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 내 생애 두 번째 알바는 비빔밥 가게였다. 고즈넉한 한옥에 한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는데, 맛집 가이드에 선정되어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손님들도 많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면접을 볼 때 근무강도가 높겠구나, 싶긴 했지만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높은 페이와 걸어서 출퇴근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은 다른 모든 단점들을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당장 이번주부터 출근하기로 했다.
이 가게의 실질적인 실세이자 주방장은, 다부진 체격의 70대 할머니셨다. 고집 있어 보이는 눈과 굳은살이 배긴 단단한 손이 할머니의 인생 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주방장 할머니와는 첫 만남부터 삐걱댔다. 인사를 드릴 때 대학생이라고 하니까 얼굴을 찌푸리면서 “여자가 대학은 무슨 대학, 쯧” 했다. 순간 느낌이 쎄하긴 했지만 나와는 다른 시대를 살아왔으니 그런가 보다, 하면서 적당히 웃으면서 넘어갔다.
가게는 주방장 할머니를 필두로 네 명의 이모님과 면접관이었던 30대 매니저님, 20대 초중반의 알바생들로 구성되었는데, 오픈 전부터 줄을 선 손님들에게 맛과 멋이 담긴 최상의 비빔밥을 제공하기 위해선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주방에서 요리가 나오면 쟁반 위로 옮기고 손님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어서 필연적으로 주방장 할머니와 많은 접촉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날 부르는 호칭은 “야”였다. 야, 이거 나가. 야, 저거 가져와. 다른 직원들은 다 이름으로 부르길래 내 이름을 몇 번이나 알려드렸지만, 할머니는 옆사람과 얘기할 때마다 “쟤는~”이라고 나를 향해 턱짓을 하며 운을 뗐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가게에서 나는 쟤, 아니면 야, 였다.
하루는, 손님에게 음식을 드리면서 웃으며 “맛있게 드세요~” 하고 돌아서니 할머니는 뭐가 좋다고 실실 웃냐면서 꼬나봤다. 아니, 그럼 손님한테 웃어야지 인상을 쓸 순 없지 않은가? 그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할머니의 눈빛이었다. 그 죽일 듯이 쳐다보는 눈빛.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눈빛이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살기 어린 뱀의 형상이었달까.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이후로도 할머니의 눈빛은 내 뒤를 따라다녔고 이름 붙이지 못한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게 했다.
가게엔 11시에 출근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점심시간을 보내고 3시 반이 되면 늦은 점심을 먹었다. 직원식사로 비빔밥을 제공했는데 한 번은, 저녁에 약속이 있어 밥을 안 먹어도 된다고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그런데 그런 내 말을 듣더니 할머니는 예의 그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지랄하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지랄? 처음 접해보는 신박한 대화흐름에 말문이 막혔다. 더 놀라운 건, 직원 중 한 사람이 "난 일해야 해서 저녁 약속도 못 잡는데~" 라며 나를 힐난하며 비꼬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 가게에서는 늘 이런 식이었다. 일상 대화를 하든 누군가 좋은 일이 있든 위로받고 싶은 일에 대해 말하든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하고 누가 누가 불행한가 시합을 벌였다. 말꼬투리를 잡아 농담인 척 시비를 걸었고, 행불행의 크기를 가치평가하며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그래 뭐, 이런 거쯤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으면 되니까. 내가 제일 화가 났던 건, 공정하지 않은 잣대였다. 할머니는 내가 실수하면 엄청 혼냈지만 나와 같은 나이의 남자애가 실수한 거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하루는, 동갑내기 남자애가 비빔밥 재료를 얹어놓은 쟁반을 선반 위에 올리다가 그만 손님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쏟았다. 천만다행으로 그 주변에 아무도 앉아있지 않아서 다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상당한 양의 비빔밥 재료를 버려야 했고 유기그릇도 다시 설거지해야 했다. 마침 물을 마시러 주방 밖으로 나와있던 할머니는 처음부터 이 모든 상황을 다 봤지만 아무 말없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한테는 표정 하나, 말투 하나, 행동 하나 뭐 조그만 거 하나도 다 뭐라고 하더니... 억울했다. 이 나이대의 할머니들이 가진 남아선호사상, 안다. 하지만 그게 같은 실수에 대해 잣대를 달리해도 되는 정당한 이유가 되진 않는다.(물론, 이 동갑내기 친구와는 알바 그만두고 동갑내기들끼리 다 같이 밥 먹을 정도로 친하게 잘 지냈다!)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내가 일을 너무 못한 건 아닌가? 그래서 할머니가 유독 나에게만 박했던 게 아닐까? 물론 합리적인 의심이지만 안타깝게도(?) 여러 정황상 그건 아닌 것 같다. 항상 출근 시간 15분 전에 도착해서 환복한 후 오픈준비를 도왔고 신입답지 않게 일 잘한다는 소리를 여럿 들었다. 10년 이상 일한 베테랑 이모님은 내가 여기 있는 게 아깝다면서 여기 말고 같은 사장님이 운영하는 양식 레스토랑에 가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고, 매니저님은 농담 반 진담 반 이런 인재는 다른 데 못 보낸다며 너스레를 떠신 걸 보면 말이다.
