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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Jun 04. 2024

잔잔한 재즈 같은, 미켈란젤로 광장에서의 선셋

이탈리아-피렌체(7.18)

#유럽여행 16일차 (2)


피사에서 돌아와 숙소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저녁 8시쯤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러 숙소를 나섰다. 밤 9시 가까이 되어서야 해가 지는 7월의 피렌체에서는, 8시가 되면 도시 곳곳에 흩어져있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어딘가로 향하는 걸 볼 수 있다. 이 행진의 도착지는 바로 미켈란젤로 광장. 피렌체의 대표 노을 맛집인 이곳에선 오렌지빛 그라데이션 하늘을 배경으로 두오모와 조토의 종탑, 베키오 궁전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환상적인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매일 저녁 피리 부는 소년을 따라가는 아이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름은 미켈란젤로 광장이지만, 정작 미켈란젤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미켈란젤로가 이 광장을 설계했다거나 그렇다고 자주 찾던 공간도 아니었다. 시기도 미켈란젤로는 15~16C에 활동했고, 광장은 1871년에 조성된 거라 접점이 없는데, 그나마 미켈란젤로와의 관련성을 찾아보자면 광장 중앙에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다비드> 청동 복제품이 있다는 것 정도? 이탈리아인들의 미켈란젤로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지금은 여행자에게도, 현지인에게도 사랑받는 공간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걸 보면 미켈란젤로도 흐뭇해하지 않을까.


밖으로 나오자 거리는 석양을 보러 광장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낮의 햇빛으로 발갛게 익은 얼굴들엔 노곤함이 묻어있었지만 기대감도 함께 깃들어있었고, 양손에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들고 가는 사람 특유의 느긋함이 저물어가는 도시와 묘하게 어우러졌다. 행렬 속에 섞여서 걸어가는데, 거리에 흐르는 재잘거림과 그들의 걸음걸이가 일정한 리듬감을 만들어내면서 달뜬 안정감을 줬다. 낮에 피사에 갔다 오느라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피로가 희석되어 다행히 조금씩 컨디션이 올라왔다.


산타 트리니타 다리에서 바라본 베키오 다리와 해질녘 풍경


기운을 차리고 힘차게 걷다 보니 어느새 아르노 강가에 도착했다. 미켈란젤로 광장을 가기 위해선 아르노 강을 건너야 했는데, 저번에 베키오 다리를 건너갔으니 이번엔 베키오 다리를 측면에서 볼 겸 옆에 있는 산타 트리니타 다리로 향했다. 다리 위엔, 나지막한 난간에 걸터앉아 맥주 한 잔씩을 기울이는 사람들과 반려견을 산책시키러 나온 할아버지, 기타 하나를 매고 노래 부르는 청년이 있었는데 정말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었다. 여긴 오히려 현지인이 더 많아 보였는데, 베키오 다리는 여행객들에게 내어주고 피렌체 시민들은 이 다리 위에서 해질녘 풍경과 베키오 다리를 즐기는 것 같았다. 저녁을 보내는 그들의 모습이 몇십 년은 늘 그래온 사람의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세월을 담은 이 도시와 꼭 맞는 퍼즐조각처럼 잘 어울렸다.


아르노강의 주변풍경. 1일 0.7젤라또는 놓칠 수 없다!


산타 트리니타 다리를 건너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젤라또집이 나타났다. 이탈리아까지 와서 눈앞에 젤라또집이 나타났는데 그냥 지나친다? 노노, 그건 직무태만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허투루 지나쳐선 안된다. 방앗간마다 떡맛은 다 다르니까. 쫀득한 젤라또를 베어 물면서(이번에도 3개가 아니라 2개지만.. 흑) 아르노 강변을 따라 걷는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게 보였다. 막 만개한 작약꽃 같은 보드라운 분홍빛과 노란빛, 주황빛이 어우러진 빛의 장막이 하늘에서 은은하게 감돌았다. 젤라또의 새콤달콤한 맛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광경일까. 엄마랑 연신 감탄을 쏟아내고 있는데 오빠가 "이 속도면 광장 도착해선 야경만 볼 수 있겠는데?" 라며 팩트를 짚었다. 여기서 보는 일몰도 물론 멋졌지만 원래 목표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보는 일몰>이었기에, 우린 환상적인 풍광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강변에서 벗어나 약간 경사가 있는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숨이 막 가빠질 때쯤, 이름에 걸맞은 넓은 테라스풍의 광장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아래로,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석양으로 기억되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의 선셋이 펼쳐졌다. 사진으로만 봤던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재생되는데,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풍경이 말을 걸어온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황홀한 오렌지빛 하늘은 내 삶을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을 하나둘 떠올리게 했다. 보고 싶은 얼굴들, 그리운 얼굴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 이름들을 하나둘 불러보고 싶게 만드는 먹먹한 아름다움이 이곳, 미켈란젤로 광장에 스며 있었다. 우린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눈앞에 펼쳐진 순간을 그저 바라봤다.



