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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아테네 학당> 앞에선 푸쳐핸섭!

이탈리아-로마(7.20)

by 이수빈

#유럽여행 18일차 (1)


10여 년 전, 유럽여행을 다녀오셨던 외삼촌의 이야기보따리가 풀린 날이었다. 외삼촌의 지휘에 맞춰 유럽의 풍경이 생동감 넘치는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는데, 많고 많은 나라들 중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바티칸이었다. 발음부터 'ㅂ, ㅌ, ㅋ'이라니! 흔하게 쓰이지 않는 자음들의 조합이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국가'라는 문장이 상상력을 자극했는데 조금만 걸으면 나라를 한 바퀴 다 돌 수 있고 아무런 저지 없이 국경을 넘나 든다니, 이 얼마나 꿈같은 얘기인가! 동화 속 왕국과 같은 환상이 초등학생 꼬꼬마의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이후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는 물음에 아이는 늘 같은 대답을 자신 있게 외쳤다. "바티칸이요!"


그런 바티칸에 입국하는 날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품어온 꿈이 이뤄지는 걸 축하하는지,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아침 7시 10분, 바티칸 투어 약속 장소로 나갔다. 오늘의 동행자들이 골목 한편에 갓 부화한 병아리들처럼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자연스럽게 새 병아리 멤버로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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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 입장. 피냐 정원에 빼꼼 솟아있는 성 베드로 성당 쿠폴라


바티칸 햇병아리들을 이끌어줄 오늘의 가이드는 헤라가이드님이었다. 그녀의 입에선 바티칸의 역사, 문화, 종교 이야기가 자동 응답기처럼 막힘 없이 술술 나왔고 내공이 느껴지는 어미 닭의 목소리에 병아리들은 고개 끄덕임으로 열심히 화답했다. 다른 가이드들이 파일에 종이를 끼워서 설명하는 동안 헤라가이드는 아이패드로 그림을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선명한 색감, 시간 절약, 집중력 향상에 줌인 기능까지 여러 면에서 월등히 앞섰다. 몇 백 년 전 유물이 가득한 곳에서 즐기는 21세기 첨단기술과의 콜라보는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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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 회화관


투어는 PINACOTECA , 바티칸 박물관 회화관으로 막을 열었다. 작품에 담긴 역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관람하니 훨씬 재밌었다. 왜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작품을 만들 때 화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알고 나니 작품이 다르게 읽혔다. 조금 전까지 저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고 다 똑같아 보이던 군중의 표정도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흥미로운 건, 각 나라 가이드마다, 하물며 한국 가이드 간에도 다른 작품 앞에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처럼 공통적으로 꼭 보고 지나가는 유명한 작품도 있지만 그 외에 작품들은 가이드마다 달랐다. 덕분에 수많은 팀이 동시에 박물관 안을 탐험하고 있는데도 그리 붐비거나 혼잡하지 않았다.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설명하는 작품이 달라지는 건지, 아니면 가이드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달라서 가이드의 안목에 따라 큐레이션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러면 같은 시공간에서 경험한 바가 완전히 달라질 것 같았다. 시간적 여유만 된다면 같은 장소를 여러 가이드와 함께해 보는 것도 박물관 산책의 묘미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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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천장이 압도하는 지도의 회랑


회화관을 마치고 지도의 회랑에 발을 들이는 순간, 숨이 헉 하고 막혔다. 찬란한 금빛 천장이 융단처럼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고 있노라면 출렁이는 금빛 파도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회랑이 아닐까. 여기서는 나의 자유의지를 잠깐 내려놓고 멈추지 말고 계속 걸어야 한다. 뒤에서 계속해서 사람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 흐름을 거스르기도 여간해선 쉽지 않지만. 그러면 앞뒤 사람들과 하나의 물결을 이루어 떠내려가는 듯한, 말 그대로 ‘인파(人波)’를 느끼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쉽게도 상류로 거슬러 돌아가는 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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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가이드의 음성을 다수의 관람객이 이어폰으로 수신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동시에 투어를 해도 그다지 시끄럽지 않다. 그럼 옛날엔 이런 기기가 없었을 땐 어떻게 했을까? 육성으로 외치는 가이드와 관람객들로 소란스러웠을까? 아니면 그 당시에도 나름의 방법이 있었을까? 고요한 이 공간이 전 세계 언어로 뒤섞여 북적이는 걸 상상해 보는 것도 그 나름대로 즐거웠다.