그나마 나를 이해해 주고 인정해 주는 매니저님과 이모님, 몇몇 동갑내기 친구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그래도 일을 못하진 않구나, 싶어 안심이 됐고 좀 더 마음이 열린 날이면, 주방장 할머니가 본심은 안 그럴 수 있는데 말과 행동이 거칠게 나올 수 있다, 그러니 좀 더 이해해 보자고 마음먹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 다짐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낼수록 할머니는 점점 눈에 띄게 나에게 모진 말과 행동을 했고, 내가 보는 앞에서 괜히 다른 사람을 더 챙겨주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할머니의 살벌한 눈빛을 받으며 일하고 있을 때였다. 한창 야외 테이블을 닦고 있는데, 주방 쪽에서 큰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서글서글하고 사람 좋은 매니저님이 할머니와 대판 싸우고 있었다.
“아니, 적당히 좀 하세요. 주방에서 실수하는 거 다 케어해 주잖아.”
"내가 뭘!"
“왜 수빈이한테만 그러냐고. 그런 식으로 하면 누가 배겨내요.”
한껏 낮춘 매니저님의 목소리에서 분노를 참고 있는 게 느껴졌다. 순간 분위기가 싸해지고 가게엔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다들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할머니는 어버버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평소에 매니저님을 손자처럼 의지하셨고 유독 매니저님께 인정(혹은 칭찬)을 받고 싶어 하셨기에 매니저님의 이런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왜 유독 나에게만 모질게 구는지, 한편으론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가, 싶을 때도 있었는데 아니었구나. 마법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때,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먹구름이 걷히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딘지 또렷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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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방학 전까지 세 달 동안 일하기로 했는데, 한 달만 일하고 그만뒀다. 내가 더 이상 일을 못할 것 같다고 하자, 매니저님은 그저 알겠다고 하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들었던 동갑내기 친구들과 인사하고 떠나는 마지막 퇴근길, 후련했다. 몇몇 좋은 사람들과 더 오래 함께 일하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런 환경에 나를 계속 두는 게 훗날 되돌아봤을 때 더 후회가 될 것 같았다. 만약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그만두지는 못했을 테지만, 다행히 돈도 시간도 여유가 있는 때였다. 흐드러진 벚꽃 잎이 나를 반기는, 늦봄의 끝자락이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내가 배운 건 “환경의 중요성”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을 어떤 사람들로 채울 것인가. 만약 주방장 할머니의 그 죽일 듯한 눈빛을 계속 받으며 일했다면, 모든 상황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과 계속 함께했더라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됐을까?
물론 이해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왜 할머니가 이런 눈빛의 소유자가 되었는지, 주변 사람들은 왜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지. 모든 일엔 원인과 결과가 있듯, 사람에게도 각자의 스토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 정당한 이유가 없는 괴롭힘이 허용되는 곳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환경에서 내가 계속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구원자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고생은 사서도 한다던가. 그런데 그건 선택권이 없을 때의 얘기다.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고생, 해야 한다. 목표가 있다면 더욱더 기꺼이 해야 한다. 하지만 강압적인 상사와 모든 상황에서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동료들과 함께해야 하는 '고생'과, 허용적인 분위기에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성장' 중 선택할 수 있다면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름이 아닌 번호로, 혹은 감탄사나 대명사로 불리는 건 12년 학교생활로 충분했지 않을까. 난 더 이상 번호가 아니라, '야'나 '쟤'가 아니라, 석 자의 고유 명사로 불리길 원한다.
한 가지 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환경을 바꾸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 용기와 경제적 여건. 특히 후자의 중요성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절실하게 느껴진다. 하하!
비빔밥 가게는 주방장 할머니가 통치자로 있는 너무나도 견고한 왕국이었고, 난 그런 왕국을 무너뜨리러 온 이방인이었다. 그 왕국의 신민이 되기엔 난 더 좋은 세상을 봐버렸고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나버렸다. 나의 가치체계와 맞지 않는 곳은 떠나면 그뿐, 남겨진 왕국은 나의 관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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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만둔 이후에도, 한동안 구직앱에선 비빔밥 가게에서 알바를 구한다는 공고가 생겼다 없어졌다를 반복했고, 튕겨나간 자들의 빈자리는 남겨진 몇몇 선량한 사람들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