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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구찌 매장에서 짜릿하게 코카콜라 한 잔!

이탈리아-로마(7.19)

by 이수빈

#유럽여행 17일차 (2)


피렌체에서의 해프닝을 뒤로한 채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 도착했다. 테르미니역은 로마의 중앙 철도역답게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는데, 여행객들도 많지만 출장을 가는 비즈니스맨들도 꽤 눈에 띄었다. 밝은 색상의 티셔츠와 반바지, 화려한 꽃무늬 옷을 입고 배낭을 멘 사람들과 무채색 양복에 각 잡힌 서류가방을 든 사람들의 대비가 이곳만의 독특한 활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느껴지는 차이점은, 사람들의 발걸음 속도다. 도시가 클수록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반대로 도시가 작을수록 발걸음이 느려진다. 일종의 도시의 규율과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기차역과 공항같이 새로운 도시의 관문에 도착하면, 마치 영화에서 사람들의 발걸음만 클로즈업한 인서트 장면처럼 눈을 바닥에 두고 지켜보면서 이곳의 삶의 속도에 대해 가늠해 본다. 로마 사람들의 발걸음은 피렌체에서 걷던 속도의 약 두 배 정도 빨리 감기를 한 것 같았고, 이건 소도시에 맞춰져 있던 우리의 느릿한 발걸음이 조만간 이 대도시의 속도로 조율될 것이라는 예언과도 같았다. '음, 바빠지겠군.'


번잡한 역을 빠져나와 미리 예약해 둔 역 근처 한인민박으로 향했다. 런던 이후 두 번째로 가는 한인민박이었는데, 매일 조식이 한식으로 제공되는 곳이었다. 영국 이후론 반찬과 국이 차려진 이렇다 할 한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은근히 기대가 됐다. 은밀한 희망을 마음속에 품고 걸어가는데, 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둡고 후미진 곳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담배인지 뭔지 모를 허연 연기를 내뿜으며 걸어가는 남루한 행색의 노숙자도 여럿 마주쳤다. 밝은 꽃무늬 옷과 무채색의 양복, 말랑한 배낭과 각 잡힌 서류가방, 밝은 역 내부와 어두운 역 외부 거리. 상반되는 것들의 공존, 거기서 오는 뚜렷한 대비. 내가 느낀 로마의 첫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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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테르미니역 근처에 있었던 로마 최고의 치킨집 'Broast Chicken'


다행히 한인민박 사장님과는 연락이 잘 돼서 어렵지 않게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다. 방에 짐을 풀고 한숨 돌린 다음,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보통은 구글지도로 별점 정도는 확인하고 들어가지만 아침부터 돌아다니느라 지쳤기도 하고 배도 고팠던 터라, 숙소 근처 거리를 걷다가 간판만 보고 끌리는 대로 가게에 들어갔다.


프라이드치킨 사진 하나 보고 신나게 들어갔는데, 가게에 들어섬과 동시에 나보다 키가 두 배쯤, 덩치는 세 배쯤 큰 흑인남자 대여섯 명이 돌아봤다. 순간 '우리가 낄 자리가 아닌가..?' 내적갈등을 했지만, 우리가 주문할 수 있게 좁은 가게 안에서도 비켜서서 길을 내주는 사람들을 보고 묘하게 안심이 됐다. 그리고 이 정도로 사람들이 기다릴 정도면 로컬맛집이란 얘기 아닌가.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메뉴판 속 사진을 보고 적당히 주문을 했고 오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일단 놀랐던 건, 음식의 모양이 메뉴판의 사진과 99.9%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오호, 이렇게 정직하기가 쉽지 않은데. 한 입 베어 물자 '바삭' 하는 소리로 치킨이 화답했다. 인상 팍 쓰며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 셋의 얼굴은 말하고 있었다. '이 집, 찐이다!'


프라이드치킨은 한국식으로 튀긴 닭튀김 느낌이었다. 간도 딱 좋고 제대로 튀긴 튀김옷이 바삭했다. 주방장님.. 혹시 한국에서 치킨 배워오셨나..? 굵고 제대로 된 감자튀김도 한몫했다. 시즈닝으로 맛을 낸 게 아니라 감자 고유의 맛으로 승부했다. 조용하지만 묵직한 한방이 있었다. 독특하게 밥을 팔았는데 동남아식의 찰기 없이 날리는 쌀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먹는 쌀밥은 반가웠다. 버거는 통닭다리살이 두툼한 수제버거집 퀄리티였다. 엄마의 손맛이 느껴지는, 그런 푸근한. 느낌대로 들어간 가게였지만 너무 만족스러운 식사였고, 떠나기 전에 한번 더 먹고 싶었다.