KakaoTalk_20240721_163225263.jpg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모퉁이를 돌아 라파엘로의 서명의 방에 들어서자 <아테네 학당>이 나왔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작품이 바티칸에 있는 줄 몰랐다. 미술책에는 직사각형으로 나와있었는데 곡선의 틀 안에 있는 그림은 색달라보였다. 뭐랄까, 좀 더 부드럽고 인자해 보였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다들 허공에 뭔가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입장권에 있는 그림으로 인증샷을 찍고 있는 거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빠질 수 없지! 위치를 잡고 셔터를 눌렀다. 다 같이 손을 들고 앞뒤 양옆으로 흔들흔들 움직이는 게 웃겼다. 모르고 보면 무슨 종교의식이라도 치르고 있는 줄 알법한 단체 군무였다. 누가 처음 이렇게 찍기 시작했는지. 입장권을 만든 사람은 이렇게 쓰일 줄 알았을까?




걸음을 뗄 때마다 감탄과 탄식을 반복하던 햇병아리들의 투어도 끝을 향해 달려갔다. 마지막은, 우리에게 '천지창조'로 널리 알려져 있는 천장화가 있는 시스티나 성당이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제단 뒤편 벽엔 1541년 작 <최후의 심판>이, 천장엔 천지창조를 포함한 천장화가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건물 가장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어 나를 둘러싼 이 아름다운 공간을 찬찬히 둘러봤다. 눈길 닿는 어느 곳 하나 군더더기는 없었다. 다른 그림들 사이에서 천지창조는 의외로 수수하게 느껴졌고 이야기로 연결되는 그들 사이에서 빛났다.


사진촬영이 불가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카메라 플래시는 간헐적으로 터졌고 사람들의 숨죽인 웅성거림은 트럼본처럼 낮게 진동했다. 직육면체의 공간 중 다섯 면이 그림으로 빼곡히 가득 차 있는 공간. 그 공간이 주는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런 공간을 창조해 낸 미켈란젤로에게 새삼 고마웠다. 자신의 생명력을 작품 속에 불어넣어 타인을 전율케 하는 그는, 진정 천재였음에 틀림없다.


언젠가 대학교 수업 시간, "요즘은 온라인에서 사진과 영상으로 현장에 갔다 온 것처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프라인 공간에 직접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 교수님이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다. 여러 답변들이 나왔는데 결국 핵심은 '현장감'이었다. 사진과 영상으로 느끼지 못하는 온도, 습도, 옆사람의 체온, 체취, 공기의 흐름, 질감 등을 느끼기 위해서 사람들은 소중한 재화를 기꺼이 지불한다고.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끝맺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앞으론 바티칸의 시스티나 대성당이 이 이야기의 끝맺음이 될 것 같다. 이보다 더 완벽한 현장감은 없을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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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 모습과 <피에타>


가이드와 함께하는 투어 일정은 모두 끝났고, 이어지는 성 베드로 대성당은 자유롭게 관람하는 시간이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답게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봤던 성당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했다. 금으로 장식된 실내는 분명히 화려하지만 이상하게 과하다기보단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이곳에 딱 알맞은 생김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박물관에서 오늘치 감탄을 다 써버려서 우리 셋은 무소음 내적 감탄으로 리액션을 대신했다.


입구 초입에 있는 대성당의 보물 <피에타>의 첫인상은 '음, 생각보다 많이 작네.'였다. 원래는 관람객에게 개방되어 있었는데 1972년 괴한이 망치로 부수려는 사건이 일어난 후 지금은 방탄유리로 막아놨다고 한다. 돌을 조각해서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옷 주름 표현이 섬세했는데 “나는 대리석 안에 갇힌 천사를 발견하고, 그 천사를 자유롭게 할 때까지 돌을 쪼아 낸다.”라는 미켈란젤로의 말이 허세가 아닌 진심이 가득 담긴 표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KakaoTalk_20240721_171134399.jpg 산 피에트로 광장


장장 5시간의 투어를 마치고 마침내 햇살이 내리쬐는 열쇠모양 광장으로 나왔다. 몇 시간 동안 고개를 젖히고 있었더니 목이 뻐근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몇백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여행자가 된 것만 같았다. 10여 년 전 초등학생의 꿈이 이뤄진 환상적인 순간이었고 빈틈없이 매 순간을 만끽한 하루였다! ...라고 이 글을 끝내고 싶지만 솔직한 심정은 '제발 일단 어디든 엉덩이 좀 붙이고 앉고 싶다...'였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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