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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에선 모두가 펭귄이 돼

이탈리아-로마(7.21)

by 이수빈

#유럽여행 19일차 (1)


전날밤, 숙소에서 콜로세움까지 가는 길을 구글지도에 검색해 보니 도보로는 15분, 버스를 타면 25분 걸렸다. 로마는 넓어 보이지만 은근 다 둘레둘레 모여있어서 교통권을 쓸 일이 생각보다 없다. 오히려 걸어가는 게 더 빠른 경우가 많고. 혹시나 싶어 거리뷰를 확인했는데 최단거리의 길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평지라 걷기에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좋아, 아침산책도 할 겸 걸어가자! 빠르게 내일 일정을 매듭짓고 잠자리에 들었다. 정확히는,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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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콜로세움까지 가는 길


다음날 아침,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만큼 개장시간에 맞춰 도착하기 위해 서둘러 숙소에서 나왔다. 선선한 아침 공기가 상쾌했고 거리는 어젯밤 거리뷰에서 봤던 모습보다 더 화사한 생명력을 발했다. 초록빛의 싱그러운 나뭇잎 터널이 끝없이 펼쳐졌고, 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조각은 우리 옷에 갖가지 모양의 무늬를 만들어냈다. 관광객보단 현지인들이 사는 한적한 동네였는데 덕분에 로마 사람들이 아침을 여는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카페에선 밤새 올려져 있던 의자를 내리고 유리잔을 닦느라 분주했고, 빵집의 열린 문 사이론 갓 구운 빵냄새가 솔솔 흘러나왔다.


자유여행이 좋은 건, 내가 갔던 장소가 머릿속 지도에 하나의 점으로 찍히는 게 아니라 그 주변 풍경들이 방사형 그래프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덕분에 언제든지 내가 걸었던 골목길을 떠올릴 수 있고 때론 이름 모를 공원과 카페, 지나가던 행인이 목적지보다 더 큰 비중으로 그날 풍경의 일부로 자리 잡기도 한다. 길 위에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생겨나기라도 하면 그 길은 고유한 색깔을 가진 '나만의 길'로 두고두고 기억된다. 시간이 흘러 콜로세움을 떠올릴 땐 머리 위로 끝없이 펼쳐졌던 나뭇잎 터널과 갓 구운 빵냄새가 제일 먼저 생각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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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아침이 빚어내는 풍경 속을 걷다 보니, 어느새 종이를 만 것 같기도 한 독특한 외관의 콜로세움이 우리를 맞이했다. 오전 8시 25분. 알맞게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콜로세움은 이미 인파에 포위당해 있었다. 얼른 줄을 섰고 다행히 9시쯤 통합권을 구매할 수 있었다. 줄 서는 데만 반나절씩 걸린다고 해서 겁을 먹었었는데 아침에 부지런히 움직인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입장권을 들고 인증샷을 찍은 후, 입장 줄을 서려는데 바티칸 투어 때 우리를 안내해 줬던 헤라가이드님을 만났다. 바티칸 투어만 하시는 줄 알았는데 콜로세움 투어도 하시는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라 더 반가웠다.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한 오늘의 양떼들을 베테랑 목동의 손길로 줄을 세웠다.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실내투어가 주를 이뤘던 바티칸과 달리 콜로세움은 야외라 멋진 검정 선글라스를 장착했다는 점. 스몰토크를 나눈 뒤 바빠 보이는 가이드님을 놓아주고 우리도 줄을 서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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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안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내부 탐험을 시작하려는데 내리쬐는 직사광선에 단 5분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빛이 피부를 뚫고 들어와 세포 하나하나를 마비시키는 느낌이었다. 강한 햇빛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스마트폰도 화면 밝기 조절에 오작동을 일으켰다. 설상가상 양지에선 화면 밝기를 최대로 올려도 햇살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화면이 보이지 않았고, 나중엔 아예 화면 보기를 포기하고 감에 의지해서 사진을 찍었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그늘마다 사람들이 펭귄처럼 옹기종기 모여들었는데, 바람이라도 한 번 불라치면 다들 손부채를 멈추고 고개를 하늘로 젖히며 바람맞을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물론 우리도 그 웃긴 펭귄 중 셋을 담당했고. 그 결과 이날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제일 많이 한 얘기는,


“신은 빛이 아니다. 그늘과 바람이 신의 선물이다!!!”


였다. 콜로세움에서 펭귄이 되어 얻은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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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부터 타원형의 경기장을 반바퀴 돌아오니 콜로세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2천 년 전에 이런 대형 경기장을, 그것도 당시 기술로 무너지지 않도록 지었다는 게 신기했다. 과연 세계 7대 불가사의다웠다.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모습에서 언뜻 중국 시안의 진시황 병마용이 연상됐는데, 미로와 같은 이곳 지하는 실제 사람들이 움직였을 공간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 찬찬히 그 생김새를 눈에 담았다. 군중의 함성 소리로 가득 찼을 경기장. 지하에서 승강기를 타고 올라와 모래가 깔린 1층 경기장에서 서로 뒤엉퀸 채 싸웠을 동물과 사람을 상상해 본다. 그 옛날, 모의해전도 이뤄졌다는데, 경기장 안에 물을 받아 배를 띄운다니 정말 대담한 구상과 창의적인 발상이다. 한편으론, 누군가에겐 엔터테인먼트의 장이었겠지만 이곳에서 스러져갔을 검투사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으스스해지기도 하고. '인류 역사는 아이러니함으로 가득 차 있구나.' 세상의 진실 한 조각을 찾은 사람처럼 혼자 되뇌어 보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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