저녁놀이 절정으로 달려갈수록 미켈란젤로 광장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테라스와 계단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고, 잔은 비워갔고, 웃음소리는 하늘 높이 퍼져나갔다. 말없이 손을 꼭 붙잡고 붉은빛의 석양이 내린 창공을 바라보는 노부부도, 화사한 하와이안 꽃무늬 티셔츠를 입고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는 젊은 커플도, 버스킹 음악에 맞춰 블루스를 추는 중년의 부부도, 모두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지금도 한 번씩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일몰을 함께했던 이름 모를, 그러나 왠지 알 것만 같은 그때 그 사람들이 생각이 난다.


한편에는 길거리에 이젤을 세워놓고 이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미켈란젤로의 후예들이 있었다. 그래, 매일 이런 풍경을 보고 사는데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게 이상하지.. 우피치 미술관에서 보았던 작품들이 괜히 탄생한 게 아니었다. 오렌지빛이 서서히 코발트블루로 변해가는 하늘을 보고 있으려니 문학에서 통용되는 '가슴이 저미도록', '형용할 수 없는' 따위의 표현들이 어떤 느낌을 말하는 건지 알 것만 같았다. 이런 표현을 쓴 작가는 아마도 지금과 같은 마음의 떨림을 염두에 두고 쓴 걸 테지. 앞으로 이런 문학적 표현을 만나면 내 기억 속 피렌체를 떠올리기로 했다. 1시간 정도 멍하니 바라보던 시간. 잔잔한 재즈가 귓가에 맴돌았다. 하나둘 가로등 불이 켜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광장을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늘의 색깔과 구름의 모양이 시시각각 변했다. 예쁜 모습을 놓칠세라 사진을 찍으면 모델이 포즈를 바꾸듯 금세 또 새로운 구도와 형태를 보여줬다. 사진을 몇 번 더 찍다가 그냥 멈춰 서서 이 경이로운 순간을 눈에 담았다. 아르노강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고 우린 시간이 많은 여행자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세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얘기하며 입술을 달싹였던 그 감촉만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숙소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샀다. 여태까지 해외여행을 하면서 한국음식점을 찾거나 라면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맘때쯤 되니 라면 생각이 절로 났다. 그런데 라면 한 봉지가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3배는 비쌌다. 머리로는 이건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이날만큼은 감성이 이겼다. '피렌체에서 마지막 날이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살아있어서 딱 한 봉지만 집어 들었다.




비릿한 닭의 냄새가 난다. 우리나라 닭과는 다르다. 살면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강렬한 이태리 치킨의 향이 폐부를 찔러온다. 숙소 호스트가 준비해 준 레드와인 한 병을 냄비에 다 넣고 닭과 함께 끓인다. 와인을 버리고 삶아진 닭고기를 물로 헹군다. 버터를 넣고 닭고기를 볶는다. 한국에서 준비해 간 튜브고추장과 빵에 발라먹으라고 소분된 직사각형 모양의 꿀을 넣고 쉐킷쉐킷 섞어준다. 마지막에 샐러드용 야채를 넣고 한 번 더 휘리릭 볶아주면 완성!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음, '고추장닭야채볶음' 정도가 될 테다. 레시피는 따로 없다. 30년 요리경력의 엄마의 감에 의지한 즉석요리의 탄생이다. 스테이크는 시즈닝을 한 후 올리브유에 튀기듯이 구워준다. 핏기가 표면으로 살포시 고개를 내밀면 뒤집어서 반대편도 천천히 익혀준다. 다 익은 스테이크는 5분 정도 래스팅해준다. 오빠의 감각적인 손목스냅으로 구워낸 겉바속촉 스테이크다. 라면은 클래식하게 다른 재료첨가 없이 동봉된 면, 수프, 건더기 3개만으로 완성한다. 단순함의 미학이다.(따로 더 넣을 재료도 없었다. 하하)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만찬


와인에 끓여낸 닭은 잡내도 없고 식감도 엄청 부드러웠다. 와인을 닭고기에 양보한 게 신의 한 수였다. 클래식하게 끓여낸 라면은 그리운 고국의 맛이었다. 원래 국물은 잘 안 먹는데 이날만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싹싹 비웠다. 스테이크는 거짓말 안 하고 밖에서 먹은 것보다 맛있었다. 오빠의 오른팔을 올리브유에 희생하고 얻은 결과물이니 당연했다. 밍밍했던 수박이 옥에 티이긴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웠던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였다.


이건 꿀팁인데, 다음에 외국에 나가게 되면 꿀과 튜브고추장은 필수로 챙겨가자. 유럽에선 매운 음식 찾기가, 특히 '한국인 입맛에 맞는' 매운 음식 찾기가 은근히 어려운데, 한 번씩 매콤한 걸 먹고 싶을 때 이만한 치트키가 없다. 이상 엄마의 전언이었다. 내일은 로마로 떠나는 날이라 캐리어에 다시 짐을 쌌다. 정든 숙소와 이제 좀 친해진 피렌체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괜히 아쉬움이 남아서 짐을 다 싸고도 한동안 거실에서 꾸물대다 겨우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낭만적인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갔다.


물론 내일 몰아칠 엄청난 폭풍을 이때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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