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크리스마스. 난 홍콩에 있었다. 왜 홍콩이었냐고? 글쎄, 고등학교 때 친구가 대학생이 되면 가고 싶어 한 곳이었고, 난 그런 친구를 별생각 없이 따라나섰던 것 같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떠난 첫 자유여행. 4박 5일 동안 경험한 홍콩과 마카오는 새롭고 흥미로운 것 투성이었고, 눈도 입도 귀도 바쁘고 즐거웠다. 여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돌아오는 날 터졌다.
사건의 발단은, 친구의 캐리어가 정해진 수하물 무게를 넘어간 것에서 시작됐다. 항공권 예매를 맡았던 친구의 실수로, 위탁 수하물이 없는 가장 저렴한 티켓을 구매했고 그 때문에 우린 현장에서 약 두 배 정도 비싼 수하물 비용을 내야 했다. 안 그래도 예정에 없던 지출을 하게 된 친구는 초과된 무게에 대한 추가요금을 내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옷과 물품을 최대한 뺐는데도 100~200g 정도만 빠질 뿐 무게는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내 캐리어에서 기내 반입 가능한 물품들을 뺐고 대신 친구의 물건을 넣어줬다. 그 결과, 내 손엔 롱패딩과 기념품으로 산 버터 과자 두 봉지, 옷을 넣은 가방과 핸드백까지 네 개의 혹이 주렁주렁 들렸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수화물 검색대를 통과한 후, 공항 내부 트램을 타고 1터미널에서 3터미널로 이동할 때였다.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문득 옆자리 사람 손에 들린 겉옷이 눈에 들어왔다. 내 손은, 비어있었다. 이어서 이명처럼 귀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하나.
“Jacket!! Who left black jacket?”(재킷!! 검은색 재킷 두고 가신 분!!)
불과 5분 전, 1터미널에서 트램을 기다리고 있는데 검색대 직원이 급하게 뛰어와 큰 소리로 외쳤더랬다. “재킷? 누가 옷 놔두고 갔나 봐.”라고 친구와 얘기까지 했는데.. 그렇다. 수화물 검색대에 옷 놔두고 간 그 멍청이가, 바로 나였다.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머리가 새하얘졌다. 바짝 조여든 목구멍 사이로 분절된 단어가 떠듬떠듬 비집고 나왔다. “나.. 나.. 패딩 두고 온 거 같아.. 수화물 검색대에..”
헐레벌떡 2터미널에서 내려 인포메이션 센터로 갔다.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20대 후반의 젊은 직원은 안 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It’s too late. You can’t go back terminal 1.”(너무 늦었어. 넌 1터미널로 못 돌아가.)
“WHY??”(아니, 왜??)
“Tram moves in one direction. You can go to Terminal 3 from Terminal 1, but not the other way around.” (트램은 한쪽 방향으로만 움직여. 1터미널에선 3터미널을 갈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안돼.)
“Then, then, how can I do?”(그럼, 어떡해야 하는데?)
“Back to Korea, and then call Lost and Found at Hong Kong Airport. If you find your clothes, come pick it up in Hong Kong.”
(한국 돌아가서 홍콩공항 분실물보관소에 연락해. 만약 네 옷을 찾으면 홍콩으로 다시 찾으러 와(??))
응? 홍콩을 다시 오라고?? 심지어 이 직원 말로는, 물건을 잃어버린 본인만 분실물을 수령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반드시 직접 와야 한단다(??!) 직원분께, 수화물 검색대에 연락해서 옷만 좀 보내달라고 하면 안 되냐고 하니까 지금은 방법이 없다면서, 티켓을 보더니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며 빨리 이동하라고 재촉했다. 그러면서 포스트잇에 홍콩공항 분실물보관소 이메일을 적어줬다. 이게 자기들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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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비행기는 40분 연착됐다. 대기좌석에 앉아 있는데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비행기에 탑승했는지,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넋이 나간 사람으로, 오래도록 앉아있었던 차가운 파란색 의자시트의 감촉만이 남았을 뿐.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모두가 잠든 고요한 비행기에서 홀로 뜬 눈으로 지새웠다. 산 지 2주밖에 안 된 따끈따끈한 르꼬끄 롱패딩이었다. 딸내미가 마음에 들어 하자 혹독한 서울의 강추위를 걱정한 엄마가 거금을 들여서 사준 옷이었다. 시베리아에 던져놔도 북극곰이랑 친구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두툼한 패딩을 입고 기뻐하던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엄마의 미소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악몽이었으면. 한국에 도착하면 이 모든 게 거짓이었다고, 내 기억에 잠시 오류가 생겼던 거였다고, 애초에 캐리어에서 패딩을 꺼낸 적이 없고 가방을 열면 나의 소중한 패딩이 고이 누워있을 거라고, 그럴 거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캐리어엔 (당연히) 패딩이 없었고 친구의 옷가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공항철도를 타고 서울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 도착시간을 알고 있던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처음엔 어떻게든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보려 했지만 30초도 채 못 가 꾹꾹 눌렀던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나에 대한 실망과 친구에 대한 원망, 엄마아빠에 대한 미안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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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말, 겨울의 초입에 선 서울에 때아닌 홍콩의 가을이 뒤따라왔다. 홍콩에서의 복장 그대로 얇은 가을 겉옷만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 시간 속의 난 어떠한 추위도 느낄 수 없었다. 패딩을 잃어버린 내 속은 펄펄 끓다 못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으니까.
