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로마(7.20)
#유럽여행 18일차 (3)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딴 건 몰라도 눈 영양제는 무조건 챙겨가야 한다. 매일 새로운 장소에서 워낙 많은 걸 보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눈이 뻑뻑해지는데 그런 눈을 달래기 위해선 꼭 필요하다. 거기에 종합 비타민과 홍삼 스틱까지 추가하면 금상첨화. 여유될 때 유산균 한 포까지 챙기면 크, 완벽하다. 원래는 건강기능식품 불신론자지만 여행 기간 동안은 살려고 먹었다. 플라시보 효과인지 야무지게 챙겨 먹어서인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빡센 오늘 일정도 순탄하게 소화 중이었다.
바티칸 투어를 마치고 우리가 찾은 곳은 판테온이었다. 다신교였던 로마 제국에서 모든 신을 모아놓은 신전이었던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콘크리트 돔과 라파엘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알쓸신잡>에서 건축가 유현준이 전 세계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소개했던 게 인상적이어서 로마에 오면 가장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단출했다. 원형의 공간 아래쪽 가장자리엔 이탈리아 왕들과 라파엘로의 무덤이 있었고, 위쪽엔 한중간이 뚫려있는 돔이 있었다. 힘을 가장 많이 받아 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돔 가운데 윗부분이 뚫려있는 걸 보니 상식을 비튼 넌센스 퀴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돔의 구멍, 오쿨루스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보며 신과의 연결을 느꼈을 로마 사람들을 상상하면서. 비가 오면 어떻게 하지? 뚜껑을 덮나? 궁금했는데 내부 바닥에 배수시설이 잘 되어 있어 물이 고이지 않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비 오는 날 거대한 샤워기가 된 오쿨루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학교에서 단체로 소풍을 나온 학생들이 한쪽에 서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이미 여러 번 와봤는지 몸을 배배 꼬고 몇몇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폰을 보고 있었다. 같은 박물관을 다섯 번 이상 가서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었던, 그래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 겹쳐 보였다. 전 세계에서 이 건축물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큰 비용을 치르고 오지만 로마에 사는 학생 입장에선 지루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토록 유명한 건축물을 보고 나오는 거라곤 하품뿐이라니, 이 아이러니함이 저 오쿨루스와 닮았다는 생각에 조금 웃겼다.
밖으로 나오니 판테온 앞에 뱀이 똬리를 틀 듯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엥? 우린 웨이팅 없이 바로 들어갔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설상가상 줄 뒤쪽에 있는 사람들에겐 오늘 입장이 끝났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우리가 왔을 땐 줄이 하나도 없어서 판테온은 인기가 별로 없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좋았던 거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러니함으로 가득했던 판테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음엔 비 오는 날,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줄 판테온을 찾아오고 싶었다.
판테온을 나와 근처에 있는 로마 3대 커피 중 한 곳인 카페 '타짜도르'에 갔다. 왁스로 머리를 넘겨 한껏 멋을 낸 중년의 아저씨가 카운터에 서 있었다. 추천 메뉴를 물어보니 "까뿌찌~노"라고 중독성 있는 특유의 악센트로 말해줬다. 재밌는 건, 이후로도 카페에 갈 때마다 추천 메뉴를 물어보면 열이면 열, 다 이 "까뿌찌~노"를 추천해 주는 것이었다. 나중엔 틈날 때마다 오빠랑 따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굿모닝 인사로, 오후쯤 서로 지쳤을 때 힘내자는 의미로, 밤에 반쯤 감긴 눈으로 내일 일정을 짤 때면 잠을 깨기 위해 부르는 노래로, 우린 어김없이 까뿌찌~노를 외쳤다. 그런 우릴 보고 엄마는 깔깔거리며 웃었고, 관객의 반응을 본 우리는 더욱 열창했다. 지금도 이탈리아 하면 제일 먼저 입가에 맴도는 멜로디이자, 그때의 즐거움이 떠오르게 하는 마법의 주문이다.
추천은 감사하지만 우리는 원두의 맛을 오롯이 느끼고 싶었기 때문에 에스프레소와 그라니따 콘파냐를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따위는 절대 팔지 않는 이탈리아 로컬 카페에서 유일하게 시원한 메뉴가 에스프레소 샤베트가 들어간 그라니따였기 때문에 특히 한국인에게 인기가 많은 메뉴였다. 커피 맛은 괜찮았는데 그라니따는 하루 종일 로마의 더위와 싸운 우리에겐 턱없이 부족한 냉기였다. 액체가 아닌 곱게 갈린 얼음알갱이는 갈증 해소에 쥐약이었고, 이탈리아는 얼음마저 뜨거운 커피를 닮았는지 미지근했다. 그래도 커피 중심지의 위상은 확인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콘도티 거리에서는 색소폰&기타 듀오가 길거리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막스마라와 에르메스 매장을 양옆에 병풍처럼 두르고 에드 쉬런의 <Shape of You>를 연주하는 모습이 근사했다. 고급스러운 주변 환경도 한몫했지만 이들을 빛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수준급 연주였다. 역시 실력이 있으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두려울 게 없다. 빨간 넥타이가 마스코트인 양복쟁이 아저씨는 마네킹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랜 시간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움직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매의 눈으로 열심히 관찰한 나도 속았다. 덕분에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놀라움과 큰 웃음을 선사했다.
로마 구시가지는 곳곳이 야외공연장이었고, 이곳에서 우리는 콘텐츠라는 보석이 마구 흩뿌려진 거리를 사뿐히 걸어 다니며 온 마음으로 즐기기만 하면 됐다. 그전까지는 명품 매장에 들어가는 게 불편하고 어색했는데 로마에서부턴 마트에 드나드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오가게 됐다. 어쩌면 콘도티 거리의 이런 흥겨운 분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명품 매장에도 편하게 발걸음 하도록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명품 거리와 예술활동, 둘의 윈윈 전략이 제대로 성공했다.
일몰이 끝나자 거리엔 빠르게 어둠이 내려앉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한 피자 가게 앞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여행객들이 아닌 퇴근하는 로마 직장인들이 많길래 우리도 한 번 따라 사봤다. 그리고 로마에 도착한 첫날, 우리에게 감동을 줬던 치킨을 한 번 더 샀다. 한 손엔 피자, 한 손엔 치킨을 들고 쭐레쭐레 걸어가는데 버스 시간표가 적힌 표지판이 나왔다. 이틀 뒤에 타야 할 참피노 공항 셔틀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는데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것과는 약간 달랐다. 10~20분 정도의 차이여서 큰일 날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될 수 있으면 우리 여행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은 사전에 제거하는 게 좋으니까, 야무지게 찍었다. 로마에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실감 났다.
숙소에 도착해서 먹어본 피자는, 놀랍게도 별로였다. 피자를 감싸고 있던 포장지가 흠뻑 젖을 정도로 기름기가 많아 느끼했고 푸짐해 보이는 토핑에 비해 맛과 향이 빈약했다. 이탈리아 피자는 어디서 먹으나 평균 이상은 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낮에 먹은 젤라또처럼. 그렇다면 왜 그렇게 사람이 많았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세상에 사람은 많고 입맛은 다양하며 성공의 방법은 일률적이지 않다. 그러니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안 해보고 아쉬움으로 남는 것보다 후회하게 된들 해보고 털어버리는 게 나으니까. 다행히 첫날 먹었던 로마표 엄마의 손맛이 느껴지는 치킨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피자보다 치킨이 더 맛있는 이탈리아의 아이러니라니, 판테온의 오쿨루스를 닮은 하루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