 하면서 요리조리 둘러봤다. 이윽고 유럽은 고기가 한국보다 저렴하니까 많이 구워먹을거라면서 <고기 맛있게 굽는 법>을 공부해온 고기러버 오빠가 능숙한 솜씨로 고기에 칼집을 낸 후 올리브유에 랩핑해서 냉장고에 20분 숙성시킨 다음, 프라이팬에 치이익- 구웠다. 굽히는 소리는 국적불문 누구나 다 아는 그 '치이익-' 소리였다.
꽤 근사한 저녁 식사가 차려졌다. 10일 동안 쉼 없이 움직였는데 여행을 시작하고 첫 휴식이었다. 소고기가 한국의 돼지고기 가격이라는 것도, 밀라노에 이어 베니스 숙소도 현대식 인테리어라는 것도, 접시와 집기류가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어 요리를 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는 것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깔깔거리면서 그동안 있었던 웃기고도 당황스러웠던 순간들을 돌아보며 앞으로 있을 여행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혼자 하는 여행은 모든 걸 '나'에게 맞추면 되지만 함께하는 여행은 '서로' 맞춰가야 한다는 걸 10일의 여행동안 배운 우리였기에.
저녁을 먹는 동안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다 먹고 나서는 비가 완전히 그치고 무지개가 하늘에 떴다. 곧이어 비가 언제 왔냐는 듯 먹구름은 말끔하게 갰고 청명한 저녁 하늘이 고개를 내밀었다. 베니스 본섬을 들어갔다면 이 폭우 속을 헤치며 구경인지 전투일지 모를 무언가를 하고 있었을 텐데, 하며 오늘의 판단을 곱씹어보았다. 물론 이 또한 모두 결과론적인 감상이지만.
일반적으로 베니스하면 운하에 수상버스가 둥둥 떠다니고 오렌지색 지붕의 아담한 집들이 모여있는 동화 같은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나 또한 처음엔 그랬다. 그러나 우리가 떠올리는 그 전형적인 풍경은 본섬에 해당하고, 섬밖 또는 육지 베니스로 불리는 메스트레 지역은 콘크리트 빌딩과 건물들이 있는 평범한 도시의 모습이었다. 베니스도 위치에 따라 완전히 다른 도시 풍광을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베니스에 직접 와 보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것들이라 생각하니 괜스레 비밀 하나를 알게 된 사람처럼 으쓱하면서 마음이 뭉근하게 벅차올랐다. 베니스라는 도시와 조금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숙소 발코니에 서니 육안으로 물 너머 베니스 본섬이 보였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강 건너 선착장의 초록 불빛을 바라보는 개츠비가 된 것 같았다. 저 너머에 있는 환상과 이상을 무한히 갈망하는 인물.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베니스 본섬에 대한 기대는 이만 접어두고 지금 내게 주어진 휴식시간을 느긋하게 보내기로 했다. 잊지 말자,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고 쉬어야 할 땐 쉬어야 한다는 것을. 한보 후퇴는 두 발 전진을 위한 시간이니까.
내일의 여행이 더 기대되는 '육지베니스'에서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