구시가지까지 가는 동안 마주친 로마의 거리들


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소화도 시킬 겸 구시가지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큼직큼직한 건물과 시원스레 펼쳐진 대로가 수도는 수도구나 싶었다. 코너를 돌아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 사람들이 다녔는지 보도블록이 잘 다듬어진 조약돌처럼 반질반질 광이 났다. 대로도 대로지만, 로마는 골목길이 진짜 숨겨진 보석이었다. 영화에서 보던 뷰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데, 앞구르기 하면서 찍어도 A급 화보였다. 도시 전체가 영화의 무대로 쓰인다는 게 어떤 말인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당장이라도 골목에서 바이크를 탄 주인공이 악당들을 뒤꽁무니에 달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행렬에 섞여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도착한 트레비 분수


얼마나 걸었을까, 구시가지의 초입에 있는 트레비 분수에 도착했다. 분수는 시원스레 떨어졌지만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한증막에 들어온 것처럼 후끈했다. 사진으로 보던 것에 비해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조각상의 근육, 실핏줄 하나하나가 너무 사실적이어서 신화 속 인물들이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다. 으레 다른 여행자들처럼, 우리도 동전을 던지며 가족의 건강과 무사귀환을 빌었고 다닥다닥 붙은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얼굴이 화면의 2분의 1을 차지하는 초근접 인증샷도 찍었다. 벽 한 면에는 삼성 갤럭시 광고가 대문짝만 하게 걸려있었는데 괜히 반가웠다. 먼 타국에서 한국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생각보다 흔치 않으니까! 물론 하루 광고료가 어떻게 될까 가 더 궁금하긴 했지만!!




31.JPG 스페인 광장 위에서 본 해 질 녘 로마의 하늘


조금 있으니 해 질 녘 풍광이 펼쳐졌다. 발갛게 물들어 가는 로마의 하늘이 알맞게 익은 납작복숭아의 빛깔을 닮았다. 분명 점심때까진 피렌체에 있었는데, 저녁은 로마뷰라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 사랑스러운 노을을 차곡차곡 빈틈없이 두 눈에, 마음속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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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계단과 광장, 티라미슈 맛집 '폼피'


엄마는, 스페인 계단이 영화 <로마의 휴일> 속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곳으로 유명했어서 기대했는데 "막상 와보니 아이스크림 먹는 사람은 한 명도 없네~" 하면서 약간은 아쉬워했다. 하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아이스크림 대신 이 근방에서 티라미수로 유명한 '폼피'의 티라미수를 사 왔다.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사람 구경하면서 달달한 디저트를 떠먹으니 피로가 풀리면서 로마의 저녁이 좀 더 다정하게 느껴졌다.

(참고로, 스페인 계단은 2019년부터 문화재 보호를 위해 계단에 착석하는 것도, 음식물 섭취도 금지다. 경찰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제지하며 위반 시, 정도에 따라 160∼400유로(약 21만∼54만 원) 사이의 벌금이 부과된다.)



스페인 광장 앞 콘도티 거리, 일명 로마 명품거리로 불리는 곳으로 갔다.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 아는 브랜드부터 처음 보는 브랜드까지 거리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있었는데 외관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중에서 우린 구찌 매장을 들어갔다.


엄마는 한국에서 미리 봐놓았던 가방을 직원에게 요청했고 한 번 매보고 컨디션을 확인한 후 바로 구매했다. 여러 브랜드의 가방을 후보군으로 놓고 장단점을 다 비교해 본 다음, 이 가방을 사려고 마음먹고 온 터라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포장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한 가족 단위의 손님이 눈에 들어왔다. 우린 매장에 들어와 가방을 구매하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는데, 우리보다 먼저 들어와서 가방도 보고 신발도 보고 액세서리도 보던 한 서양인 가족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콜라를 마시며 요청해 놓은 가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품 매장에서 콜라?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매장 안에서 뭘 마시면서 저렇게 여유롭게 구경을 한다고? 더군다나 매장 안엔 사람들이 많아서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이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직원들도 눈치 주는 일 없이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외국인 손님들은 느긋하게 걸어 다니며 매장에 전시된 물건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면서 직원에게 궁금한 걸 묻고 있었다. 반면, 한국인 손님은 매장에 들어오자마자 사려고 하는 물건을 직원에게 사진으로 보여주며 요청했고 컨디션 확인 후 바로 사서 나갔다. 한국인 두 커플을 봤는데 매장에 들어와 물건을 사서 나가는 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방금 전의 우리를 보는 듯했다.


언어가 자유롭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여행 시간에 좇기다 보니 그런 것도 있을 테지만 물건을 구입하는 태도 가 많이 달랐다. 직원 입장에선 설명도 필요 없고 물어보는 것도 없는 한국인 손님이 최고지 않을까. 한편으론 미리 공부를 다 해와서 직원보다 해당 제품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한국인의 열정이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국내에 없는 제품도 많은데 이런 다양성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어 어쩐지 씁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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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티 거리 구찌 매장에서 "여유롭게" 콜라 마시기


기묘한 느낌을 받으며 매장을 나가는데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우씨, 우리도 목마른데! 우리도 콜라 마시고 싶은데!! 심지어 우리는 물건을 샀고 저쪽은 물건을 살지 안 살지도 모르는데!!! 그때 엄마가 외쳤다.


"얘들아, 우리도 콜라 마시자!"


매장을 다시 들어가서 우리가 가방을 구매할 때 응대해 줬던 직원을 찾았다. 다시 온 우리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직원에게 우리에게도 콜라를 줄 수 있겠니? 수줍게 물었다. 직원은 살짝 당황해하긴 했지만 흔쾌히 웃으면서 알겠다며, 자리에 앉아 있으면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후회를 남기는 것보단 나았다.


한창 바쁜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손님이 많이 빠져있었다. 덕분에 10분 정도 여유롭게 앉아서 콜라를 마시곤 홀가분한 기분으로 매장을 나왔다. 이젠 우리도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야, 우리도 구찌 매장에서 콜라 마셔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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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콜라맛은 어땠냐고? 끝내주게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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