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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Jun 27. 2024

엄마의 옷을 보고 싸구려라고 말했던 옷가게 직원

어느 평범한 날, 마트에 있는 옷가게에 엄마와 갔을 때다. 우리가 가게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그 가게의 직원은 우리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더니 견적이 나왔다는 듯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노골적인 그 시선이 유쾌하진 않았지만 고객을 파악하는 저 나름대로의 의식(?)일 거라 생각하고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렇게 옷을 둘러보고 있는데 직원이 다가와 설명을 하면서 자기 가게의 옷은 엄마가 입은 질 떨어지는 싸구려 옷과는 다르다고 했다. 엄마는 보세 옷가게의 옷을 입고 있었고 언젠가 길을 지나가다가 예뻐서 샀더랬다. 한 패션센스하는 엄마는 평소에 상표를 보고 옷을 가려 사지 않는다. 발품을 팔다 보면 좋은 재질에 심플한 디자인의 옷이 얻어걸리기도 하고 어디서도 보지 못할 과감하고 실험적인(?) 디자인의 옷도 찰떡같이 코디를 해 소화한다. 옷은 가격이 아니라 TPO에 맞게, 자신의 체형에 맞게 입으면 되고, 패션은 자신감이 8할이라는 건 패션 문외한인 내가 엄마에게 배운 스킬이다. 고급 브랜드의 옷부터 보세 옷까지 가지고 있는 아이템을 믹스매치해 우아한 분위기도, 캐주얼한 분위기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엄마는, 옷으로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진정 근사한 사람이다.


자기 나름대론 본인 가게의 옷이 좋다는 걸 강조하고 싶어서 그런 걸 테지만 뜻하지 않게 날아온 원색적인 평가는 쓴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폴로를 입고 갔더라면, 라코스테를 입고 갔더라면, 혹은 상표가 겉으로 드러나있지 않은 하이엔드의 옷을 입고 갔다면 그 직원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궁금했다. 동시에 한 사람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명동 롯데백화점 미우미우 매장을 갔을 때다. 그 당시 나는 20대 초반이었고 공부만 하던 고등학생 티를 막 벗어나고 있던 참이었다. 그날 엄마는 나와 하루종일 궁궐로, 박물관으로, 서촌 골목골목을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에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누가 봐도 갖춰진, 그렇게 있어 보이는 차림새는 아니었다. 하루종일 여행자의 신분으로 강북을 실컷 휘젓고 다니다가 집 가는 길에 백화점 지하에서 저녁 먹을거리를 사려고 잠깐 들렀다.


1층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미우미우 매장이 눈에 띄었고, 구경이나 하고 가자 싶어 즉흥적으로 줄을 섰다. 5분 정도 기다렸을까, 우리 차례가 왔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담당 직원은 우리를 보더니 눈을 맞추며 다가와 활짝 웃으면서 찾는 제품이 있는지 물었다. 그냥 구경을 하고 싶어서 왔다고 하니 새로 나온 신상품부터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까지 차례로 설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하고도 유쾌하게 응대했고 중간중간 우리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했다. 실제 코디했을 때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이해를 도왔고, 제품을 직접 써본 자신의 후기를 곁들이며 각 제품마다의 장단점을 솔직하게 말해줬다. 처음부터 느낌이 좋더라니. 응대의 정석을 보는 듯했고 이분은 무슨 일을 하든 잘하겠다 싶었다. 그날 우린 아무것도 사지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웃으면서 다음에 방문하게 되면 찾아달라며 명함까지 살뜰하게 챙겨줬다. 지금도 그분의 명함을 가지고 있다. 미우미우 제품을 사게 되면 꼭 이분한테서 구매할 거기 때문에.




다시 돌아와서,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건 쉬운 일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많은 순간에 그 사람이 걸친 것, 입은 것, 타는 것, 든 걸 보고 쉽고 빠르게 판단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난 안다. 쉬운 길은 그 결과까지 쉽다는 걸. 비포장도로보단 아스팔트 깔린 길을 편하게 가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고, 그 순간엔 그 길이 정답처럼 보인다. 거기에다 주위에서 다 편한 길을 선택하면..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뻔하다. 


어렵고 귀찮은 길이 많은 사람들을 중도하차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는, 한 번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컴컴한 길을 옆에서 누가 뭐라 하든 끈기 있게 가야 하기 때문에 난이도는 더욱 높아진다. 그렇기에 아무나 갈 수 있는 길도, 쉽게 완주할 수 있는 길도 아니다.


하지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그 끝에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다. 미우미우의 그 직원처럼. 언젠가 백화점을 갔을 때 수수하게 입은 60대 고객이 한 직원에게, 자신이 남루한 차림으로 급하게 왔을 때가 있는데 응대를 잘해줘 고마웠다며 몇 백만 원 치를 한 번에 사가는 걸 목격한 적이 있다. 그렇다. 세상은 그렇게 생겨먹었다. 꾸준함과 일관성 있는 태도를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결과까지 쉽고 가볍진 않다. 오히려 묵직하고 가치 있다. 그렇기에 어렵고 번거롭고 힘든 길은 안 가본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 어린 시절, 꽤나 강렬한 귀감이 되었던 미우미우의 그 언니가, 지금도 한 번씩 생각이 나는 건 그래서겠지.


아, 오해하진 마시길. 마트라고 다 쉬운 길을 가는 사람만 있고, 백화점이라고 다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만 있다는 건 아니니까. 어디나 보석은 숨어있기 마련이다. 이 보석 같은 분들을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기를, 그런 운이 내게 오래오래 깃들길 바랄 뿐이다.


진짜 싸구려는, 당장 눈에 보이는 걸로만 판단하는 그 편협한 마인드가 아닐까. 다행이다. 적어도 난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적어도 찾아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으니. 부디 이 마음, 변치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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