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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정통 까르보나라는 짜고 비리기만 하다고?

이탈리아-로마(7.20)

by 이수빈

#유럽여행 18일차 (2)


뒤를 돌아보니 성 베드로 성당과 산 피에트로 광장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저곳에서 보았던 수많은 벽화, 조각상, 천장과 바닥 장식의 잔상들이 벌써부터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흘러나갔다. 하지만 손으로 쥐었던 모래의 감촉은 평생을 가듯, 이곳에서 받았던 강렬했던 느낌은 언제까지나 남을 것이다. '그걸로 충분해.'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리곤 마침내 도착했다. 광장의 시작이자 끝에 있는 흰색 선 위에. 도로 위에 그어져 있는 선일뿐인데 이게 이탈리아와 바티칸을 구분 짓는 국경이라니, 신기했다. 여권 확인도 없이 우린 단 한 걸음을 내디뎌 5시간 전에 있었던 이탈리아로 무사히 넘어갔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음을 기약하며 그렇게 바티칸과 작별했다.


광장에서부터 쭉 뻗은 길을 따라 걸어 나오니 그 끝에 성이 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로마 황제의 묘로 지어졌다가 중세 시대엔 교황의 피신처 및 요새로, 또 한때는 감옥으로 쓰였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성 천사성'이었다. 단단한 성벽 위에 둥그렇게 지어진 외벽이 오랜 세월의 풍파를 말해주는 듯했다. 들러야 할지 잠깐 고민했는데, 오전 내내 바티칸에서 서 있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무엇보다 방금 바티칸에서보다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우린 미련 없이 점심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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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에서 나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성 천사성과 그 앞의 성 천사의 다리


바티칸 투어의 말미쯤 가이드님이 점심 먹을 레스토랑을 몇 군데 추천해 줬는데, 이탈리아 정통 까르보나라를 맛보고 싶다면 가보라고 한 곳이 있어서 고민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아침에 한인민박 사장님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로마의 파스타 맛집을 물어보니 대뜸 "정말 파스타 먹으시게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응? 그럼 로마까지 와서 파스타를 안 먹나요? 라고 되물어볼 뻔 한 걸 겨우 참고 그 이유를 물어봤다. 사장님은, 대부분 파스타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이탈리아에 오는데 파스타, 그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 정통 까르보나라를 먹으면 한국인 10명 중 9명이 계란 노른자 비린내 때문에 못 먹고 버린다고 했다. 우리가 익히지 않은 노른자가 들어간 요리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도 손사래를 치며 극구 말렸다. 본인도 안 먹는다고. 그러자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한 가족은 "그래요? 그럼 안 먹어야겠네."라고 말했다. 아니, 그래도 이탈리아까지 와서 까르보나라를 먹지 않는 건, 한국에 와서 김치를 안 먹는 것과 같지 않은가! 사장님이 이렇게까지 말리니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다짐했다. 오늘 꼭 까르보나라를 먹어보리라.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어라,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한식, 일식 등 여러 곳을 추천해 줬는데 같이 투어 들었던 사람들이 여기로 다 몰린 거였다. 30명 중 25명이! 심지어 우리의 어미닭, 가이드님도 앉아 있었다. 이럴 거면 미리 예약하고 다 같이 손잡고 와도 될 뻔했다. 푸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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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 주문 시, 한국인 입맛에는 많이 짤 수 있으니 소금 적게를 의미하는"뽀꼬 살레(poco sale)"를 말하면 적절한 간이 될 거라고 가이드가 말해줬다. 하지만 우린 원래대로 먹어보고 싶어 따로 요청하지 않았다. 슬슬 배가 고파질 무렵 까르보나라가 나왔다. 포크로 적당히 돌돌 말아 조심스럽게 한입 먹었는데.. 어라, 너무 맛있었다!! 주방에서 알아서 간 조절을 해준 건진 모르겠지만, 짜지도 않고 계란 노른자가 잘 비벼져서 고소하고 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어떤 곳은 음식의 열기 때문에 노른자가 응고되어 덩어리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이곳 까르보나라는 그러지 않았다. 파스타를 잘 만들어서 그런 건지 응고될 시간조차 없게 우리가 빨리 먹어서 그런 건진 잘 모르겠지만. 하하!


자작한 국물이 있는 크림베이스의 까르보나라와는 달리, 녹진한 노른자의 감칠맛과 베이컨의 짭짤함이 어우러져 씹을수록 풍미가 입안 가득 퍼졌다. 하마터면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를 놓칠 뻔했다. 뭐든 본인이 경험해 보고 판단하자, 까르보나라가 준 교훈이었다. 노른자로 코팅된 면을 꼭꼭 씹으며 생각했다. 오늘 밤 숙소에 돌아가면 까르보나라를 먹지 않겠다고 했던 그 가족에게 겁내지 말고 한 번 시도해 보라고 말해줘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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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고 나오는데 바로 옆에 젤라또 가게가 있어서 후식으로 먹었다. 그리 알려진 곳은 아닌데 레스토랑이 유명해서 낙수효과를 제대로 받았다. 사람들이 많이 서 있어서 자연스럽게 동참했는데, 젤라또 특유의 쫀득한 느낌이 적고 맛이 밍밍해서 아쉬웠다. 흠, 괜히 유명한 집을 찾아가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탈리아라고 모든 젤라또가 다 맛있는 건 아니었다. (아닛, 알고보니 로마 3대 젤라또 중 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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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휴식 후,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거리 위로 다시 나왔다. 정오를 지나 더욱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아스팔트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등에선 땀이 배어 나왔다. 다음 목적지인 판테온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길가에 독특한 차가 서있었다. 100m 밖에서 봐도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을 만큼 화려한 페인팅에 대형 캔음료 모형이 트렁크에 달려있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인상적인 외관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호기심이 동하는 눈빛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궁금한 마음에 가까이에서 보려고 다가가려는데, 귀여운 거라면 못 참는 엄마가 이미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차 옆에서 기웃거리자 조수석에 있던 사람이 창문을 내리더니 마셔보라면서 레드불 하나를 건네줬다. 뭐지? 파는 건가? 받아도 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레드불 홍보차였다. 이런 식으로 마케팅을 하다니, 쌈빡했다. 우리가 가기 전까진 궁금해하기만 할 뿐 아무도 차에 다가가지 않았는데, 엄마와 내가 레드불을 받는 걸 보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가서 음료를 받았다. 그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이런 변화를 일으켰다는 게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로마 한복판에서 발견한 오아시스를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시면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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