다음날, 친구는 고향으로 내려갔고 난 어제의 그 눈물 젖은 공항철도를 타고 다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항공사에서는 매일 한국과 홍콩을 오가니까 패딩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탔던 항공사에 도움을 구해보라는 아빠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항공사에 수십 통을 전화해 봤지만 받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천공항의 항공사 사무실을 직접 찾아가 보기로 한 것이다.
공항에 오면 탑승구와 출구를 찾기에 바빴지 항공사 사무실이 어디 있는지, 그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도를 보고 공항 직원에게 물어물어 2층 사무실을 찾아갔다. 저 멀리 복도 끝에 내가 탔던 항공사 심벌마크가 보였다. 심호흡을 하고 두꺼운 철문을 똑똑, 두드렸지만 아무 답이 없었다. 약했나? 싶어 쿵쿵, 도 두드려보고 쾅쾅, 도 두드려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사무실 앞을 40분 정도 서성였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1시간 반 걸려서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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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탈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하던 그때였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굳게 닫힌 철문이 철컥, 열렸다.
‘어?’ (나)
‘어??’ (남자)
30대 중후반의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는데, 나를 보더니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안에 사람이 있었어?? 근데 40분 동안이나 문을... 안 열어 준거야..? 심지어 유니폼까지 입고 있는 그는, 영락없는 항공사 직원이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남자는 급하게 말을 붙였다.
“아.. 그게.. 제가 원래 여기 담당이 아닌데…”
그러거나 말거나, 난 거의 울기 직전이었고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의 채 여과되지 못한 사연을 쏟아냈다. 곤란해하던 직원분은 잠시 고민하더니, 일단 들어오라고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홍콩에서 있었던 일련의 과정을 조목조목 설명하자, 뜻밖에도 그런 일이라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분실물품의 일련번호만 알 수 있으면, 현지 직원이 홍콩공항 분실물보관소에서 내 옷을 찾아 한국행 비행기 편에 보내줄 수 있다고 했다. 다만, 분실물보관소와 연락해 일련번호를 알아내는 것까지는 내가 해야 한다고 했다. 와, 진짜 이게 된다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위임장과 각종 서류를 작성한 후, 이메일을 교환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은 이 사무실과 상관없는, 서류 때문에 잠시 올라왔던 지상직 근무자셨다. 사무실은 하루종일 비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하필(?) 잠깐 들른 시간에 나와 마주친 거였다. 이날도 거의 몇 달 만에 올라온 거였다고.. 엄청난 행운이었다.
몇 번의 이메일 교환 끝에 홍콩공항 분실물보관소로부터 일련번호를 받을 수 있었고, 직원분께 바로 일련번호를 전달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돌돌 감싸진 롱패딩이 상자에 담겨 집으로 배달 왔다. 다시는 못 볼 뻔한 옷이, 홍콩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이 일을 통해 깨달은 건, 뭐든 될 때까지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몇 번 깔짝거려 보고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다. 홍콩 인포메이션 직원의 말을 듣고 패딩 찾는 걸 단념했더라면, 전화만 해보고 인천공항 사무실을 직접 찾아가 보지 않았더라면, 사무실 앞을 40분 동안 서성이지 않았더라면, 기회가 왔을 때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내 패딩은 어떻게 됐을까? 아마 한국땅을 다시는 못 밟았겠지. 이 패딩은 나의 최애패딩으로 지금까지도 잘 입고 있다. 그러니 두드려보자. 열릴 때까지 두드려보자. 5%의 가능성, 그걸로도 충분하다. 혹시 아나, 생각지도 못한 천사 같은 귀인을 만나게 될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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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 글을 빌어, 바쁜 와중에도 경황없이 말하는 스무 살 여자애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주며 마음을 진정할 수 있게 해 주고, 근무시간에 일부러 짬내서 우체국 택배로 패딩을 보내준 홍콩익스프레스 항공사 직원분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